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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양, 그 드라크마, 그 아들 (눅 1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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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양, 그 드라크마, 그 아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
그 양, 그 드라크마, 그 아들.... ! 주인공은 다를지라도 공통된 특성을 발견할 수가 있게 되는데 그것은 대역을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1)잃은 양
그 양은 그 목자의 양이다. 아무 양이나 채워 넣으면 되는 숫자의 분류가 아닌, 관계의 분류이다. 그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으면 따르게 되고 목자는 그 양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양의 상태를 알수 있는 그 양이다. 시장에서 양 한마리 사다 놓고 백마리 됐다 할 수 없는게 목자의 마음일까? 내가 아침 저녁으로 이름을 부르던 그 양, 상처났을 때 어루만지던 그 양, 젖을 짜던 바로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소유가 섞여진 양”이다. 동시에 삯군 목자에 대해 무관심한 羊일 것이다. 잃은 양 한 마리를 다시 찾았단다. 온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다 놓고 잔치를 벌인다. 멍청한 양 한 마리 찾아다 놓고 멀쩡한 양 몇 마리가 잔치를 위해 죽었을 것이다.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드라크마
없던 시절 결혼한 우리 할머니의 손에는 돌아가실 때도 변함없이 끼고 있으시던 구리반지가 있다. 금이나 은은 아닐지라도 25살에 일찍 과부되어 아버지의 3형제를 길러온 할머니의 힘이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성경을 보시다가 곧잘 반지를 보면서 대화를 했었다 .“영감 천국가면 내게 무슨 선물 줄꺼요? 난 영감이 남긴 씨앗들 기르느라 이렇게 늙었는데 알아보겠수.....?”
유대에는 정혼 때 그 예물로 드라크마 10개를 묶어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아마도 여인도 이 드라크마를 유대의 풍습에 따라 결혼 반지 이상으로 소중히 여겨왔을 것이다. 그러나 동전을 묶고 있던 끈이 끊어지고 어느 날 모두가 흩어져 버렸다. 다행히 9개는 쉽게 찾았지만 그 중에 하나 그 드라크마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몇 날이 지나 이미 포기해버린 가운데 우연히 그 드라크마를 찾게 되었다. 얼마의 가치가 있는 돈이었을까? 얼마의 경제적 가치를 지닌 동전이기에 잔치의 제목이 되었고 모든 마을 사람들을 청하여 대접하며 되새길만한 기쁨이 되었을까?
(눅15: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3) 잃어버린 아들
살면서 단 한 번조차도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 못한 자식. 그가 돌아 왔다. 남루한 몰골, 추한 모습으로 그가 돌아왔다. 영혼을 찾는 일,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 신앙 생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경제적 판단 가치를 능가한다. 손익계산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의 그 무엇 - 심지어 아버지에게 그 유비를 찾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아들이 집을 나갈 때와는 달리 거지꼴을 하고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눈에 그 아들이 자기 아들임을 알아보는 것이지요. 밤낮없이 아들을 애타게 기다렸기 때문에 먼발치에 희미한 모습을 보고도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불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집나간 자식이 아버지를 먼저 알아보았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사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불러주셨다. 우리 아버지의 자비의 눈이 아들의 회개의 눈보다 빨랐으며, 우리 하나님의 용서의 가슴이 달려오는 우리의 발걸음보다 더 빠르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아버지는 모든 것을 보고 계셨다. 실패와 고통으로 지새우는 수 많은 밤을 아버지의 눈은 보고 있었다. 거리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방황하던 아들을 아버지의 눈은 뒤쫓고 있었니다. 돼지우리에 앉아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절망속에 빠졌던 그 모습을 아버지는 보고 계셨습니다. '돌아가야지, 아니야 돌아가도 용서하지 아니 할거야' 망설이는 그 모습을 아버지는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충혈된 눈과 굶주린 창자를 보고 계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류전체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 한사람 한사람 각자를 향한 사랑입니다. 아들 하나가 집을 나갔습니다. 고아원에서 나이가 비슷한 아이 하나 데려다 놓고 이제 두 아이 됐다 그러면서 웃을 수 없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내 핏줄을 타고난 그 아들, 옹아리를 걸음마를 할 때 내게 기쁨을 주던 그 아들을 찾을 때까지 끝까지 대문을 닫을 수 없는 게 바로 이 어버이의 마음이다.

(4) 또 잃어버린 아들
많은 사람들이 둘째 아들이 이 본문의 주인공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맏아들이 주인공이라 하는 것이 무슨 얘기일까? 오늘 말씀은 교회의 타성을 책망하는 메시지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습관의 감격과 감사를 잃어버린 복음의 본질을 상실한 교회를 향한 책망이다.
교회가 이웃을 잃어버리게 되면 교회 자신이 사람들에게 버림받게된다

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누가복음 11:24-26)

하나님과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반듯하게 인격을 갖춘 것 같지만 그 영혼과 삶 속에 복음의 열매가 없으면 버림받게 됨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아버지보다도 물질에 마음이 있는 아들은 돌아온 아들로 인한 아버지의 기쁨과는 상관이 없는 아쉬운 인생이다.
(경기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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