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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계명 강해설교 6] 이웃의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신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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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도적질 하지 말라

오늘부터 십계명의 제6계명부터 10계명까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개의 계명을 살펴보면 모두가 도적질에 관한 내용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도적질 하지 말라”는 내용은 2주 후에 살펴볼 제8계명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제8계명뿐 아니라 다른 네 개의 계명도 결국은 도적질, 즉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을 금지하는 계명이라는 말입니다. 먼저 오늘 살펴볼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인데 살인이란 결국 남의 생명을 도적질 하는 행위입니다. 또 제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인데 간음이란 남의 배우자를 빼앗고 가정의 화평을 도적질 하는 행위입니다. 제8계명은 “도적질 하지 말라”인데 도적질이란 남의 재산을 훔치는 행위입니다. 제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말라”인데 거짓 증거란 다른 사람의 명예와 인권을 짓밟고 빼앗는 행위입니다. 마지막 제10계명은 “네 이웃의 아내, 집, 밭, 종, 가축,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인데 이는 이웃의 소유를 훔치는 행위도 죄지만 탐내는 것, 즉 욕심을 갖는 자체만으로도 도적질과 마찬가지로 큰 죄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십계명의 제6계명부터 10계명은 우리가 남의 소유나 인격이나 가정 등 남이 가진 모든 것을 존중해야 하며, 내 욕심을 차리기 위해 함부로 빼앗거나 탐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규정들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제6계명입니다. 남이 가진 것은 모두 소중합니다. 남의 것은 모두 존중하고 내 마음대로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 중에 제일 첫 번째로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 바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왜 생명이 소중합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물론 가정도 소중하고 재산도 소중하고 인격이나 명예도 소중하지만 이런 것들은 언제든지 다시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재산도 잃었다가 얼마든지 다시 얻을 수 있고, 인격이나 명예도 땅에 떨어졌다가 다시 회복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아내나 가정도 잃었다가 다시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독 생명만은 절대 한 번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의 것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이요, 남의 생명은 그 어떤 이유로도 빼앗거나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이 소중한 이유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으로 들어가면 더 중요한 이유가 나옵니다. 창세기 2:7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내 생명이든 남의 생명이든 사람이 제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기억해 두십시오. 다른 것은 몰라도 인간의 생명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살인으로 생명을 빼앗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가끔 뉴스에 보면 세상을 비관하고 동반자살한 부부가 어린 자녀들을 먼저 죽이고 자기네들도 자살했다는 소식이 나옵니다.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은 것도 큰 죄지만 죄 없는 자녀들을 죽인 것은 더 큰 죄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그것은 자녀의 생명이 부모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낳았고 내가 길렀으니 그 생명도 내 것이라는 큰 착각입니다. 아닙니다. 생명은 부모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의 것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생명이 소중한데 세상에 그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억만금을 준다 해서 자기 생명을 바꾸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재산이나 명예를 준다 해도 내 생명과 바꿀 수 있습니까? 세상 모든 것을 얻는다 해도 정작 나 자신이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제 생명 소중한 줄은 알고, 제 생명은 그렇게도 아끼면서 정작 남의 생명 소중한 줄은 모르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실제로 제 이익을 위해, 저 잘되기 위해 남을 해치고 죽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살인이요 그 살인은 정말 무서운 죄가 됩니다.

살인의 동기

그렇다면 세상에서는 왜 이렇게 소중한 남의 생명을 빼앗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살인의 이유나 동기가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씀하는 살인의 동기에 대해 몇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경에는 분노와 미움, 시기에 의한 살인이 나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제물은 받아주지 않고 동생 아벨이 바친 제물만 받아주시자 심히 분노하여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쳐 죽입니다(창 4:8). 동생에 대한 분노와 시기가 인류 최초의 살인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둘째, 복수심에 의한 살인이 있습니다. 라멕은 자신에게 창으로 상처를 입힌 사람을 죽였다고 아내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창 4:23). 시므온과 레위는 자신의 여동생을 겁탈한 일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 범인인 세겜뿐 아니라 그 가족과 부족 전체를 몰살합니다.

셋째, 욕심에 의한 살인이 있는데 인간이 살인을 하는 동기 중 가장 흔한 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의 종류가 워낙 많지만 세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 물질적인 욕심에 의한 살인 :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서 건달 둘을 매수해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했다고 거짓 증언을 하게 해 돌로 쳐 죽입니다(왕상 21:13). 물질에 대한 욕심은 인간이 살인을 하는 가장 많은 동기가 됩니다.

2) 권력욕에 의한 살인 : 사사기 9장에 보면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왕이 되기 위해 은 70개를 가지고 깡패들을 사서 자기 형제 70명을 한날한시에 죽입니다. 압살롬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권력욕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친구도 부모도 형제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3) 성적인 욕심에 의한 살인 : 다윗은 충실한 부하 장군 우리야의 아내에게 성욕을 품고 궁전으로 불러 동침한 후 임신을 하자 이를 숨기기 위해 남편 우리야까지 전쟁터로 내몰아 죽게 합니다.

넷째, 아무 동기 없는 살인도 있다고 합니다. 요즈음 일어나는 사건 가운데 참 특이한 경우가 이것인데 끔찍한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아 취조를 해보니 살인 동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죽였는데 왜 죽였냐고 물어보니 “그냥 죽이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유 없는 살인이란 절대 없습니다. 어떤 학생이 아무 이유 없이 지나가던 모녀를 죽였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무 동기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집에서 어머니에게 심하게 꾸중을 듣고 집을 뛰쳐나왔는데 지나가던 모녀가 너무 사이좋게 보여 화가 났다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길을 지나가던 연인을 해쳤습니다. 역시 동기가 없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얼마 전 애인에게 실연을 당한 후 지나가던 연인들이 하도 다정해 보이니까 해친 것입니다. 겉보기에 정말 멀쩡하고 학력이나 직장을 봐도 도무지 살인을 할 이유가 없는데 실은 어렸을 때 당한 학대나 폭력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고 저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다가 폭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유 없는 살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도, 또 내가 받은 상처를 잊지 않고 품고 사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살인의 방법

이제 성경에 나오는 살인의 방법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직접 사람을 죽이는 방법입니다. 내 손으로 직접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남을 죽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6계명은 십계명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나와 상관없다고 여기는 계명이기도 합니다. “다른 계명은 몰라도 나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으니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계명이구나”라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성경은 꼭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둘째, 미움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나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는 말씀처럼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 자체가 살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도 교회 밖에서, 교회 안에서 얼마나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또 살인한 것일까요?

셋째, 말로 남을 죽이는 방법입니다. “형제를 대하여 라가(‘골빈 놈’)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는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그 인격과 명예를 모독하면 그 역시 살인죄와 똑같은 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더 많은 살인죄를 지은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남에 대해 함부로 내뱉는 말들, 헐뜯고 흉보는 말, 구설수, 없는 말도 지어내는 ‘카더라’ 식의 언어는 분명히 남을 죽이는 것이며 이러한 죄는 지옥 불에 들어갈 정도로 큰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이렇게 벌이 무서우냐? 말 한 마디로 남의 영혼을 파괴하고 그를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든지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 한 마디가 나를 지옥 불에 떨어뜨릴 수 있다니 말을 얼마나 조심해야 하겠습니까?

넷째, 권력이나 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입니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왕이라고 해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함부로 남의 생명을 빼앗으면 안 됩니다. 이런 경우는 살인죄뿐 아니라 권력 남용죄가 하나 더 붙어 그 벌이 더 무겁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의나 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잘못된 일입니다.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데 역사상 기독교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킨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은 절대 하나님의 뜻이 아닐 뿐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는 행위입니다. 또한 얼마 전 한기총이라는 기독교단체에서 사형제도는 기독교적으로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발표해서 큰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에게 남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는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섯 째, 자기 자신을 죽이는 방법 즉, 자살입니다. 자기 생명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죄책감에 자살을 합니다. 얼마 전에도 유명한 연예인이 자살을 했는데 우리 교단 교회를 열심히 다녔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있었습니다. 자살은 죄이며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하고 존엄한 생명은 내 마음대로 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살은 살인죄와 같습니다.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생명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양한 동기와 방법에 의해 살인이 저질러지는데 이 살인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는 살인자에 대해 성경이 어떤 형벌이 주어진다고 말씀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생명이 정말 소중한 것이며 나아가 살인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그 형벌이 참으로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서 살인자에게 직접 저주를 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가운데 특이한 점은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창 9:5)는 말씀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하나님도 반드시 우리의 피를 흘리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살인이 용서 받지 못할 죄이므로 영원한 형벌에 떨어진다고까지 말씀합니다. 계시록 21:8에서는 살인자들이 불신자나 우상 숭배자들과 더불어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생명은 소중한 것이므로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함께 따라합시다. “생명은 빼앗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다!” 이토록 소중한 생명은 함부로 빼앗아서도 안 되고, 또 함부로 버려서도 안 됩니다. 그 소중한 생명은 드려야 합니다. 누구에게 드려야 합니까? 오늘 설교 후 부를 찬송가 348장 1절에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세상 살아 갈 동안 찬송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내 하나밖에 없는 생명, 나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하나님을 위해 아낌없이 드릴 때 하나님은 정말 기뻐하십니다. 2절부터 나오는 대로 내 몸이나 물질이나 지위나 시간을 드리는 것도 기뻐하시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내 생명까지 드립니다” 할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십자가 위에서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 분을 위해 기꺼이 내 모든 소유와 인생과 생명까지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내 생명이 누구의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 백 살에야 얻은 그 귀한 아들 이삭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치려 할 때 하나님은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과연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짐 엘리엇(Jim Elliot)은 기독교 명문인 미국 휘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남미 에콰도르 선교사로 자원합니다. 선교사 사역 4년만인 1956년 1월 8일, 그는 다른 네 명의 동료들과 함께 가장 잔인하기로 악명 높던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창에 찔려 순교합니다. 그때 짐 엘리엇의 나이는 불과 28세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의 ‘LIFE’라는 잡지에서는 이 사건을 10페이지에 달하는 특별기사로 다루면서 “이 얼마나 쓸데없는 낭비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 젊디젊은 나이에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왜 뻔히 죽을 줄 알면서 거기 들어가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벳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을 삼가 주세요. 낭비라니요? 내 남편의 죽음은 낭비가 아닙니다. 그는 온 생애를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 자기 목표를 달성하고 죽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실제로 순교자 짐 엘리엇의 대학시절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겨져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쓸모없는 나무개피에 불을 붙여주소서. 그리고 주를 위해 타게 하소서. 나의 삶을 소멸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이것은 주의 것이니이다. 나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풍성한 삶을 살게 하소서. 당신과 같이. 주 예수님이여!” 여러분, 이 젊은이의 죽음이 쓸데없는 낭비입니까? 자기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버린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 젊은이는 그 누구보다 자기 생명이 귀한 줄 알았습니다. 내 생명이 너무도 귀하고 소중하기에 바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의 생명은 버린 것도, 빼앗긴 것도 아니라 ‘드린’ 것입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기에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위해 귀하게 귀하게 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보잘 것 없고 약해 보여도,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 하나님은 그 생명을 사용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내 인생을, 내 생명을 주를 위해 기꺼이 드립시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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