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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인생에 대한 깨달음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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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지나매 이런 생각들을 해보게 됩니다. 봄이 되면 파릇한 새싹이 나서 굵고 딱딱한 가지에 부드러운 잎의 연약함이 오히려 가장 강하게 접목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여름 내내 나뭇잎이 피워지고 앞이 보이지 않게 화려하고 장광한 수목을 이루게 됩니다. 가을이 되면 물들고 매달려 매달려 있다 힘에 부치면 땅에 떨어져 낙엽이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것에 대해서 억울하거나 섭섭하게 생각하는 이견을 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와 같은 것들이 자연의 섭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나뭇잎 나고 무르익게 되고 때가 되면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런 섭리요, 그 자연을 운행하는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압니다. 그런데 자연 속의 일부인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우리 삶에 대해서는 억지를 부리고 싶어 하는 때가 있음을 봅니다. 우리 삶은 올 때 오는 것이고 갈 때 가는 것인데 마치 우리가 더 있고 싶어하면 더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몸부림도 쳐보고 바람불면 그냥 흔들리고 잎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바람 부는 것 억울하다 싫어하고 고함지르고 다른 사람 괴롭히는 때도 있음을 봅니다. 내게 주어지는 자연의 순환인 눈과 비와 바람맞는 것이 마치 다른 사람이나 환경 때문이라고 여겨 점점 누추한 모습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핑계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며 전락하는 모습도 봅니다.

저는 요즘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됩니다. 어차피 우리의 삶은 한때 조그만 나뭇잎 나고 무성했다가 시들고 물들어 떨어지고 바짝 말라 떨어질 때쯤 되면 쪼그라들어 밟으면 바삭하니 부스러져 자연 속에 녹아져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연을 거부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어울리지 않는 것은 없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나뭇잎이 말라지지 아니하고 부스러지지 아니하고 녹아서 없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재앙이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의 순환과 생성과 소멸 그리고 우리의 삶을 동행하면서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들을 하다가는 것이 우리 생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비록 길지 않은 인생 여정이지만 또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이루기를 지시하는 일을 우리는 감당하다 주께서 부르시는 날 주의 천국에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삶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이런 우리의 인생길은 때때로 평탄한 삶의 길을 가다가 어느 날 문뜩 돌출한 얘기치 못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 삶은 방향을 전환하고 획기적인 사건을 접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류가 불을 사용하고 문자를 쓰기 시작했고 또 다른 에너지를 발견하고 또 뿐 아니라 전기를 발명함으로 말미암아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고 공간을 확장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은 많은 변화를 이룬 것을 봅니다. 참 신기한 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편지를 한통 붙이면 오랜 시간이 걸려서 편지가 가곤 했는데 이제는 그 편지를 쓰면 아무리 먼 외국이라고 할지라도 동시에 편지를 접속하여 볼 수 있으니 세상의 모든 것은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에는 형이하학적인 일 즉 생활에 필요한 실제적인 것 뿐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 즉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정식적인 세계의 대 변화를 이루는 것도 체험하게 됩니다. 즉 인생을 바라보는 삶의 시각을 우리는 변화를 느끼기도 하고 또 변화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에 대한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살아서 호흡하고 움직이고 우리는 활동하는 것을 생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생명을 움직이고 있는 또 다른 생명의 세계가 있으니 바로 영적인 세계인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목사로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우리 성도님들에게 그리고 형제자매님들께 오늘 바로 영혼에 대한 문제를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발견은 무엇일까? 우리들에게 영혼의 세계가 있고 그 영혼의 세계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 가운데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마 우리 성도님들 여기 계신 우리 형제자매님들 이렇게 생각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오늘도 1부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4부까지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앞으로 두 번 더 남은 예배에도 많은 분들이 오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옆에 계신 분들이 초청해서 오시라고 하셔서 오셨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분들이 초청한 것이 아니고 목사가 초청해서 오라고 해서 오셨으니 실제는 목사가 초청해 오라고 했으니 목사가 초청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괜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오라고 해서 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목사가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번 생각해 보면 목사가 시킨 것도 아니에요. 목사가 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사의 마음에 초청 집회를 가져야 되겠다하고 생각하고 성도들에게 말씀드리니 성도들이 여러분들을 초청한 것이니 바로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동생한테 얘기 했습니다. ‘형보고 이리로 오라고 그래.’ 엄마가 불렀습니다. 동생이 형에게 얘기했습니다. ‘형 엄마가 오래.’ 엄마 앞에 왔습니다. 누가 부른 것입니까? 동생이 불렀습니까? 엄마가 불렀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불러서 이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왜 부르셨는가 하면 우리에게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베드로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전문적인 어부였습니다. 여러분 추운 겨울에 바닷가에 가보신 적이 있지요? 낮에 뿐 아니라 밤에 밤바다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추운 날 차가운 바닷물에 수많은 배들이 마치 바다 위를 덮고 있는 것처럼 수북이 떠 있는 것을 여러 번 보셨을 것입니다. 추운 겨울 차가운 바다 위에 배는 떠있고 그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차가운 바닷물과 싸우면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졸린 눈을 비벼야 하고 차가운 바닷물을 맞아 가며 물고기를 잡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겠습니까? 물고기를 잡아야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고 물고기를 잡아야 집안 식구들이 먹고 지낼 수 있고 물고기를 잡아야 따뜻한 집에서 살 수 있고 물고기를 잡아야 또 그들은 그 추운 겨울에 고생을 해야 그들은 마음에 원하는 삶의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결국 추운 겨울 차가운 바다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잠들고 있는 깜깜한 한 밤중에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고 있는 직업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수많았던 고통스러웠던 이와 같은 수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마리 물고기를 잡지 못하는 허탕 치는 날이었습니다. 수고해도 소용없는 때가 있습니다. 애써도 소용없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와 같은 때가 있습니다.

지쳐서 탈진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셨고 베드로에게 오셔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깊은데 그물을 내려라’ 이 말은 베드로에게 황당한 얘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부도 아니었고 이 게네사렛 호수에 대해서 너무나 베드로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니 깊은데 얕은데 어딘들 그물을 내려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할 수 있는 것 다 해봤으니 이제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안 된다 얘기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베드로는 그물을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는 수많은 고기들이 잡혔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것 같은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결과적으로는 혼자서는 끌어올릴 수 없어서 다른 동무의 배를 불러서 같이 끌어들여 한배에 싣고도 남아 두 배에 가득이 고기를 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고기를 팔아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뿌듯한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은 뭍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고기를 가득 잡았으니 그 고기를 팔아서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었고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뭍에 내리자 이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아니 물고기 많이 잡게 해줬는데 갑자기 나는 죄인이라는 것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얘기입니까? 물고기 많이 잡았으면 감사합니다. 이것 팔아서 주님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옳은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고기를 잡게 하는 장면 속에서 예수님은 물고기를 잡게 하는 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는 분이야라고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신적인 분이야라는 것을 베드로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에게는 영적인 독해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어진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그 상황이 의미하는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영적인 파악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니’ 저희들 즉 베드로와 그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배를 육지에 대어두고 모두가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게 되니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고생 끝에 훈련을 하였고 이들이 비록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운데 못 박혀 죽으실 때 두려움 가운데 도망을 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또다시 오순절 성령 충만의 사건을 체험하며 곳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고 마침내 그들은 순교하였으며, 그들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들의 삶을 드렸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들이 예수님을 좇지 않았다면 이들은 어부로서 그들의 삶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좇았기에 이들은 고생을 했고 이들은 주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고 이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룰 수 있었으며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의 입술에 회자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큰 믿음의 백성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베드로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삶의 진리를 깨닫고 삶의 대 전환을 이루었나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발견을 어떻게 이루었기에 베드로는 이와 같이 자신의 삶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었을까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우리가 깨닫는 것은 먼저 인간의 자기 한계의 발견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한계를 발견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기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평생 동안 고기를 잡아온 사람인데 밤이 새도록 수고해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잠 못 자고 놀고 싶은 것 못 놀고 그리고 하고 싶은 것 못하고 열심히 애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우리들에게 늘 값어치 있게 우리들에게 돌려주던가요? 때로는 우리가 수고하고 애써도 그 대가는커녕 우리 마음속에 슬픔과 아픔 가운데 더욱더 가슴 저미는 이와 같은 슬픔의 눈물을 흘린 적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았었던가요? 우리의 삶 속에 정말 고통 가운데 눈물을 흘린 적이 있지요. 내 자신의 한계를 우리는 느낄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 내가 해도 안 되는구나. 정말 내가 해도 안 되는구나라고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노력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다는 것은 그 자신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는 안돼. 내 힘으로는 안돼. 사람의 모든 것 가지고는 안돼.’

그러나 이와 같은 베드로의 한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의 한계라는 것은 어떤 절망과 좌절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말하는 한계는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의 삶의 동력의 공급선을 전환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벼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왜 한계의 지경에 다다르게 할까요? 인간은 조금만 여지가 있어도 주님께 나오지 않고 자기의 마지막 방법까지를 활용해 봅니다.

여러분 생각해볼까요? 어떤 사람이 쫓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골목에 탁 접어들었는데 벌써 저 끝이 막다른 골목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 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야, 막다른 골목이다. 끝이다.’ 하고 돌아서서 항복을 하든지 아니면 거기서 전투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저 끝까지 달려가 보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저 끝이 막다른 골목이라도 저 끝까지 일단 달려가고 거기서 어떤 결정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합니다. 갈 수 있을 때까지 갑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한계를 만나야만 우리는 주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져 봤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베드로, 자기인생의 한계였습니다. 자기 능력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을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발견한다는 것 우리 인생의 한계를 느낀다는 것은 우리에게 부끄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감사한 경우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면 부끄러워하거나 아니면 극단적인 삶을 포기하거나 좌절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고 생각할 때 내가 갈 곳이 무엇이냐?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내가 선택할 길이 없는데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이와 같은 좌절 속에 우리는 낙망할 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한계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방법을 바꾸는 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의 한계입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음악을 공부합니다. 도무지 재능이 없어 도무지 노력해도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은 끝이야.’라고 생각할 필요없습니다. 이 사람이 다시 미술을 공부했고 거기에 재능이 있어 그 미술을 통해서 성공을 했다면 이 사람은 자기의 한계를 느끼고 자기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길을 터득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저것 다 안 될 때 아무리 수고해도 안 될 때 공허함을 가지고 도무지 안 되는구나 우리 인생을 끝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내 한계라면 이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은혜를 시작해야지 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림이 아니라 우리 삶의 획기적인 은혜의 삶이 도래되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내맡겼을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주시는 것을 봅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삶을 두고 예수님을 좇았고 그 친구들도 예수님을 좇았지만 그들에게는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도래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한계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일어나라든가 아니면 방향을 전환하라는 뜻임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어떠한 한계를 당했을 때 힘을 더 쏟습니다. 시간을 더 쏟고 방법을 더 개선하고 더 기도하며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그 가운데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힘과 정열을 다해서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더 악화될 때가 있을 줄 압니다. 우리는 그 때 어떻게 생각합니까? 모세는 40세까지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로 자랐습니다. 40세의 가장 혈기왕성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출생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가 아니라 히브리 노예 출신이라는 자기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는 마음에 분노합니다. 자기 백성 히브리 백성을 괴롭히는 애굽인을 죽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광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는 40대에 한창일 때 지도자로 쓰임 받지 못했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무능하게 시간을 죽이며 그는 무능과 좌절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를 불러내어 바로 앞에 세워 민족을 일으키고 민족을 출애굽 시키는 지도자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의 40년 동안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목전까지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우리의 한계를 보게 하실 때 그것은 우리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의 시작이라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두 번째 이야기가 나오니 바로 내 인간의 한계를 발견함과 더불어 주님의 능력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발견한 후에 이루어진 주님께 대한 깨달음을 봅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많이 잡았고 잡은 고기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그 상황 가운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메시지를 간파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주야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삶에서 이룬 일을 통해 주님의 실체와 본질을 파악하는 지혜를 그는 발휘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삶의 독해력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제가 30분 설교를 하는데 30분 설교를 하고 마음에 한 문장이 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이렇게 살라고 하는구나.’ 여러분 부부끼리 대화해도, 자녀와 대화해도, 우리 다른 사람과 대화해도 어떤 독해력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밥을 차려줬어요. 나 밥 안 먹어. 그러면 우리는 파악을 해야 되잖아요. 나한테 감정이 있다는 것인지, 배가 부르다는 것인지, 오늘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는 것인지, 오늘 속이 안 좋아서 소화가 안 된다는 것인지 무슨 이유가 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만약에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면 엉뚱하게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기분이 나쁘다든가 아니면 소화가 안 되서 밥을 안 먹는다고 그러는데 나한테 감정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면 점점 더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삶의 독해력은 매우 필요합니다. 도대체 주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상황을 파악했던 것입니다. 이건 물고기를 잡는 일이 아니었어요. 물고기를 잡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물고기 잡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이 아파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병이 나았습니다. ‘하나님 병이 나아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나의 육신의 병을 치료해주시는 육신의 삶을 능가하는 분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는 이같은 삶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내 어려움이 있어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고 그 어려움이 해결되었을 때 하나님 어려움이 해결되니 감사합니다. 하는 감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인생의 어려움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여 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 인생의 하나님에 대한 파악이요 독해력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주의 능력을 파악해야 됩니다. 주님의 능력은 물고기를 잡는 능력이 아니었어요. 주님의 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뛰어넘는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내 자신을 볼 때 나는 죄인이니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바로 주님의 능력을 발견한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주님의 능력을 바꾸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어떤 변화를 이루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없습니다. 수없이 노력했지만 수없이 시도했지만 우리의 의지는 박약했고 우리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우리의 변화에 대한 우리의 모든 능력은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을 발견한 후에 우리들에게는 획기적이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이 따르게 됨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는 네가 사람을 취하게 되리라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응답은 우리를 망설이게 하는 요소가 있을 수 있으나 전혀 후회없는 놀라운 은총의 기회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요청을 받아 주님의 요청에 응답하여 주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잠도 안자고 놀지도 않고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쉬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을 벌고 났는데 이 사람의 마음에 또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 인생의 돈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지 않는가? 돈 버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라면 내 인생은 얼마나 누추한 것인가? 어느 날 새로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떻게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뿐만 아니라 사회의 유익을 끼치고 내가 어렵게 돈을 벌었던 만큼 얼마나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눈이 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일들을 생각함으로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에 대한 영적인 관심이 생기게 되고 우리가 살아서 호흡하고 숨쉬는 이와 같은 생명이라는 것을 움직이고 있는 또 다른 영혼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이란 한번 왔다 한번 가는 것은 정한 이치지만 그 과정 가운데 우리는 삶을 여러 가지 남기고 갑니다. 사랑을 남기고 꿈을 남기고 소망을 남기고 우리의 혈육을 남기고 우리의 모든 것을 남기고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른 생각일까를 생각해봅니다. 만약에 우리의 인생이 육신뿐이라면 우리는 너무나 슬프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영혼이 있어 주의 천국에 가고 그 천국에 가 있는 영혼이 다시 우리를 재회하게 될 때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과 소망을 가지게 되겠습니까?

마지막 세번째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주님의 능력을 발견했던 베드로는 지금까지 추구한 가치보다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고 말씀합니다. 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등 다른 사람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예수님을 좇았겠습니까? 그들은 물고기를 잡기위해서 밤을 새웠던 사람입니다. 그들의 모든 힘을 다하여 물고기를 잡기위해서 애썼던 사람입니다.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소원을 이루었고 그들이 원하는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모든 이루었던 꿈을 두고 예수님을 좇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상위가치를 발견했을 때 하위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는 하위가치 이제까지 우리가 누리고 있던 어떤 가치 개념이 있는데 그 가치를 능가하는 어떤 상위개념의 가치가 생기게 되면 우리는 하위가치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직장에 가서 점심시간마다 음식을 먹으러 나가요. 깨끗하고 맛있고 값도 싸고 좋은 식당이 있어요. 그래서 매일 거기 가서 단골을 정해서 음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옆에 보니까 새로운 식당이 하나 생겼어요. 저기 한번 가볼까 그래서 가보았어요. 깜짝 놀랐어요. 거기는 맛도 더 있고 음식도 더 깨끗하고 직원들도 더 친절하고 값도 비싸지도 않고 분위기도 좋고 거기 오는 사람들도 모두 매너 있는 것 같고 아주 너무너무 좋아요. 다음날 이 사람은 어떤 식당을 가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떤 식당으로 가실 것 같습니까? 그래도 의리가 있지 아무리 좋아도 내가 가던데 가지,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아마 그러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 그 동안 많이 팔아줬으니까 이제 또 새로운 식당이 생겼는데 저기는 친절하고 맛도 있고 값도 싸고 분위기도 좋고 사람들도 매너도 있고 좋으니까 나 이제 저 식당으로 옮겨야지. 이게 뭔지 아세요? 하위 개념 상위개념 가운데 상위개념이 발견되면 하위개념은 가치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까지 육신의 세계에서 살았었는데 어느 날 문득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그랬는데 그것이 상위개념이 됐더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물고기를 잡는 과정 가운데 예수님을 통해서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 눈이 떠졌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물고기를 잡고 있었던 그의 삶의 모든 육신의 세계의 일들이 하위 가치가 되어버리고 이제는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잡고 싶어 했던 물고기를 두 배 가득하게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놔두고 예수님을 좇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변화는 그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삶의 열정이 있을 때 변화됩니다. 별것 아닌 몇 마디 말씀을 들었는데 가슴에 변화가 되고 성경 몇 줄 읽었는데 그렇게 인생이 바뀐다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말씀 몇 마디 들었는데 설교 한 마디 들었는데 내 인생이 이렇게 바뀐다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성경 몇 줄 읽었는데 내 인생이 이렇게 바뀌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는 날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우리 마음에 열정이 생겨지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들이 생겨질 때 우리 인생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언제나 선택이 중요합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가 있고 우리가 응답할 때가 있고 그 응답에 대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부르심을 응답하여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시간이 갈수록 그 차이와 간격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점점 더 큰 것임을 봅니다.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선택하셔야 됩니다. 우리에게 부르실 때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실 때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돈하고자 합니다. 우리 인생이란 누구나 근원적인 슬픔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근원적인 슬픔이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죄악을 지었을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 죄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을 당했고 우리는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근본적인 고독과 근본적인 소외와 근본적인 외로움으로 인하여 우리는 마음속에 슬픔의 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누구나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강을 건너는 긴 경주임을 생각을 합니다. 때로는 어느 날 늦은 밤 시간에 텅 빈 식당에 가서 혼자 음식을 먹어야 하고 허전한 등을 보이고 나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 일이 없으면서도 괜히 가엾어 보이는 것이 싫어서 마치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종종걸음 치며 뛰어나오는 삶의 포장쯤을 우리는 이루며 살아갑니다. 우리 삶은 어느 때까지 내가 별 것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다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밝게 비춰주시는 날 우리 마음에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야.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시는 순간부터 우리 마음에 내 자신에 대한 기대가 되고 내 자신에 대한 소망이 생기게 되고 내가 가야할 길이 보이게 되고 그것이 내 삶의 사명으로 느껴지게 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이것이 모세의 삶이고 기드온의 삶이고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의 삶이고 사도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곧 내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게 되는 고귀한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상위가치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상위가치의 발견, 이제 우리는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우리의 눈이 열리게 되고 우리의 마음의 소망이 생기게 되고 우리는 새로운 꿈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 보물을 갖고 싶어서 그 보물을 밭에 파묻고 그의 모든 가산을 정돈하여 그 밭을 사려고 노력을 합니다. 많은 사람은 어리석다고 하지만 이 사람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아무런 기쁨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빛이 비취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악으로 인한 고독과 좌절과 죄 값인 죽음을 지고 가셨음을 알고 이제는 우리는 그 모든 죄와 죽음과 고독과 좌절로부터 자유로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위하여 죽으심을 믿으며 이제는 우리는 주님으로 인한 영원한 용서와 새로운 생명의 소망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실 때 어렵게 오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마음 한번 먹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하지 않던 일을 하는 일에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셨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실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기대 이상이셨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주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능력이 우리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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