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삼겹줄 교회가 됩시다. (전 4:9-12)

  • 잡초 잡초
  • 888
  • 0

첨부 1


삽겹줄교회가 됩시다라는 제목으로 증거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 유익한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말씀 중 7절 이하에는 한 사람이 소개됩니다. 그를 일컬어 솔로몬은 허무한 인생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8절 이하에는 그가 왜, 허무한 인생인지, 어떤 식으로 살았기에 그런 평가를 받는지를 소개합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가?
첫째,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의 인생은 오로지 혼자입니다. 외로운 인생입니다. 8절에는 그의 인생을 보다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정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는 지금 뭔가 바쁩니다. 혼자 있으니 한가할 것 같은데, 오히려 분주한 나날을 보냅니다. 8절 중반부입니다. “수고하기를 마지아니하며”(8절중)

무엇 때문입니까? 답은 이렇습니다.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8절중) 즉 그에게는 현재의 부유함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여전히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또한 그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그가 지금 그렇게 채우고자 하는 그것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불어 사실은 지금 그가 홀로인 것이랑 아직도 채워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 서로 연관된다고 봅니다.
즉 그에게는 나 자신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곁에 아무도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말 아들이 없어서도, 형제가 없어서도, 친구가 없어서도 아닌, 그의 모든 관심이 자신의 영달과 부유함과 이익에 있기에 그것을 채우고저 모든 이들과 상종하지 않을 뿐이라는 겁니다.

무서운 이야기지요, 설마 이럴 수 있겠는가 싶은 이야기가 지금 이 본문 가운데 흐르고 있고, 그를 일컬어 미련한 사람이요, 허무한 인생의 소유자라고 말하는 겁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소명입니다. 주님이 불러서 명하신 절대적인 겁니다. 우리는 그저 따르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분주한 사람은 그것이 싫다는 겁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걸림돌이 되고, 나의 앞길을 가로 막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혼자 가겠다는 겁니다.

때로는 신앙도 뒷전이 되고, 가정도 뒷전이 되고, 사람도리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얻고자 하는 것이 그냥 다 누리지도 못한 이익과 세상적인 가치라는 겁니다.
세상에서 누려보지 못한 것이 없는 왕 솔로몬은 그런 사람을 일컬어 뭘 몰라도 정말 모르는 허무한 인생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뭐길래 왜 더 좋은 것을 빼앗기냐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삽겹줄의 진리입니다. 삽결살이 아닌 삼겹줄의 유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 삼겹줄의 유익을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행여 나홀로의 신앙은 없는지, 우리가 회복해야 할 삼겹줄의 신앙은 없는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1) 함께 한다는 것이 좋은 이유는 시너지효과를 얻기 때문입니다.(9절)

9절에 보면 다음 구절이 나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여기서 좋은 상은 좋은 결과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함으로 더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겁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혼자하는 것보다, 함께 일하는 것을 통해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겁니다.
또한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함께 해야 한다는 겁니다. 올해 목표 중 돌이켜 일꾼을 세우는 교회라 했는데, 저는 이 돌이켜 일꾼을 세운다가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때로는 저 사람이 뭘 하겠는가 싶어도 그와 함께 일하면서 때로는 기대하지 못한 감동적인 유익함을 얻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과는 다른 계산법입니다. 세상에서는 부족한 사람이 하나가 들어오면 전체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깍아 버립니다. 포기합니다. 퇴출시킵니다. 더 이상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오로지 남을 사람만 남으라고 합니다.이것은 눈앞의 이익만을 본 결과입니다. 하지만 이런 논리가 교회 안에서, 가정에서, 인간관계에 끼어들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분이 유명한 실험을 했습니다. 이 실험은 말 한 마리가 끌 때와 두 마리가 끌 때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 지를 알아보는 시험이었습니다. 말 한 마리가 끌 수 있는 힘은 2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말 두 마리가 끌게 되면 몇 톤 정도를 끌 수 있겠습니까? 산술적 계산으로 4톤이 맞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4톤이 아니라 말 두 마리가 23톤을 끌더라는 것입니다. 말 한 마리의 힘으로는 2톤 밖에 끌 수 없지만 두 마리가 힘을 합하면 23톤을 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혼자 독불장군으로 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생명력 있는 공동체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도하러 내 보낼 때 혼자 내 보내지 않으시고 꼭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내 보내셨습니다. 12제자를 파송하실 때에도(막6:7) 70인 전도단을 파송하실 때에도 꼭 두 사람씩 짝을 지어내 보내셨습니다. (눅10:1) 혼자 나가서 전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나가서 전할 때 훨씬 더 시너지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영적인 전투인데 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고 또 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얼마나 효과가 크겠습니까? 그래서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내 보낸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도 혼자 기도하기보다는 땅에서 합심하여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19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시간만 나면 모여서 합심으로 기도했습니다. 혼자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함께 모여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120명의 성도들이 다락방에 모여 전심으로 기도할 때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합심으로 옥중에서 기도할 때 착고가 풀어지고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하여 합심으로 기도할 때 옥문이 열리고 베드로가 천사의 인도를 받아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합심으로 기도할 때 닫혔던 것들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합심으로 기도할 때 묶여 있던 풀어집니다. 합심으로 모여 기도할 때 부흥의 불길이 타오릅니다. 합심으로 모여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으면 손을 잡고 합심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2) 두 사람이 함께 할 때 회복과 격려가 생긴다.(10절)

계속해서 솔로몬은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있을 때 얻는 유익에 대해 말합니다. 10절입니다.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팔레스타인 지역은 산이 험하고, 거친 광야가 있습니다. 이런 곳을 지날 때, 혼자 걷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때로는 강도가 노리기도 하고 혹은 위험한 자리에 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운 길을 걸으며 함께 누군가와 걷는다는 것은, 함께 걸을 길동무가 있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분명 내가 넘어지면 그가 일으켜 세워줄 것이고, 내가 울 때 위로해 줄 것이고, 내가 기쁠 때 함께 웃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동기간의 사랑이요, 성도의 교제요, 성령의 주장하심 가운데 교회의 하나됨이라 생각됩니다.
교회를 나와도 예배를 드리러 오는지, 아니면 숨박꼭질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부지런히 줄행랑을 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돌보고 격려하고, 아껴야 할 우리의 형제, 이웃이 이곳에 있지 않습니까?

어느 분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미국으로 이민가서 22년동안 교회를 108번이나 옮겼다 합니다. 말이 22년 동안 108번이지, 전체를 나누어 1년에 평균을 내면 대략 한해에 5 교회를 다녔다 할 것이고, 결국 두 달 만에 한번 꼴로 다른 교회로 옮겼다는 통계가 나옵니다.
그 분이 왜 이렇게 교회를 옮겼을까? 이상적인 교회를 찾아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어디에 있을까 하여 이렇게 자주 옮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옮기는 날부터 그 교회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눈에 드러나는 것이 그 교회 목사의 허물입니다. 맨 먼저 그 교회 목사의 허물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합니다. 다음에는 교회에 대한 모든 것, 심지어 주보나, 찬양대나, 주방이나, 제직들에 대하여 하  나 같이 단점만 지적하고 찾아냅니다. 그러니, 한 교회에서 두 달 정도 있으면 그 교회의 단점이 다 드러나곤 해서 더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옮겼습니다. 이렇게 하던 그 분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무도 장례식을 주관해 줄 교회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그가 끝까지 섬긴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108번째 교회의 목사님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장례식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당장은 멋있어 보일지는 몰라도 넘어지고, 고통당하는 날에 위하려 기도하고 도울 믿음의 형제는 갖지 못할 것입니다.
남과 나는 다르다, 나는 특별하다는 식의 신앙은 한마디로 교만입니다. 차라리 믿음이 없고, 신앙이 약한 사람은 이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데, 조금 낫다고 하는 사람이 주로 이러한 모습을 취합니다.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할거면 뭐하러 전도를 하며, 그렇게 전도해서 서로 간에 무슨 동일성, 일치성이 생기겠습니까? 신앙은 주 안에서, 믿음 안에서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아담에게도 혼자 있으라, 그것이 좋다 하지 않고, 아담과는 다른 하와를 보내시어 서로 도우라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도 그런 진리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지적인 사람은 정적인 사람과 함께 나누고, 정적인 사람은 지적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서로 도와야 할 것입니다.


3) 함께 해야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11절)

함께 할 때의 유익입니다. 11절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11절)

팔레스타인 지방은 독특한 사막기후라 일교차가 심합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습니다. 그렇기에 밤에 엉성한 천막을 의지해 잔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야영하는 여행자나 목동들은 서로 의지해서 생명을 유지합니다. 이러한 예는 알래스카에서도 동일합니다. 3도그 나이트라고 하는데, 한 3마리의 개를 끌어 안고자야 그나마 추위를 견딘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가정으로, 교회로 모아주신 것은 서로 살리는 역할을 하라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러한 만남과 모임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살 힘을 공급받고, 감당할 능력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인도에 썬다씽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자기 친구와 함께 네팔 전도를 위하여서 히말라야 산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눈보라가 치는데 너무 추워서 얼어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걷다 보니 저 앞에 물체가 하나 있는데 보니까 어떤 사람이 얼어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보더니 "여보게, 빨리 가세. 한 걸음이라도 빨리 가야 우리도 살아날 것이 아닌가?" 썬다싱은 그를 보고 "어떻게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가겠나? 데리고 가세." 그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친구는 자기 혼자 먼저 길을 떠났습니다. 썬다씽은 얼어죽어 가는 사람을 등에 엎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눈보라 속에 뭐가 땅에 엎드려져 있기에 가 보았더니 먼저 떠났던 친구가 빳빳하게 얼어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등뒤에서는 후끈후끈한 온기가 흘러나왔고 그것 때문에 등에 업힌 사람과 썬다씽 두 사람 모두 살았습니다. 그의 전도 일기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사명도 없이 나홀로 인생을 고독 가운데 살아가는 것, 외롭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 하나님 보시기에 결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함께 복음의 멍에를 메어야 할 인생의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당장 내게 버겁고, 어려울지라도 내 사명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놓고 보면 이것들이 사살은 나를 살리고, 나를 나되게 할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12절하)

이렇게 솔로몬은 함께 할 때 얻는 여러 유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제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삼겹줄은 세 가닥의 삼으로 꼰 밧줄 혹은 끈을 의미합니다. 하나하나의 가닥으로 보면 말할 수 없이 약하지만 이 세 줄이 엮어져서 하나의 줄이 되면 쉽게 끊어지지 않는 삼겹 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삼겹줄은 무엇을 말할까요? 하나가 아닌 셋이 엮어졌을 때 가장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는 뭐가 있을까요? 많은 것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묵상하다 보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도 분명 우리의 삼겹 줄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령님도 우리의 끊어지지 않는 삼겹줄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의 공격 목표는 언제나 교회와 가정입니다. 오늘도 사단은 여러분의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단은 부부간에 불화하게 만들고 서로 신뢰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역사하여 부모는 자녀에게 상처를 주게 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반항하게 하고 반목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을 콩가루 가정으로 만들어 버릴려고 합니다. 오늘도 사단은 우리의 가정이 믿음으로 연합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가족 모두가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 되고 사랑으로 연합되고 주님의 도우심 속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을 삼겹 줄로 엮어지는 가정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서로가 다 바쁘고 분주한 시간이지만 함께 손을 맞잡고 기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기가 힘들면 일주일에 한번 시간을 정하여 가정 예배를 드려 보십시오.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드리며 서로를 사랑하고 축복할 때 우리의 가정은 삼겹줄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줄은 다 끊어지지만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돈의 줄도 끊어지고 정치인의 줄도 언젠가는 끊어지고 쾌락의 줄도 끊어집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과 하나님으로 연결된 믿음의 삼겹줄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시험도 어떤 고난도 어떤 실패도 가정의 삼겹 줄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당신의 가정에 이 삼겹 줄이 있습니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