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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에게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출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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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세 사람이 죽어서 영안실에 실려왔습니다.  그런데 죽은 세 사람이 다 같이 웃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인을 검사하러 왔던 의사가 이 모습을 보고서는 "이 사람들이 왜 웃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한 사람은 50억 짜리 로또에 당첨되어서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자식이 맨 날 꼴찌만 하다가 1등을 해서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겁니다.  세 번째 사람을 보고 의사가 "그러면 이 사람은 왜 웃고 있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벼락에 맞아서 죽었다는 겁니다.  "아니, 벼락에 맞았는데 왜 웃었느냐?"고 물으니까, 이 사람이 뒤에서 불이 번쩍하니까 사진을 찍는 줄 알고 "브∼이"하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감화와 감동을 받으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사탄 마귀는 끊임없이 사람을 충동질합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분노하게 합니다.  미워하게 합니다.  좌절하게 합니다.  절망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 마귀가 일으키는 충동질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내 성질에 충동질을 일으키는 모든 행위로부터 자유하십시오.  어떻게 해야 육신의 충동질로부터 자유할 수 있을까?  내 심령에 성령으로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언제나 사람을 감화 감동시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평안이 가득하게 합니다.  사랑이 철철 넘치게 합니다.  일어나 비전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움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제발 내 안에 성령께서 주시는 감화와 감동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십시오.  지금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만나면 은혜 받은 이야기를 하고, 앉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간증하셔야 합니다.  아십니까?  복음은 아는데 있지 않고 누리는데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믿음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아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많이 알아야 믿음이 좋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신학 박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학 박사가 다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까?  이것은 믿음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만약에 아는 것이 믿음이라고 한다면 복음은 능력이 아니라 학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경은 이렇게 기록되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깨달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학문이 됨이라"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성경은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한결 같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많이 아는 것으로 이 땅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 땅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능력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성취감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을 아는데 만족하지 말고 누리십시오.  이 복음의 능력을 누리십시오.  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면 인생이 바뀌어집니다.  가정이 바뀌어집니다.  세상이 바뀌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대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사회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제도화되고 조직화된 이 사회가 우리에게 엄청난 고통과 고난을 주고 있습니다.  이 고난과 고통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국회가 또다시 상대방의 멱살을 붙잡고 뒹굴면서 난장판을 쳤습니다.  국가적으로 일어난 엄청난 혼돈과 무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힘은 성령의 능력 밖에는 없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 암담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영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태초에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이 땅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더니 빛이 생겨나 세상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시간 말씀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 생명의 빛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소망의 빛이 환하게 비추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빛이 어두운 심령을 몰아내기를 축복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절망과 어둠의 영들은 만 갈래 길로 떠나갈지어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말씀합니다.  이 시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세상 다른 종교들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음을 채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기독교는 비우는 종교가 아니라 채우는 종교입니다.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성령으로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붙잡으셔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능력만 붙들면 무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맞게 되는 새 물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스가랴에서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들으십시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이 말씀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으십시오.  성령의 임재하심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열망하십시오.  그래서 복음의 능력을 맛보며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은 예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훈련된 주님의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어야 합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비전을 자신의 비전으로 품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일까?  그것은 주님의 비전, 목사님의 비전, 교회의 비전을 자신의 비전으로 품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교인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이런 교인은 행복한 신앙생활이 가능해 집니다.  교회에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바라보아야 할 분명한 초점이 있습니다.  함께 땀흘리며 이루어가야 할 분명한 과제가 있습니다.  내 시간과 물질과 은사와 열정을 송두리째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는 공동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비전이고, 주님의 비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붙들고 이 비전, 이 사명을 이룰 수 있다면 내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비전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사람을 공동체의 가장 자리, 축복의 가장 자리에서 밀어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자손손 천대까지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축복을 저와 여러분도 받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어떤 복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먼저 개인의 복을 주십니다.  내가 잘되어야 합니다.  내가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개인이 잘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복을 주십니다.  내 가정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풍성한 복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떡반죽 그릇에도 복에 복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께서 가문의 복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을 통해서 믿음의 가문을 일으키십시오.  축복의 가문을 일으키십시오.  역사에 주역이 되는 가문을 일으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민족의 복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이 민족이 복을 받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열방의 축복입니다.  나만 잘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복을 받고, 그것이 나아가서는 세계 열방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심령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나타내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모든 세대와 사람들에게 나타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위대한 날들을 만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나를 통해서 가정이 복을 받고, 믿음의 가문이 일어나고, 민족과 세계 열방이 복을 받았노라는 이 구원의 소식이 오고 오는 세대에 증거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늘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사람의 생명 속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갑니다.  보십시오.  엄청나게 넓은 나일강에 떠내려가는 조그마한 갈대상자.  그 조그마한 운명의 갈대상자에 담겨 방향 없이 떠내려가면서 한없이 울어대는 아이 모세를 상상해 보았습니까?  이 어린아이가 장차 이스라엘 역사의 주인공이 되리라고 누가 과연 예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부모인들 예견했겠습니까?  그의 형제들인들 예견했겠습니까?  이 어린아이의 부모들은 어디로 간들 생명만 붙어있어 주기를 바랬을 뿐입니다.  거기에 더 이상의 기대도 바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인생의 혼탁한 강물에 떠밀려 가듯 우리의 육안으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의 사건이 우리 속에도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조그마한 운명의 갈대 상자 속에서 모세가 할 수 있고, 한 일이라고는 앙앙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혼탁한 강물에 떠밀려가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개입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른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의 무능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됩니다.  아무리 몸부림쳐 보아도 안 되요.  I can do nothing.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I am nothing.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 앞에 자기 무능을 고백하러 나온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람은 버렸지만 하나님은 건지셨습니다.  부모와 형제는 포기했지만 하나님은 개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형제가, 친구가, 사회가 버렸어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건져주시는 역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무능에 결코 좌절되지 말아야 합니다.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십니다.  무기력한 자에게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성경은 놀랍게도 무능한 자들이 일으킨 역사의 기록입니다.  "하나님, 이제 저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것 밖에는 정말로 아무런 재주도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자기 항복의 선언 이후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십니다.  철저한 자기 항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의 작업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일을 당하든지 분내지 말고,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며 적개심을 품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의 앞부분에 보면, 모세는 전혀 무방비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질게 때리고 있는 애굽 사람을 보고 마음에서 분노와 적개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 사람을 때려 죽였습니다.  결국 한 순간의 적개심은 언제나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온유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내 안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온갖 분노와 적개심으로부터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은 사탄이 일으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동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내 자신의 행동을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인정만을 구하기에 사람들의 판단과 말들 앞에서는 오히려 냉철해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동한다고 하면서도 쉽게 분노하고, 쉽게 절망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으시겠습니까?  내가 사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내가 사람에게서 기쁨을 구하겠습니까, 하나님에게서 기쁨을 구하겠습니까?

♬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내가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한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발견되고 쓰임을 받았던 역사의 주역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전폭적인 지지만을 붙들고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말은 논쟁과 변명과 이론과 자기의 의를 따라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논쟁과 이론과 변명장이였던 모세는 결국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애굽의 모래밭에 한 생명을 묻고 겨우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가 도망을 갔던 미디안이라는 광야는 애굽에서는 사막의 끝입니다.  거기까지 모세는 도망을 갔습니다.  그는 갈 수 있는 데까지 도망을 간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 수단과 자기 힘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자기 이론과 논쟁과 변명으로 환경을 뜯어고치려고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성취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 때까지도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아니 이것은 모세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모세가 출세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애굽의 군대장관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한 지방을 맡아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애굽왕 바로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는 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애굽의 모든 사람들은 모세가 애굽의 왕이 될 것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삶에 대해서 당당했습니다.  내 힘과 지식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때까지 모세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계획을 창세 전에 이미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미디안 광야에서 실패와 절망과 낙심의 광야 학교에서 자기를 발견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실 수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삭막한 사막으로 도망가야만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몸 하나도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군림하는 왕자의 자리에서 미디안의 광야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미디안 촌장의 촌녀에게 들어갔습니다.  처가살이로 자신의 생명을 겨우 연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직업도 변변치 못하고, 가진 재산도 없고, 이 산 저 산으로 양을 몰고 다니며 실패와 좌절 속에 희망을 버린지도 오래 전입니다.  그곳에서 실망과 좌절에 빠져서 4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는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굳어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40년 동안 말도 통하지 않는 광야에서 버림받은 존재로 살아간다면 말을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모세는 처음부터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는 애굽의 왕궁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왕자였습니다.  자기 논쟁과 이론과 변명이 탁월했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말도 통하지 않는 미디안 사막에 살면서 말을 못하고 살았으니 입이 뻣뻣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때문에 그는 고독에 빠져서 40년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 버리워졌습니다.  40년 동안 한번도 하나님은 모세를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날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에 양떼나 치며 바람처럼 살다가 끝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렇게 당당하던 왕자의 모습에서 지금은 목동으로 신분이 곤두박질쳐졌습니다.  4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그 안에 있던 처참함과 비통함, 모든 혈기와 교만이 다 빠져나갔습니다.  준수한 체격 조건도, 왕실의 특수 교육도, 애굽의 높은 학문도, 숭고한 자기 관리도 사막의 모래 바람 앞에서 다 무너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에 못 마땅한 것은 고사하고, 내가 나를 보더라도 별로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잘난 구석이 없어 보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다 부셔졌을 때, 다 무너졌을 때, 이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모세를 들어서 쓰시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에 불을 붙이시고 그곳으로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좋은 나무는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석류나무입니다.  사막의 떨기나무는 가시덤불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떨기나무는 보통 사람의 키보다 낮은 나무요, 수명도 다른 나무에 비해서 훨씬 짧습니다.  아더 핑크라는 유명한 성경 학자는 떨기나무는 실상 모세 자신의 모습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떨기나무는 모세의 그림자입니다.  사막에 아무렇게나 버림받은 그 흔하고 흔한 떨기나무, 보잘것없는 떨기나무, 이것이 바로 모세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사막의 광야에 버리워져 있으면서 이제는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초라한 떨기나무,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떨기나무에 하나님께서 임하셨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떨기나무에 하나님의 불이 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떨기나무 같은 인생이라도 여호와의 불이 임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불이 타는 자는 힘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하늘의 능력이 있습니다.  인생 여정에서 실패와 절망과 낙심으로 주저앉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불로 임하십니다.  호렙산 중턱 떨기나무에서 일어난 그 불은 나무를 태우는 불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태우는 불이었습니다.  희망도 소망도 싸늘하게 식어진 모세의 마음을 뜨겁게 한 불이었습니다.  죄악을 소멸하고 인간의 삶을 거듭나게 하는 불이었습니다.  사명의 불이요 성령의 불이었습니다.  믿음을 회복하고 사랑을 회복하는 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늘의 불을 받으십시오.  성령의 불을 받으십시오.  우리 모두에게는 성령의 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불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 열방을 향한 불이 있어야 합니다.  조국과 민족을 향한 불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향한 뜨거운 불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태우는 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을 태우기는커녕 연기만 피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할 때 연기를 피우고 다닙니다.  마음속에서 향기를 뿜어내지는 못할지언정 시꺼먼 연기만 피우고 다닙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눈에 눈물만 흐르게 합니다.  목만 케케하게 만듭니다.  짜증만 나게 합니다.  그리고 쉽게 꺼집니다.  그러나 떨기나무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십시오.  불이 계속해서 피어오릅니다.  떨기나무는 아름답게 탑니다.  그러나 연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 인생에 연기를 피우지 말고,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성령의 불을 태우십시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좌절과 긴장과 수 많은 상처들을 하나님의 불로 태워야 합니다.  제발 잠깐 있다가 꺼지는 연기를 피우는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꺼지지 않는 불길과 영원토록 찬란한 빛을 발하며 아름답고 거룩하게 불빛을 내는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위대한 날들을 열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날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신을 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불이 타는 자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불투명한 미래와 황량함들 안에서도 하나님의 불이 임하면 꿈을 꾸게 될 것입니다.  환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비전을 향하여 앞으로 당당하게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역사가 지금 우리들 안에 강하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여, 성령의 불로 나를 온전히 태워주시옵소서!"

여호와의 불 앞에 섰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일반적으로 재판장 앞에서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구원의 역사는 모세가 신을 벗음으로써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신을 신는다는 이야기는 활동의 시작이요, 신을 벗는다는 말은 '네 일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은 출애굽을 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이제 네 인생 끝났다.  과거를 단절하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입니다.  이력서라는 말은 밟을 이(履), 신발바닥 력(歷)을 써서 자기 신발이 걸어온 경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네 발에 신을 벗어라'는 말은 땅의 이력서를 내려놓고 하늘의 이력서를 다시 쓰라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천국은 땅의 이력서를 가지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자기 자격이나 공로를 가지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늘의 이력서가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땅의 신발을 벗은 자들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신발을 벗는 곳입니다.  신발을 벗은 자가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다가 지치고 피곤한 심령들, 사람으로 인해서 이리저리 시달리고 찢긴 심령들, 병든 몸을 의지할 곳이 없어 외로움에 지친 심령들, 이곳에 와서 신발을 벗고 쉬십시오.  교회에까지 와서도 자기 신발을 벗지 못하고 목에 힘을 주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신발을 벗고 어린아이처럼 아버지 품에 안겨야 쉼이 있습니다.  신발을 벗지 못해 현관에서 서성거리며 주변을 맴도시는 분들은 지금 이 시간 신발을 벗고 하나님 아버지 집에 풍덩 들어서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자존심이 세면 셀수록 하나님 앞에서 깨뜨려지는 세월이 길어집니다.  교만이 강하고, 기질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 앞에서 쓰임을 받는 세월은 길어집니다.  모세는 4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야곱도 2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 세월이 길면 길수록 자기 자신과 가정이 그만큼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이론과 변명과 교만과 자존심들을 다 내려놓으십시오.  주 앞에서 세상의 신발을 벗으십시오.

모세가 신발을 벗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민족의 지도자로 쓰임을 받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다 지난 80에 모세를 불렀지만 그러나 그때부터 40년 동안 강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를 통해서 홍해를 갈라지게 하십니다.  마른 바위에 물이 나오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에 위대한 지도자로 세워주십니다.  그때로부터 모세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모세와 함께 가 주셨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마치면 여러분의 집으로 다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 가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과 함께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모두가 다 직장에 갈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 가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가 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험한 인생 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조창인 씨가 쓴 책 가운데 '등대지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 재우는 어려서부터 똑똑한 그의 형과는 엄청 다른 차별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도무지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고, 그 차별대우를 이길 수도 없어 집을 나와 등대지기가 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형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동생 재우에게 맡겨놓고 이민을 떠나버립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어머니를 맡아 섬긴다는 건 재우에게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등대에 불이 나가서 불을 켜기 위해 나가게 됩니다.  누워 있던 어머니가 자식을 부릅니다.  "재우야! 가지마.  재우야! 가지마."  하지만 재우는 어머님께 "어머니, 저는 가야 합니다.  여기 냉장고에 음식이 있습니다."하고는 등대를 고치러 나갑니다.  등대에 올라가 끊어진 퓨즈를 갈아넣고, 전기를 다시 연결시키는 순간 재우는 감전되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맙니다.  의식을 찾았을 때 그의 내장은 타 들어가는 듯 몸은 오그라들고 있었습니다.  '아! 이대로 죽겠구나!'  생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 시간에 수 백 계단을 올라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치매를 앓고 있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올라오면 분명 죽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 내려가세요."라고 소리쳐 보지만 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가까이 옵니다.  다가와서 어머니가 한마디합니다.  "너, 왜 밥 안주고 여기 있어.  밥 줘!"  그리고는 곧 바로 "너 힘드니, 내가 너 살려줄게."  그리고는 무릎에 아들을 눕힙니다.  빗물을 떠서 이 아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빗물이 들어갈 때에 타들어 가는 속이 다 식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세요! 여기 있으면 죽어요. 어머니, 돌아가세요."  "아니야.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오락 가락하는 한 노인 안에서는 치매와 모성본능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옷을 벗습니다.  그 옷을 벗고 속옷을 빗물에 적셔 아들 입에 넣어 줍니다.

나흘 뒤에 구조대가 왔을 때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살리고 어머니는 죽어갔던 겁니다.  하반신 마비가 되었던 아들, 그러나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느꼈기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등대지기를 지키고 있었던 힘은 바로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먹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넋두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쓴 뿌리에 갇혀서 상처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 내 안에 있는 쓴 뿌리의 상처를 벗어 던지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야 합니다.  모세를 부르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의 부르심이 나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있었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세밀한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나도 내 인생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멋지게 한번은 쓰임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큰 것을 위하여 나 자신을 하나님의 불로 태우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이렇게 외치며 사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의 통로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다."
내가 무너지면 하나님의 약속의 통로도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로 쓰시옵소서.  나를 하나님의 약속의 통로로 쓰시옵소서."
아십니까?
나에게도,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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