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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론은 이런 사람입니다. (출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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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7일 세계의 도시 미국 뉴욕 맨허튼 한 복판 센트럴파크에 환호성이 터졌답니다. “뉴욕 마라톤 꼴찌” 죠이 코플로위츠(57) 때문이었답니다. 양팔에 지팡이를 짚고 막 결승선을 통과한 순간이었답니다. 거기에 마라톤 경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 전 새벽 5시 30분, 다른 참가자보다 5시간 빨리 출발했습니다. 뉴욕 남쪽 끝 스태튼 아일랜드를 출발한 지 27시간 40분 만에 골인한 것입니다. 코플로위츠를 기다린 기자들과 자원봉사자, 친지, 마라톤 팬 100여명이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손뼉을 쳤습니다. 축제처럼 마지막 수백 미터를 함께 걸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힘내세요.”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그의 나이 서른 두 살 때 온 몸의 중추신경이 제 기능을 잃은 희귀병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가 마라톤 풀코스인 42.195 킬로를 완주한 것입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경찰의 차량통제는 일찌감치 철수해 버렸습니다. 그의 막역한 친구 간호사, 서틀랜드와 물리치료사 루앤 스폴자가 우비, 도시락, 물병, 약통을 실은 손수레를 밀며 함께 완주했다고 합니다. 그는 달리는 내내 “누군가 불붙은 칼로 팔, 다리를 쿡쿡 수시는 듯한 통증”에 시달렸답니다. 고혈압에 당뇨까지 심한 그는 서너 시간에 한 번씩 혈당을 쟀다지요. 그런데 그가 뉴욕 마라톤 완주가 처음이 아니랍니다. 금년이 18번째랍니다. 그가 런던과 보스턴 마라톤까지 합하면 20회라고 합니다. 그의 기록은 전부 꼴찌라는 데 있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느린 기록의 보유자입니다. 그는 마라톤에서 두 가지를 배웠답니다. 첫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기고 지는 게 아니라는 것, 둘째는 코스가 아무리 길고 험하다 해도 그걸 완주할 힘은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첫째로보다 둘째로서 만족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아론입니다. 그는 모세의 형님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도 잘 합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모세가 앞이었습니다. 첫째는 늘 동생 차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론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꼴찌가 어쩌면 더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일등에 쏠리는 박수는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론이라는 위대한 둘째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큰 인물입니다. 위대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늘 모세의 뒤편에서 살았습니다. 동생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입니다. 비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분 나빠 하지 않았습니다. 속상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둘째면 어떻고 꼴찌면 어때요. 늘 겸손했습니다. 낮은 데로 임하는 자세였습니다. 형이 동생의 비서라는 것이 어울리지 않다고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론은 예외였습니다. 항상 겸손하고 일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세를 갖추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은 늘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Ⅰ. 아론은?

아론은 레위지파의 아브람과 요게벳의 아들입니다. 모세보다 3살 위였습니다. 그는 말이 어눌한 동생 모세의 입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 형제는 바로 왕에게 찾아 갔습니다. 그 백성의 노예해방 운동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이기 위해 기적의 지팡이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해방 시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모세 보다 말을 잘 합니다. 또 그의 형입니다. 그래도 불평 없이 이인자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양보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또 그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동생을 사랑했습니다. 백성이 사는 길을 가는데 둘째면 어떻고 꼴찌면 어떻습니까?

오스카 와일드에 의하면 삶에는 두 종류의 비극이 있답니다. 하나는 사랑의 슬픔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사랑을 얻는 비극이랍니다. 사랑은 사람이 무료함 때문에 시작한다고 합니다. 또 싫증이 나서 끝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남자는 권태로워서 결혼하고 여자는 호기심 때문에 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이라는 간절한 목적을 이룹니다. 환희로 가득 찹니다. 그러나 곧 독하고 질긴 권태에 뼈째 잡아먹힙니다. 우리는 수명이 다해 길에 누워버린 사랑의 시체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또 다른 신비로운 사랑을 찾습니다.

사랑은 양보해야 합니다. 아론은 자존심이 없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자존심 앞세울 이유가 없습니다. 요즈음 미국은 TGIT(Thank God it's Thursday)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요일이에요.”라는 말입니다. 미국의 학생들이 전에는 TGIF(Thank God it's Friday) “하나님 감사합니다. 금요일이에요” 했습니다. 이제는 금요일에 강의를 기피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중 나흘만 공부하고 사흘을 쉽니다. 점점 인간을 더 편하고 더 쉬운 삶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고생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세운 지도자가 아닙니다. 투표를 하지도 제비뽑기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았습니다. 그러니 첫째, 둘째를 가리거나 따질 처지가 아닙니다. 그는 동생의 그림자였습니다. 동생의 대변인이었습니다. 얼마 전 야당에서는 청와대 비서관이나 홍보수석, 국정홍보처가 너무 대통령 잘 한다는 말만 하니 심하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주고 받은 것 아시지요. 판사, 검사도 자기 동생이나 후배가 높은 지위에 오르면 선배들이 사표를 냅디다. 그것은 후배가 일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요. 속사정은 마음이 편치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후배 밑에서 일하기가 불편하겠지요. 여기는 세 살 아래 동생 밑에서 일하면서도 즐겁게 일한 것입니다. 이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시키면 그대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귀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를 대제사장을 삼으신 것입니다. 그는 겸손한 지도자였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감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자기 알리기에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지금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 하시지요. 아론은 자기를 버린 사람입니다. 언제나 동생 모세를 앞세웠습니다. 형제간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현대는 관용이 모자랍니다. 지난 11월 16일은 유엔이 정한 관용의 날(톨레랑스)입니다. 1762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의 한 개신교 가정에선 청년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장차 변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신교도라는 것 때문에 꿈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살을 했습니다. 다음 날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 중 누군가가 “양투안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다 가족에게 살해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창 칼라스)와 온 가족이 체포됩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칼라스를 수레바퀴에 매달아 사지를 찢어 죽였습니다. 다른 가족에게는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때에 철학자 볼테르가 무죄를 주장하고 죽은 지 3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습니다. 그는 “당신이 우리에게 미워하는 마음을 주신 건 결코 아닙니다. 서로를 죽이라는 손을 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여 덧없고 힘든 삶의 짐을 우리가 서로 도와 가면서 견딜 수 있게 하소서.” 이것이 “톨레랑스”입니다.

Ⅱ. 아론이야말로 섬기는 자였습니다.

복음 정신에서 섬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또 모세(동생)를 섬겼습니다. 그는 동생의 통역관이었습니다. 동생의 심부름꾼이었습니다. 그를 시중 든 비서였고 그림자였습니다. 그가 앞으로 대제사장이 됩니다. 그가 부름 받을 때 “하나님 제가 어떻게 동생 밑에서 일 할 수 있습니까?”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빛나게 한 사람은 형 아론이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동생의 손(팔)을 들어주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요셉 형제들의 불타는 질투심을 잘 압니다. 반면 아론은 늘 모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빠르게 행동했습니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연만 빛납니다. 충실한 조연이 없으면 주연이 빛을 보지 못합니다. 어떤 영화제 시상식 장면입니다. 자기의 아들 또래가 남자배우 주연상을 받고 자기는 조연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훌륭한 예술가답다는 것입니다. 큰일에는 늘 아론이 있었습니다. 또 자기는 동생보다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론은 겸손한 신사였습니다. 이름 그대로 낮은 데로 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일 쉬운 것 아닙니다. 말로는 가능합니다. 실천은 어렵습니다. 자기 욕심의 사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항상 우리는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갖춰야 할 덕목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경주에는 옥돌이 유명하지요. 옥돌 안경이 또한 유명합니다. 영남에 전해오는 말이 있습니다. “경주 돌이면 모두 옥돌이냐”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양반이라고 다 똑같은 양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교인도 다 똑같은 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구약에 수두룩 했습니다. 그러나 아론과 같은 제사장 찾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가 제사장 중에 제사장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어느 신문에 “복음성가 가수로 돌아온 70년대 스타 이상열”이란 글이 크게 실렸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못 잊어서 또 왔네, 아마도 빗물이겠지, 사랑과 우정”등의 노래로 남진, 나훈아와 어깨를 나란히 한 가수였습니다. 그의 나이 쉰아홉이랍니다. 1979년 “가수 이상열이 낀 억대 도박단 검거”라는 신문 기사처럼 그는 상습 노름꾼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도망갔습니다. 미국에서는 마약에 손을 댔답니다. 그런데 믿음 좋은 아내를 맞아 1983년 선배 한 명을 달랑 증인으로 세우고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했답니다. 그는 변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상습 노름꾼, 마약 중독자가 장로가 돼서 나타나 복음성가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이 하시는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에 따라 가야 합니다. 모세는 몇 번인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말을 못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자신이 없습니다. 증거를 보여 주세요.” 했습니다. 그 말이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이 엄청난 거사를 그가 앞장서서 깃발을 든다는 것은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 절대 못합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키세요.” 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 아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 군소리가 없었습니다.

맺는 말 :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람에게는 물질에 대한 욕심, 성욕, 명예욕은 쉽게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모세는 혁명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맨손으로 거대한 공룡 같은 바로 왕과 맞붙자는 것입니다. 왕의 명령 한 마디에 그는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운동에 모세의 비서 역을 형인 아론이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셔도 한참 모르신다고 할 사람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서열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거꾸로 된 것이지요. 그러나 틀림없이 형 아론이 모세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또 이상하게 그는 두번째로 만족했습니다. 모세의 명에 따라 왕 앞에서 별별 일을 다 했습니다. 모세의 말을 통역했습니다. 그는 찡그리는 얼굴로 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의 이런 면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물론 출애굽 뒤쪽에 금송아지를 만든 부끄러운 과거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의 긴 삶을 통해서 본 아론은 위대한 대제사장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아름다운 덕목을 갖추어 늘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005.11.27 -충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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