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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기는 사람 (막 10: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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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제자들의 잘못된 자세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높은 자리를 구하는 욕망과 교만이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자세에 대하여 예수님이 다시 한번 다루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교만한 자가 되서는 안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듣고 읽는 사람의 입장에선 비슷한 주제가 반복되면 식상해서 지루함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슬쩍 넘어가고 싶은 유혹을 받게되죠.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섬김이라는 주제를 반복해서 강조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섬김의 진리가 제자들의 마음에 잘 박힌 못처럼 깊숙이 박히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복되는 진리일수록 그 진리가 마음에 뿌리를 내려 삶에 열매를 맺을 때까지 묵상하고 또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섬기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갖게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1. 분개하는 제자들(41)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를 구하는 욕망과 교만의 문제를 다시 다루시게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가 예수님께 노골적으로 자리를 요청한 야고보와 요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머지 제자 모두의 문제라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은밀하게 자리를 청탁한 사실이 10제자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이에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개하였습니다. 그 형제가 아주 못되고 괘씸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엔 자기들은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10제자가 분개했다는 것은 사실 그들 자신도 야고보와 요한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만일 이들이 높은 자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높은 자리를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면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그렇게 화낼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형제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또 다시 반복해서 섬김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는 교만처럼 깨닫기 어려운 악도 없습니다. 흔히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말들을 하지요. 사람 속에 있는 것 중에서도 가장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악입니다. 그 점에서 오늘 분개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이 높은 자리를 탐하는 교만한 자 인지 아닌지 점검해볼 수 있도록 좋은 시금석을 제공해줍니다. 우리는 노골적으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설치는 사람들만 교만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자기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욕심 없는 겸손한 사람이란 생각을 하지요. 그러나 설치는 사람을 향해 분개를 하는 순간 우리의 교만의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란 책에서 교만에 대하여 아주 명료하게 분석하였습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우리 마음 깊은 곳을 꿰뚫는지 자신이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는 다른 악은 인간의 동물적 본성을 통해 오지만 교만은 지옥에서 곧장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악독하고 무서운 죄라는 것이죠. 자기가 교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별해낼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교만한 꼴을 못 봐준다는 것이죠. 교만한 사람을 보면서 느끼는 분개심의 강도가 자신의 교만정도를 가늠해주는 잣대가 됩니다.

교만은 단순히 무엇을 많이 갖고자 하는 탐욕이 아닙니다. 단순한 탐욕은 어는 정도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코앞에 있어도 식욕이 땅기지를 않지요. 교만은 다릅니다. 교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질 때까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 까진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욕망입니다. 교만은 루이스가 잘 지적한 데로 본성상 경쟁적입니다. 요즘 제 2의 형제의 난이 일어났다고 언론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10대 재벌 안에 드는 모 그룹의 형제들이 경영권을 놓고 편을 갈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고 하죠. 그 형제들은 사실 이미 엄청난 재산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죽을 때까지 걱정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왜 이렇게 비참하게 싸웁니까? 다른 형제보다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는 욕망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의 본질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은밀하게 자리를 청탁한 것도, 10제자들이 분개한 것도 바로 이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 교만이 꽈리를 틀고 있지는 않은지 늘 깨어서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처럼 설치고 다니지 않는다고 자신이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쉽게 결론을 내려선 안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쉽게 분노하는 것은 바로 이 교만 때문이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이 세상엔 교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곧 살펴보겠지만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나는 교만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루이스가 잘 꼬집은 것처럼 나는 우쭐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사실은 우쭐되는 사람입니다. 가장 안전한 사람은 나는 교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날마다 부서져야 한다고 자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교만을 극복하여 자신을 온전히 잊어버리는 아름답고 즐거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됩니다. 오늘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바랍니다.

2. 10 제자의 정체를 넌지시 밝혀주시는 예수님(42)

예수님은 분개하는 10제자들을 자신의 곁으로 부르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끈질긴 사랑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저 같으면 너무 실망스러워서 그런 제자들을 곁으로 부르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을 것 같습니다. 뚜껑이 열려도 한참 열렸을 것이고 한숨만 푹푹 나왔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진지하게 세 번이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건만 제자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깊은 고민과 아픔을 이해하려하기는커녕 철없이 자리나 청탁하는가하면 이를 알아채고 서로에게 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자신 곁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욕망과 교만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찬찬히 도와주십니다. 우선 그들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를 넌지시 밝혀주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통치자들의 모습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던져주십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42).

예수님은 참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최대한 제자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십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라고 말씀하심으로 지금 자신이 말하려는 바는 이미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며 그들의 지식에 호소합니다. 부부사이에도 제일 싫어하는 것은 경멸조의 언어라고 합니다. '아니, 당신은 이것도 몰라?'라는 말이 대표적인 예이죠. 예수님은 그렇게 자존심을 짓밟는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지적 자존심을 세워주시며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들이 진정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이방인 통치자처럼 돼버렸다는 점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방인 통치자들의 특징은 권위주의입니다. 그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함부로 대하고 내리 누릅니다.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으스대며 세도를 부립니다. 그들은 바로 그 짜릿한 맛을 누리려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타락한 세상의 가장 현저한 특징입니다. 이를 잘 간파한 사람이 바로 니체라는 철학자입니다. 그는 인간의 가장 강한 본능을 권력을 향한 의지라고 보았고 그 관점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권력을 향한 의지를 긍정적으로 찬양하면서 기만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섬김의 윤리도 따지고 보면 종처럼 저급한 인간들이 자신보다 탁월한 초인을 지배하기 위하여 고안해낸 비겁한 윤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권력을 노골적으로 추구하고 쟁취하여 모든 것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초인이 나타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날 그대들은 먼 바다를 응시하면서 "하나님"을 불렀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초인"을 부르라고 가르쳐 왔다'. 그는 초인이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을 밝혀내는 것을 일생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 일환으로 기독교를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기독교신앙에 대한 궁극적 고발은 기독교신앙은 인간을 우주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자신의 힘을 최고조로 향상시킬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은 이처럼 궁극적으로 자신의 힘을 최고조로 향상시키려는 사람들의 각축장이라는 것을 익히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는 그리스도인들마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와 각종 신앙공동체를 그런 권력의 각축장으로 탈바꿈시키곤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증명합니다. 제자들은 로마의 식민 통치자들과 그 앞잡이들이 바로 이런 자들이란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온 몸으로 경험해 왔습니다. 그래선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그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사도 이를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많은 종교전쟁을 보면 그들의 진짜 관심은 진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배권력에 있었습니다. 오늘 이라크 전쟁과 자살테러의 악순환을 보면서 우리가 슬퍼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론 자유, 민주주의, 혹은 이슬람 진리의 순수성을 외치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강대국들의 냉혹한 패권주의와 약소국의 서럽고 상처받은 분노사이의 비극적인 싸움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이유도 바로 교만에서 비롯된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살펴보라고 단단히 경고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죄의 세균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무균상태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와 치열하게 싸워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사람일뿐입니다. 방심하면 언제라도 교회와 신앙공동체를 권력의 각축장으로 변질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단은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루이스가 예리하게 성찰한 것처럼 사단은 우리 마음에 권력을 추구하는 교만만 심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양보할 의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교회활동하는 것을 말리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부추기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교만이라는 무서운 정체를 그 뒤에 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도덕을 쌓아 가는 것도 말리지 않습니다. 순결하고 절제하면서 용감하게 사는 것을 오히려 격려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자신이 교만이라는 치명적인 암에 걸린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본문의 제자들이 그런 함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혹시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정체성을 받아들여 신앙과 헌신을 빙자하여 세상지도자들처럼 권력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살펴야겠습니다.

3.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권면하시는 예수님(43-45)

제자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신 다음 이제 보다 적극적으로 권면하십니다(43-44). 제자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권력자들처럼 남을 누르고 지배하는 권력을 추구하는 교만한 자가 되서는 안된다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위대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 자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의 지혜를 다시 한번 배웁니다. 긍정적인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제자들 안에서 예수님은 살려낼 수 있는 것을 찾아내십니다. 그것을 긍정적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위대함과 진정한 으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심으로 그들의 사고의 방향을 바로 잡아주십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섬기는 사람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진정으로 으뜸인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사람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과는 정반대의 가치관입니다. 세상에선 음식을 나르고 식탁 주변에 서 있는 사람은 천한 사람이요 의자에 편안하고 점잖게 앉아 음식을 먹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백악관 경비원은 천대받지만 백악관의 주인인 미국 대통령은 하나님처럼 떠받듦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식탁의 웨이터가 위대하고 경비원이 으뜸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오해하면 안됩니다. '아, 섬기는 사람이 되면 결국엔 남을 지배하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구나!' '아, 모든 사람의 종이 되면 결국 모든 사람을 손안에 거머쥘 수 있는 일인자가 될 수 있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섬기는 자체가 위대하다는 말입니다. 섬김을 잃는 순간 위대함을 잃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체가 일인자가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종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일인자의 자리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황제도의 함정이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 교황이라는 엄청난 권력을 누리는 조건으로 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함정은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일단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을 잘 섬기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고 다른 사람의 종노릇을 잘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면 어느 순간 그의 손에 권력이 주어지기 시작합니다. 교회의 핵심인물이 되어서 재정과 인사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죠. 처음에 그렇게 겸허하고 검소했던 이들이 일단 목회에 성공하면 놀라운 지위와 권력을 누리게 됩니다. 그 상징으로 운전사 달린 최고급 대형자동차와 대형호화주택을 누리고 경호원에 둘러 싸여 다닙니다. 아무리 비리를 저질러도 감히 누구도 항의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로 우뚝 서게 됩니다. 그가 젊은 시절 희생하고 헌신하여 일군 교회가 그를 철통같이 보호하는 난공불락의 방패막이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그리고 끝까지 섬기는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진실한 속내를 제자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예수님은 삶의 목적 자체를 섬김에 두셨습니다. 섬김을 거쳐 나중에는 섬김 받는 존재가 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치러야 하는 몸값으로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줄 목적으로 살고 계셨습니다. 몸값이란 말은 옛날 노예시장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노예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려면 노예 주인에게 그의 몸값을 지불하면 됐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노예 상태에 있는 우리를 그로부터 자유케 하기 위해 우리의 몸값으로 자신의 생명을 드린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섬김입니까?

물론 예수님은 그 고난 후에 부활이 있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권세를 휘두르는 자리로 이해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절망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얼마나 온유한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셨습니까? 역사의 마지막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도 그 분은 우리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신랑으로서 우리를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맺음말)

오늘 말씀은 은밀하고 교묘하게 우리 마음에 숨어들기 쉬운 교만을 들쳐 내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방심해선 안됩니다. 항상 깨어서 높은 자리를 추구하는 교만과 싸워야겠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요 으뜸이라는 것을 언제나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섬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해야겠습니다. 
(박득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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