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보고 듣는 영적 세계 (마 9:27-34)

  • 잡초 잡초
  • 507
  • 0

첨부 1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많은 치유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한센환자, 열병환자, 중풍병자, 귀신들린 자, 혈루증 환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자까지도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농아의 귀와 입을 열게 하신 것은 각색 병자를 고치신 것 중에 하나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이야기와 농아의 귀가 열리는 이야기입니다. 두 개의 이야기가 붙어있는 것은 마태복음을 쓴 사람의 특별한 의도입니다. 그것은 이 일이 구약성경 예언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구약 이사야서에 이런 예언이 있습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35:5-6>

이 예언은 메시아가 임하시면 나타날 징조들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 때란 바로 메시아가 구원하시는 날입니다. 즉 맹인이 눈을 뜨고, 농아의 귀가 열리면 그 때가 바로 메시아가 온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통해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래 동안 이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자연히 맹인이 눈을 뜨고, 농아의 귀가 열리는 기적이 언제 일어날지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과연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가 아닙니까? 마태는 이 두 기적이야말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보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나타내신 적도 있습니다. 이때도 눈 뜨고 귀가 열리는 징조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제자들을 보내서 당신이 오실 그 메시아가 맞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사야의 예언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 7:22>

그래서 맹인이 눈을 뜨고 농아의 귀가 열리는 것은 여느 기적과 다릅니다. 이 기적들은 예수님이 바로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영적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창조된 세계를 보는 것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시세계 너머로 영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권능의 세계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9 장에는 나면서 맹인 되었던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그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공회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을 옹호하다가 그는 출회를 당하고 맙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는 육적인 눈뿐만 아니라 영안까지 뜨는 복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그를 심문한 바리새인들은 정작 눈을 뜨고 있지만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입니다.

영안을 뜬 것과 뜨지 못한 차이는 예수님을 알아 본 것과 알아보지 못한 차이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여 믿나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 주님 고백은 그의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세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눈을 떴습니다. 그뿐 아니라 영안까지 열려 구원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육적인 눈으로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영적인 눈이 훨씬 중요합니다. 영안을 뜨고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귀가 열린다는 것도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귀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너무 작은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너무 큰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지구는 적도 기준으로 시속 1689 킬로미터의 속도로 돌고 있습니다. 지구가 도는 소리는 너무 큽니다. 그래서 이 소리는 듣지 못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들리는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우리 귀에는 동시에 많은 소리들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우리가 느끼는 소리는 선택적입니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고 있다가 전화가 왔다고 합시다. 중요한 대사가 지나가지만 전화 통화를 하는 중에는 듣지 못합니다. 한쪽 귀로는 배우의 대사를 듣고, 한쪽 귀로는 전화통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따로 열어놓아도 동시에 두 가지를 들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집중해서 들어야 소리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한계 속에서 우리가 정작 들어야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사실 우리의 귀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은 영적으로야 들립니다. 온 마음을 주님께 드리고 집중해야 그 가능성이 아주 적게 열립니다. 믿음의 마음으로 들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정작 우리의 영적인 눈과 귀가 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거리를 지나시고 계셨습니다. 두 명의 맹인이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따라 왔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의 별명입니다.

예부터 메시아가 오시면 맹인이 눈을 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면 누구나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메시야를 기다린 사람들은 맹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은 메시야의 기적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그러니 오직 메시야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망설이 필요도 없이 이들은 즉각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맹인들은 여전히 주님을 따랐습니다. 집안까지 따라 들어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은 막연한 요청을 바로 잡아 주시기 위해서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우리는 이 예수님이 질문이 얼마나 예리한지 알아야 합니다. 보통 맹인들이 따라오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면 동냥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눈을 뜨게 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 일이라고만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맹인들과 암호를 주고받는 것 같습니다.

아까 거리에서 소리를 지를 때는 바로 그들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조용히 집안에 들어선 후에 그들을 상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원을 물어보시면서 이 일이라고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뭔가 차분하고 조용히 이들을 고치시려고 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들을 고치신 후에 예수님은 엄히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30 절입니다.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예수님은 맹인을 보게 하는 기적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계십니다. 이 기적은 당신이 메시야임을 확실히 드러내는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메시야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 때는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쉬쉬하시면서 이들을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당부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더 떠들어댔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온 땅에 전파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기적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기적의 메시야가 되는데 경계하셨습니다. 기적을 나타내는 메시야는 진정한 메시야를 가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메시야의 본래 모습은 기적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표적의 열풍에 싸여 있습니다. 어느 교회를 방문했더니 아예 노골적으로‘표적을 주옵소서’하는 현수막을 걸어 놓고 있었습니다. 요즘 이런 교회에 아말감으로 해 넣은 치아를 금으로 바꾸는 표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기도하면서 맺힌 땀방울에 금가루가 비취는 표적도 있다고 합니다. 예배 시간에 닭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사자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특히 교인들을 일어서게 한 후 단체로 쓰러뜨리는 표적이 제일 흔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런 표적들을 성령의 역사라고 해석하고 열광합니다. 그러나 이런 표적들이 과연 성령의 역사일까요?
모세가 바로 앞에 섰을 때 여러 가지 표적을 보였습니다.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했습니다. 이 표징은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셨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부른 술사들도 이 표징을 따라서 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나일강에 찍었더니 강물이 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술객들도 그것을 따라서 했습니다. 모세가 개구리를 내서 궁전을 가득하게 덮었습니다. 이것도 애굽 술객들이 흉내를 냈습니다.

모세가 나타낸 열 가지 재앙 가운데 두 가지를 애굽의 술객들도 따라서 했습니다. 세상의 희한한 표적들은 성령님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표적에 열광하면 본질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이 기적이 소문날까봐 조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칫 기이한 메시야로 전락할까 염려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 표적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며 그들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이나 있다가 살아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만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다는 것을 빗댄 것입니다. 즉 십자가야말로 가장 위대한 표적입니다. 십자가의 구원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위대한 기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표적을 희한하게 여깁니다. 표적 자체에 관심을 가집니다. 실상 예수님이나 성령님은 기적이 필요하면 베푸십니다. 그렇지만 기적이 표적이 되는 것은 거부하십니다.

자 예수님은 맹인들에게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때 맹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가 ‘주여’로 바뀌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야로 생각된다는 혹은 추측한다는 칭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니 따라 부르는 칭호입니다. 그러나 ‘주여’란 칭호는 본인의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묻고 계신 예수님을 즉각 신앙으로 응답하는 칭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은 눈을 만지시면서 너?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눈을 만지신 것도 예수님의 애정 표현입니다. 그들의 눈이 즉각 밝아졌습니다.

그들이 은혜를 입은 까닭은 우선 용기를 내서 주님께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은혜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집까지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부르며 믿음을 적극적으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한 기적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두 번째 기적은 농아의 귀가 열린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그는 귀신들렸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귀신들리면 자아가 제압되어 자신이 드러나지 못하고 다른 인격이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귀신이 듣고 말하는 능력을 차단했습니다. 듣지 못하면 말하는 능력도 함께 잃어버립니다. 소리를 모르기 때문에 입으로 발성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병이 귀신들리기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병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바이러스나 균에 오염되어 생기는 병이 있습니다. 유전적인 원인도 있습니다. 환경적인 요인도 있습니다. 사고로부터 입는 장애도 있습니다. 음식을 잘못 먹어 생기는 병도 있습니다. 귀신들림은 그 중에 하나입니다.

정신병과 귀신들림을 혼동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귀신들림이라고 해서 보면 정신증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즉각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이 농아였던 자는 바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억눌림에서 놓여 이제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농아였던 자와 앞의 맹인이었던 자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맹인들은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 왔고, 농아는 사람들이 데리고 왔습니다. 귀신들려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주님께 나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귀신들리면 스스로 은혜를 구하러 나오지 못합니다. 매어있기 때문입니다.

농아가 치유되는 장면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이런 일을 본 때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일을 보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못난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시기하는 자들입니다. 농아가 그 억눌림에서 해방되는 것을 보았으면 축하해 주고 함께 기뻐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가장 악하게 해석하여 은혜를 헛것을 만들려고 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정말 못난 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 시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은혜를 사모하는 일에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이 기적입니다. 오직 주님을 의지함으로서 이 기적을 통해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보지 못하는 한계를 아십니다. 그래서 구하는 자는 영안을 뜨고 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듣지 못하는 한계를 아십니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마땅히 할 말을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음도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께 나가면 귀를 열어 하나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내 귀를 열어 달라고 기도합시다. 내 완악한 마음이 부드러워져 든든한 믿음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황금성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