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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 (아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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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서는 솔로몬과 슬람미의 사랑의 노래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아가서란 말은 아름다운 노래라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요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런데 아가서는 사실은 우리 주님과 우리 성도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와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은 우리 주님을 가리키고 술람미는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사실 아가서는 이해하기가 너무 힘든 책입니다. 순서도 없고 논리도 없는, 사랑의 고백들을 그저 모아놓은,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어제 구약을 전공한 성주진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가서는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든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12월 사랑의 달을 맞아 술람미의 사랑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새벽마다 여러분들과 함께 아가서를 읽고 묵상하고 설교하면서 그리고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찬송가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부르면서 가슴에 많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워라.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내 기쁨 되도다. 내 주는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그 동정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 그 길릴리 오신 이, 그 때에 이 죄인을 향하여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 보이시면서 하신 말, 네 죄를 인함이라 하실 때, 나의 죄 짐이 풀렸네. 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부드러운 그 모습을 나 뵈옵고, 그 후로부터 내 구주로 섬겼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이와 같은 찬송 시들은 사실은 술람미의 사랑의 고백이고,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의 고백이고, 사도 요한의 사랑의 고백이고, 성 프랜시스의 사랑의 고백이고, 패니 크로스비의 사랑의 고백이고,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의 고백이고 송명의 시인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제 술람미와 솔로몬의 사랑의 노래와 사랑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먼저 솔로몬의 사랑의 이야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솔로몬의 사랑의 이야기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 특징 5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솔로몬의 사랑은 주도적인 사랑이었습니다. Initiative한 사랑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얼굴이 거무스럽게 탄 시골 처녀를 왕궁에 데려온 후 술람미에게 이렇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여인 중에 어여뿐 자야”(8). “내 사랑아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10). 솔로몬은 그 후에도 슬람미를 찾아옵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초청합니다. 술람미의 고백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2:10-13).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찾아오시는 주도적인 initiative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4:10). 막달라 마리아가 먼저 주님에게로 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로 오신 사랑이었습니다.

  둘째로, 솔로몬의 사랑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Unconditional한 사랑이었습니다. 술람미는 가문도 보잘 것이 없었고 미모도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비록 검으나”(5). “게달의 장막같을지라도”(5). 게달은 아랍의 유목민을 가리키는데 보잘 것 없는 종족이었습니다. “내가 일광에 쬐여서 거무스름할찌라도”(6). 주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unconditional한 사랑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사랑 받을만한 아름다운 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일곱 가지 귀신들렸던 더러운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셋째로, 솔로몬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Creative한 사랑이었습니다.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의 몸과 마음과 영혼 전부가 아름답게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술람미의 몸과 마음과 영혼 전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창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들기 같구나”(아1:15).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구나.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같구나.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4:1-12).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구슬 꿰미 같구나. 네 배꼽은 둥근 잔 같고, 네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네 눈은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레바논 망대 같구나.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나를 쾌락하게 하는구나.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구나”(아7:1-8). 완전히 눈이 먼 사랑, 모든 것이 아름답고 또 아름답게만 보이는 사랑, 그것이 창조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향유와 눈물과 입맞춤 등 모든 행위와 모든 움직임이 지극히 아름다운 사랑으로만 보였습니다. 너무너무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니라”(눅7:47). 그리고 마리아의 존재를 지극히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솔로몬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이었고 주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넷째로, 솔로몬의 사랑은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이었습니다. Exclusive한 사랑이었습니다.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 하나밖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 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아6:8-9).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배타적으로 독점적으로 사랑하시며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오직 너를 쁄라라 하리라”(사62:4). 예수님은 사도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를 배타적으로 독점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배타적으로 독점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주셨느니라”(엡5:25).

  다섯째로, 솔로몬의 사랑은 요구적인 사랑이었습니다. Demanding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인 동시에 받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수람미를 주도적으로 창조적으로 사랑하면서도 술람미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술람미의 얼굴을 보고 싶어했고 술람미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했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비들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2:14).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아6:14). 하나님은 우리들을 주도적으로 창조적으로 사랑하시면서도 우리들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막잘라 마리아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셨고 베드로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다음 술람미의 사랑의 이야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술람미의 사랑의 이야기는 우리 성도들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술람미의 사랑의 특징 5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응답적인 사랑이었습니다. Responsive한 사랑이었습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사랑에 응답했습니다. “왕이 나는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아1:4). 술람미는 솔로몬이 자기를 찾아오는 모습을 보고 그 소리에 응답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 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아2:8,9).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주도적인 사랑에 대한 응답적인 사랑입니다. 베드로도 막달라 마리아도 사울도 모두 저들을 찾아오신 주님의 주도적인 사랑에 대한 응답적 사랑이었습니다.

  둘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간절하게 사모하는 추구적인 사랑이었습니다. Eagerly yearning and seeking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술람미는 밤에 침상에서 일어나서 솔로몬을 찾아 길 거리로 나갔습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일어나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아3:1-2).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찾아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갔습니다. 중세의 성도들은 주님을 찾아 들로 산으로 사막으로 바위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새벽마다 일찍이 일어나 택시를 타고 산으로 가서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가슴에 병이 들도록 애타게 주님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하는 것이 성도의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아2:5).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아5:8). 저는 부족하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주님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은 지니고 있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며 이성봉 목사님에게로 김치선 목사님에게로 김창인 목사님에게로 권연호 목사님에게도 김세진 목사님에게로 한경직 목사님에게로 새벽마다 또는 밤마다 달려가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모함이 별로 없는 오늘의 신자들을 바라볼 때마다 저는 가슴에 슬픔과 탄식을 느끼곤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솔람미는 병이 들 정도로 주님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밤에 침상에서 일어나 성중으로 달려갔습니다.

  셋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한 사랑이었습니다. Joyful and happy한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 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ㄱ,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네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하라”(아2:3-7). 주님의 사랑은 우리들에게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부어주시는 달콤한 사랑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븜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6:22).

  넷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예속적이고 종속적인 사랑이었습니다. Submissive한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2:16).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아6: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7:10). 성도의 사랑은 오직 주님에게만 속하는 예속적이고 종속적인 사랑입니다.

  다섯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함께 있고 함께 달려가는 사랑이었습니다. Togetherness의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아7:10-12).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아8:14). 아가서의 총 결론은 함께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함께 달려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세상에 그 어디에라도 함께 달려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곳이라면 세상에 그 어디에라도 함께 달려가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솔로몬과 술람미의 간절하고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솔람미처럼 주님의 사랑을 흠뻑 받아 누리면서, 사랑에 사로잡혀서, 사랑에 병들어서,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주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하시는 사랑의 존재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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