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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옥합을 깨뜨린 감사 (막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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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막 14:9)

  세계도처에서 ‘레밍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레밍현상‘이란 들쥐들이 한꺼번에 수십만 마리씩 연쇄투신 자살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예전에는 그 원인이 일정한 지역 내에 동물의 수효가 늘어나면서 식량난이 생기므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분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밝혀진 바로는 레밍현상은 식량난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동물학자 ‘존 크리스천’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밀집도가 조밀할수록 들쥐의 내장가운데 부신이 일정하게 비대해지면 이것이 비대해 질수록 공격성이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부신이란 콩팥상단에 놓여있는 두 개의 내분비선을 말하는 데, 이것은 생명과 직결된다고 합니다. 과다밀집이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되고 내분비 반응을 일으켜 집단자멸 현상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이 학설에 발을 맞추어 알래스카에서 연구하고 있는 ‘갤리거’교수는 말하기를 “개체수가 밀집되면 폭력적이거나 자학적인 집단현상이 일어나며 레밍현상을 일어난 뒤를 쫓아 보니 양식이 풍부했으므로 식량부족과 레밍현상은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동물들이 집단 자살을 하게 하는 주요원인은 스트레스가 주범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의학에서도 “만병의 원인은 스트레스다” 라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인구밀도 세계 선두권을 달리고 있는 우리나라는 40대 사망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갖고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육체적인 과로와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스트레스를 만들어 내는 현실에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감사하는 생활을 상실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모습은 시대적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스트레스에 지배당하고 마는 현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큰 축복 중 하나는「감사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구약성서를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할 것을 거의 강요적인 명령으로 지시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매일매일 일상적으로 감사의 제물을 드릴 것을 명령하심과 함께 감사의 절기를 정하셔서 감사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출 23:16)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추수절)을 지키라”(출 34:22)
  이러한 명령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뿐 아니라 이 감사하는 것이 우리에게 복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감사의 제사법과 함께, 감사의 절기, 감사의 생활을 요구하신 것임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주일을 앞에 두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구속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늘 만족하게 하시며 우리를 축복하시되 수확의 소산을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모습을 가져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감사의 기쁨과 함께 감사하도록 하여 우리로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문둥이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은 베다니 사람 시몬의 집에 머무시면서 식사하시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한 여인이 300데나리온 어치의 순전한 ‘나드’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습니다.

  히브리 여인들은 옥합, 곧 ‘알라바스터’라는 병에 ‘나르도스라키드’라고 불리는 향나무 뿌리에서 짜내는 향기가 짙은 값지고 순수한 향유인 ‘나드’를 그곳에 담아 봉인해 두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귀한 손님이 오면 몇 방울 발라주는 것으로 사용했고, 결혼을 준비하는 여인들은 지참금으로 그 향유를 모아 두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드리기 위해 모아둔 향유가 든 옥합을 깨는 여인의 모습은 예수님을 향한 지극하고도 큰 감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모든 향유를 아낌없이 부어드리는 이 여인의 감사는 우리가 함께 경험해야 할 감사의 모습입니다.
  그럼 이 옥합을 깨뜨린 감사는 어떤 감사였습니까?

  자신을 깨뜨리는 감사였습니다.
  여인이 본인에게 있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은 곧 자신을 깨뜨리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감사하기에 자신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가장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감춘 것을 아낌없이 열어 보이는 감사였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너무 감사해서 자신을 깨뜨려 아낌없이 부어 드리는 감사였습니다.
  이렇게 감사할 수 있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너무나 크게 사랑하는 대상은 자신을 깨뜨리기까지 감사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자신을 깨드리기 까지 감사할 수 있는 대상과 그 대상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인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옥합을 깨는 감사를 드러낸 것입니다.

  한 이색적인 오르간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오르간 연주를 할 때에는 연주를 위해 오르간에 바람을 넣어 주어야만 할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연주가 계속되는 동안, 한 사람이 열심히 펌프질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 펌프질을 하는 사람은 대개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펌프질을 하는 사람은 악보의 음표를 읽을 줄 몰라도 상관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색적인 오르간 연주회에서는 연주를 하는 사람보다 펌프질을 하는 사람이 더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주회가 끝나자 한 기자가 달려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연주회는 주객이 전도된 듯한 인상입니다. 아마도 청중들은 오르간 연주자의 연주보다도 당신의 펌프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것 같습니다. 어째서 오늘은 손수 펌프질을 하셨나요?” 그러자 이 유명한 오르가니스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음악에 대해서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오르간 연주이건, 펌프질이건 음악에 도움을 주는 일이라면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지요. 앞으로도 제가 펌프질을 해서 음악을 듣는 이에게 보탬이 된다면 계속할 생각입니다”

  사랑의 대상에 대한 감사는 자신을 깨뜨려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을 깨뜨려 드릴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신을 깨뜨려 드리는 감사이어야 합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셔서 당신의 자녀 되게 하시고 부족함 없도록 돌보아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자신을 깨뜨려 감사할 수 있는 감사여야 크고 귀한 감사입니다.

  정성을 다하는 감사였습니다.
  이 여인의 주님께 감사하는 모습은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정성이 300일의 품삯의 값진 것을 드리는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최고의 품질인 순전한 나드 향유를 드리는 태도로 나타났고, 옥합을 깨뜨리는 희생과 헌신의 태도로 나타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여 감사하고픈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태도는 하나님께 최고의 정성을 다하는 감사여야 하는 것입니다. 정성은 값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낌없는 희생입니다. 소중한 것을 드리는 태도인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에 감격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큰 것으로 감사의 반응을 보이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예수님은 정성을 다하는 이 여인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칭찬과 축복의 선언으로 감사와 감격의 반응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정성은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감동은 더 큰 감사와 축복의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허리수술을 받고 회복할 당시 교인가운데 부모님이 세상을 떠남으로 전라도 익산까지 문상을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먼 거리를 다녀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녁 늦은 시간 기업을 경영하는 어떤 권사님이 자신이 손수 목사님을 모시고 다녀오겠다고 자가용을 몰고 왔습니다. 저는 그분의 정성을 잊을 수 없습니다. 본인도 당뇨 합병증으로 몸이 약하여 늘 피곤해 하는 분으로, 하루종일 업무에 시달려 피곤할 텐데, 목사님의 수술 받은 허리에 무리가 가면 안 된다고 운전기사로 수고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제가 당신교회 목회자로 함께 있다는 것이 늘 감사하는 분이십니다. 그 날, 의자 등받이를 눕히고 세심한 정성을 다해서 돌보아 주었던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분과 함께 교회를 섬기면서 그분의 정성이 저로 하여금 목회에 정성을 다하는 목회자로 살도록 했음을 기억합니다.     
  정성을 다하는 감사의 삶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가족, 이웃으로부터 감사와 감격의 반응을 일으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옥합을 깨듯 정성을 다하는 감사의 믿음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낭비하는 감사였습니다.
  이 여인의 감사는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300일의 노동자의 품삯에 해당하는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한 순간에 다 부어드리는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값질 뿐 아니라 귀중한 것을 한 순간에 써버리는 낭비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이 분을 내면서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고 여인의 낭비를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낭비하기까지 감사할 수 있는 그 경험을 칭찬하였습니다. 그것은 뇌물을 바치는 것이 아닌 뜨거운 사랑에서 나오는 감사였습니다. 이것은 구제하는 일에 앞서 경험해야 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이 가져야 할 더욱 소중한 감격인 것입니다.

  낭비할 수 있는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낭비할 수 있는 감사는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어느 사업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좀처럼 은혜를 갚을 줄을 모릅니다. 내 나이 61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175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는데, 감사절에 그들에게 각각 칠면조 한 마리씩을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단지 네 사람만이 내게 감사의 표시를 했습니다. 두 사람은 짧은 편지로, 다른 두 사람은 강당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종업원 대부분이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는 감사절에 다시는 선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낭비할 수 있는 감사의 경험은 정성을 다하는 감사와 같이 하나님의 더 큰 반응을 만들어내며 인간 세계에 더 큰 감사의 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깨뜨려 드리기까지 하며 감격하는 감사, 정성을 다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감격의 감사, 낭비하기까지 감격하는 감사, 이러한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감사와 함께 우리의 삶에 행복이 무엇임을 깨닫게 하는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C. 쿨리지는 “가장 축복 받은 사람이 되려면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감사의 감격을 경험할 수 있을 때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깨닫는 헌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감사의 감격을 가질 수 있을 때에 천국의 경험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국격언에 “지옥은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했고, ‘알소니아스’ 라는 사람은 “세상에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악한 사람은 없다”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아버지)께 감사하라”(3:17)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 삶의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는 행복한 자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더욱 크고 깊은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성을 다하며 희생하여 낭비하는 우리의 감사에 감격하셔서 더욱 크신 축복으로 응답하십니다. 낭비하기까지 정성을 다하는 감사의 사람은 인간 세계에서 사랑과 감사의 응답을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독일에 대 기근이 있었을 때 한 부자가 가난한 아이들을 모으고 빵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자, 이 자루 속엔 너희들 한 사람이 꼭 한 개씩 먹을 수 있는 빵이 있단다. 꼭 한 개씩만 가져가고 내일 또 오면 또 빵을 줄 테다” 아이들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자루에 달려들어 서로 큰 빵을 골랐습니다. 그리고는 빵을 골라든 아이들은 정신 없이 집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래첸’ 이란 소녀는 한 쪽에 가만히 서 있다가 맨 마지막 남은 제일 작은 빵을 집어들고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다음날도 아이들은 어제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첸’은 또 맨 나중에 남은 제일 작은 빵을 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나누어 먹기 위해 빵을 쪼개보니 그 속엔 50센트 은화가 여섯 개나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첸’이 그 돈을 도로 가지고 갔을 때 노인은 ‘그래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사람에게 상으로 주기 위해 일부러 빵 속에 넣어 구운 거란다. 걱정말고 네가 가져라”고 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깨뜨려 감사하는 감격의 감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여 정성을 다하며, 낭비까지 하는 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사에 감격하시어 더욱 크신 감사의 역사를 만드시는 축복으로 응답하시는 추수감사절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하는 축복자가 되십시오. 아멘. (김성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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