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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베들레헴과 메시야 (미 5:2, 마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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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2월 성탄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성탄 계절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그런데 어디에서 기쁨을 찾는가가 항상 문제가 됩니다. 잘못 생각하면 성탄에서 기쁨보다 슬픔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성탄의 기쁨을 찾기 위해서는 성탄의 본질적 모습을 찾아야 그 속에 숨겨진 기쁨을 우리가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구약 미가서와 신약 마태복음으로서 이 두 성경이 기록된 시기를 보면 약 70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B. C 740년에서 710년까지 활동한 미가 선지자의 기록이 700년 후에 마태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에 의해 기록된 마태복음에서 동일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마태복음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700년 전 미가 예언자가 예언해 놓은 메시아 출생에 대한 예언이 지금 이루어졌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장 6절과 미가서 5장 2절은 동일한 말씀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구약은 예언이요, 신약은 성취라고 신약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그 성취란 예수 그리스도를 초점화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출생부터 부활까지 모두 구약에 예언되어져 있는 것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증거를 복음서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의 초점은 베들레헴입니다. 이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옆에 붙어있는 시골 동네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바로 그곳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을 한 것이 700년 후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마태가 지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과 미가서 5장 2절의 말씀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ꡓ태초부터 계신 자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 지금 예수님의 출생이라고 마태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마태복음 2장 1절을 보면 ꡒ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ꡓ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 헤롯 대왕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ꡒ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ꡓ 헤롯 왕이 잘 모르니까 잘 알만한 사람들을 왕궁으로 다 소집했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렀습니다. 유대 나라에 가면 이 서기관들이 모여서 성경을 연구하던 연구실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다 부서지고 연구실의 규격과 기초를 쌓았던 돌멩이들만 남아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평생을 성경만 연구하는 학자들입니다. 대단한 실력자들입니다. 헤롯이 그 사람들을 급히 왕궁으로 불러들여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동방에서 왔다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데 유대민족이 그토록 기다리는 메시아 탄생의 징조를 보고 왔다고 한다. 그러면 그 메시아가 어디에서 탄생할 것인가 알아낼 수 있느냐?” 왕이 서기관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서기관들은 헤롯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그 자리에서 대답을 합니다.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날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고 구약 미가서에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나셨다면 그곳에서 나셨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대답합니다. 이게 얼마나 실력자입니까? 그래서 헤롯이 박사들에게 말을 합니다. “베들레헴으로 가라. 이 사람들이 거기서 난다고 지금 말한다. 그리고 아기를 찾거든 내게도 알리라.” 이런 내용을 보게 됩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씀을 듣고 갈쌔 별이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ꡓ정확하게 베들레헴에서 출생을 하셨습니다. 지금 베들레헴 그 자리에는 기념 예배당을 건축해 놨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구유간 자리라고 하는데 지하실에 있습니다. 내려가 보면 너무 요란한 장식을 해놨기 때문에 실감은 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왜 베들레헴으로 오셨는가 입니다. 그 이유 속에 성탄의 기쁨이 들어있습니다. 먼저, 예수님 탄생의 특징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낮은 자리로 오신 것입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메시아의 낮은 자리 출생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베들레헴이 어떤 동네인데 낮은 동네인가? 우리나라 말로 이런 것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대체 언어가 하나 있죠? ‘빈민촌’ 아니면 ‘달동네’입니다. 예루살렘 남쪽 8km 정도에 아주 보잘것없는 산이 하나 있습니다. 그 산동네는 예루살렘에서 살고 싶으나 밀려난 소시민들이 모여 사는 장소인데 편안한 땅이라고는 한 평도 없을 만큼 돌멩이 산이요 비탈진 산골짜기, 볼품없는 빈민촌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정부는 베들레헴을 아라파트 정부에게 내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가져도 괜찮다고 내어 주었습니다. 별 볼일이 없어서 내어 준 것입니다.

제가 성지순례를 처음 갔을 때 베들레헴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넘어가는 저녁때가 되었어요. 우리 일행 중 화장실에 가고 싶은 사람이 몇 사람 생겨서 “어휴,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다!”하며 길가에 건물이 하나 있어서 그곳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자고 사람들이 들어가니까 군인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어요. 그 군인들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아주 험악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향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통역하는 분이 뛰어와서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고 하길래 “우리가 오줌 마려워서 볼일 좀 보려고 왔는데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통역을 해주었어요. “당신들은 누구인데 여기를 함부로 들어오느냐?” 그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어요. “우리가 화장실 가고 싶어서 들어왔다.” “아니, 여기가 뭐 하는 곳인 줄 알고 볼일 보러 들어오느냐?” “뭐 하는 곳입니까?” 그랬더니 아라파트 정부의 본부라는 겁니다. 그래서 보니까 아라파트 깃발이 걸려있고 아라파트의 사진이 걸려있는 거예요. 그런 곳을 오줌 싸자고 들어갔으니 가만있겠습니까? 그렇게 보잘 것이 없어요. 그래서 잘 통역을 해서 양해를 구하고 볼일을 보고 아주 미안하다고 했더니 다시는 오지 말라는 거예요. 오라고 해도 안 온다고 하면서 나왔던 경험이 있습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곳입니다. 지금은 그곳이 예수님 탄생하셨다는 곳으로 관광지가 되었기 때문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길거리에 전등도 달아놓고 아스팔트도 깔아놓아서 좀 좋아진 것이 그 정도이지 형편없는 빈민 소굴입니다. 그 낮은 자리로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무슨 뜻이 있는가? 예수님이 이렇게 낮고 천한 장소를 선택하신 것은 누구든지 편안하게 주님 곁으로 다가오라는 뜻이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로마 황제의 집안에서 왕자로 태어났다고 합시다. 누가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까? 한 나라의 실력 있는 임금님 주변의 몇 사람 밖에는 그의 곁으로 다가갈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귀족이라면 천민들은 누구도 그 곁을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서민은 누구든지 찾아갈 수 있는 열려있습니다.

저희들이 신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전 세계 가장 훌륭했던 교회의 목회자들의 삶의 스타일이 있다. 서민 스타일이다. 그런 목회자들 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 통계가 있으니까 귀족으로 살지 말고 서민으로 살라! 그러면 사람들이 많이 다가오고 예수님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다.” 신학교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무 세련된 사람에게는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나아갈 수 있는 공간이 안 보이기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심방을 많이 다니잖아요? 40년 동안 심방한 집이 얼마나 많겠어요? 또,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심방을 많이 다녀서 성도들의 모습을 제가 체험함으로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를 늘 구상하는데 그런 스타일의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주택의 구조나 치장이 너무 아름답고 화려해 졌는지 웬만한 집은 옛날 임금님들이 살던 집보다 더 좋게 번쩍번쩍합니다. 또, 평수도 넓고 화려합니다. 그런데 제일 달라진 것이 뭐냐? 바로 화장실 문화입니다. 요즘 큰 집들을 보면 화장실을 얼마나 화려하게 꾸몄는지 화장실인지 미술관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요. 그렇게 아름답게 잘 꾸며놓습니다. 그런데 서민으로 살던 사람은 그런 곳에 가서 볼일을 보려고 앉으면 본연의 임무가 안 됩니다. 너무 화려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낮은 자리에 온 것은 누구든지 편안하게 오라고 그러신 겁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마음이 외로워지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남들은 가족들이 모두 즐겁게 모이는데 모일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외로워집니다. 또, 모든 선진국은 크리스마스가 사치 문화로 변했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사람이 매우 쓸쓸하고 슬픈 크리스마스가 됩니다. 많은 프로그램의 모임들이 있는데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외감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곁을 다 찾아올 수 있는 빈민촌 달동네 베들레헴 거기서 나셔야 이 세상에 나와 같은 모든 사람들이 내게로 오니까 그래서 거기서 나신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초라한 내 주변을 원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한다고 하면서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에 지나치게 마음을 씁니다. 이제 한 달 동안 우리 주변에도 많은 크리스마스 카드와 선물이 교환될 것입니다. 이것은 나쁜 문화는 아닙니다. 좋은 성탄 문화입니다. 많이들 하십시오. 그러나 그런 것에 마음을 너무나 빼앗겨서 본질적 성탄의 의미를 상실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의 지구 안에 강림을 기뻐하는 절기가 됩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임금님은 하나님과 같은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닙니다. 세계가 다 똑같습니다. 임금님의 얼굴은 함부로 쳐다보면 안 됩니다. 그래서 대신들도 임금님과 이야기 할 때는 정면으로 눈동자를 마주치면서 안 합니다. 임금님은 저기 계신데 옆을 보고 말합니다. 임금님 앞에서는 손을 함부로 놀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두 손을 땅에다 대거나 아니면 팔짱을 껴서 손이 안보이게 말을 해야 합니다. 또, 임금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말을 해야 합니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라고 말을 해야 합니다. 임금님이 내려주는 선물이나 글씨 한 장은 집안의 영원한 보물이 됩니다. 임금님이 행천하시다가 쉬어 가는 장소는 성역화합니다. 임금님이 죽으면 능을 만들어 장엄한 분위기로 영구 보존합니다. 요즘 한국 음식점에 가보니까 그 식당에서 파는 음식의 유래와 효과에 대해서 많이 써놓는 문화가 되었어요. 어디든지 가보면 “이게 뭐 어째서 건강에 좋고, 청량리 밖에서 성종 대왕이 권농일에 쇠고기 국을 끓여서 함께 먹었다. 이게 설렁탕이다.” 이런 말이 있고 또, “인조대왕이 맛있게 잡수신 물고기가 도루묵이다.” 이런 내용을 다 써놓고 음식을 팔더라고요. 왜 그럽니까? 임금님 문화는 그렇게 높이 높이 뭐, 잡수신 음식 하나, 쉬어간 장소 하나, 말씀 한마디 한마디….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떨까요? 어느 나라나 가보면 그 나라에서 가장 공로가 있는 사람의 이름으로 거리 이름을 정했어요. 우리나라에도 을지로, 퇴계로, 충무로 그런 것이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살았다는 것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링컨 거리, 워싱턴 다리 모두 그렇게 해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천한 동네에 우리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 문화권의 생활을 같이 하셨는데 그것도 가장 천한 자리에 오셨다는 것 그 감격 때문에 내가 기쁜 겁니다. ‘우리 집에 다 오시다니! 하나님이 오시다니!’ 그 감격을 승화시키는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때 크리스마스가 내게 기쁨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도 낮은 곳을 찾아야 기쁩니다.

크리스마스는 뭐냐? 주면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불우이웃 돕기를 크리스마스 때 많이들 합니다. 갈보리교회도 12월 달은 3주 동안 착한 사마리아인 주일을 하자고 써 붙였잖아요? 오늘부터 3주를 하자고 현수막을 크게 붙였습니다. 지금은 개인적으로 다니면서 불우이웃 돕기를 할 수 없는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조금의 정성을 우리가 함께 모아야 합니다. 갈보리교회가 해마다 하는 일은 우리 주변에 이 추운 계절에 따뜻한 식사를 하지 못하는 수백 명에게 쌀을 나눠주는 작업을 지난해에도 계획했고 금년에도 계획했습니다. 주면서 기뻐해야 기쁨이 있는 이것이 크리스마스입니다. 나도 받아야할 처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받아야할 처지에 있으면서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야 기쁨의 크리스마스가 된단 말입니다. 저는 평생 동안 변함없는 철학이 있습니다.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있습니다. 말씀의 은혜입니다. ‘영혼의 구원이 필요한 자에게 나는 말씀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필요로 하는 장소에는 세계 어디에나 찾아가서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이것이다. 주께서 나를 통해서 가장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이것이다.’ 하루에 열 번이라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필요한 곳에는 다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할 일입니다. 주면서 기뻐해야 합니다. 만약 은과 금은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도 우리가 이웃에게 베풀어 줄 수가 있고, 멋진 시 한 장을 써서 성탄 카드에 적어 보낸 그것이 백만 불의 가치 있는 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 우리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좋은 크리스마스 계절에 다른 사람보다 고난스러운 환경에 내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건강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든가 물질 때문에 곤고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든가 가족 관계에서 매우 외로운 처지에 있다든가 직업이나 직분에 문제가 있어서 정상적 수준이 안 되는 소외감의 백성이라든가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무엇이 기쁜가? 주님은 그런 사람을 먼저 찾아오십니다. 기쁘잖아요? 왜? 그래서 베들레헴에 오신 거란 말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누구도 다 기뻐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그 다음에 낮은 곳에 임함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요한복음 7장 42절에 많은 군중이 예수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을 때에 증거 하는 말이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곳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오늘 말씀을 증거로 하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아버지도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베들레헴에서 다윗 가문의 씨로 올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지 않느냐?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다.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을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정해야 하는가? 나의 낮은 곳의 삶은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평생을 가도 고쳐지지 않는 고난이 내게 있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의 출생, 나사렛 빈촌에서의 성장기, 막노동꾼의 생활, 겟세마네와 골고다 십자가 이 모든 연결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가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야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나면서부터 고난 받는 형제를 보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얻고자 하는 영광이 숨어있다. 내가 이루고 있는 내 주변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섭리론에서 나를 볼 수 있는 영적 객관성이 있을 때 이 크리스마스는 너무나 기쁩니다. “하나님이 하신 길을 내가 지금 가고 있다.” 내 소원이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이나 내 의사로 결정할 수 없었던 것이나 또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우리가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죠? 더 좋은 나라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남자로 태어났고 여자로 태어났죠? 왜 얼굴 모양은 이렇게 태어났죠? 왜 나는 가난한 가문의 아들, 딸로 태어났는가? 나는 왜 행운이 없는 삶을 살아야 되는가? 이것은 어떻게 해결하죠? 하나님께서 이 길을 나에게 주셔야만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영적 의미가 내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주어져있습니다. 그 믿음을 정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내게 큰 기쁨을 줍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는 식민지 국가입니다. 로마 사람인 빌라도가 총독으로 와있는 형편입니다. 식민지 국가 유대나라에서 버려진 땅 베들레헴에서 버려진 장소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누구도 살기를 거부하는 빈민촌 나사렛에서 30년을 노동자 생활을 왜 하셨는가? 하나님이 정하신 일입니다. 그 다음에 베들레헴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이 생명의 떡이 무엇입니까? 이게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이란 말이요 떡집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생명의 떡집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일년에 몇 번씩 주님의 몸을 생각하면서 떡을 떼어서 먹습니다. 성찬 예식입니다. 예수는 영원한 베들레헴, 생명의 떡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시편에 보시면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요 요새시요 내가 피할 바위시라.” 이게 베들레헴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생명을 살리는 요새 지역으로 성경에 나옵니다. 산골짜기, 아주 숨기 좋은 전쟁의 피난처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B. C 586년에 유대 나라가 멸망을 당할 때 예루살렘 사람들이 살기 위하여 베들레헴으로 다 모였습니다. 그래서 살았어요. 피난민이 모이는 곳, 그곳에 가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곳, 쉴 수 있는 장소 베들레헴! 평소에는 버렸다가 위태하면 찾아오는 곳!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피난처 있으니 환란을 당한 자 이리 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여 삶이 곤고한 자들이여 내게로 오라. 여기 영원한 안식의 자리, 베들레헴이 있도다. 내가 여기 있노라”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이 베들레헴은 목자들의 생활터전이 됩니다. 이 목자들은 참으로 고난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유대 나라에는 3만 명 이상의 목자들이 살고 있는데 유목민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삶은 말할 수 없이 고달픕니다. 밤잠도 못 자고 양떼를 지켜야 되는 고달픈 직업의 사람들입니다. 이 베들레헴은 목자의 마을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거기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가장 많이 비유하신 것이 양과 목자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한 몇 가지 그림을 가지고 있는데 가장 유명한 그림이 세 가지입니다. 성만찬 그림, 십자가 그림, 그리고 양떼를 인도하시는 목자 예수님의 그림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나니” 목자의 장소 베들레헴! 그래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로 오셨기 때문에 목자의 마을, 생명의 떡으로 오셨기 때문에 생명의 떡집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입니다. 낮은 곳으로 오셔야 하기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내가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너무 사치 문화에서 기쁨을 찾으려 하지 마시고 ‘나는 비록 구제의 대상이면서도 남에게 주면서 기쁨을 찾는 성탄 계절이 되게 하자! 가장 낮은 곳으로 예수께서는 낮은 자리에 있는 나를 먼저 기억하고 찾아오실 것이다.’ 이렇게 우리 크리스마스를 정리할 때 이것이 기쁨이 되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치 문화에서 성탄의 기쁨을 찾고자 할 때는 실망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됩니다. 12월 한 달 베들레헴을 가는 마음으로 축복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지금도 베들레헴을 찾아오시고,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나를 찾아오시는데도 찾아오시는 주님을 영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슬픔을 갖고 있습니다. 12월 한 달을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성탄 계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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