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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아기 예수 나신 곳 (눅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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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에 부산에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때 21개국 정상들이 부산을 찾았는데, 아마 지금까지 부산을 찾은 사람들 중에 최고의 VIP였을 겁니다. 그들이 묵은 숙소에 관한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최고급 6개 호텔에 흩어져 투숙했는데, 하루 숙박비가 150만원에서 550만원까지 다양했다고 합니다. 아마 국력에 따라 차이가 났겠죠. 가장 비싼 550만원 짜리 방에 투숙한 정상은 누구였을까요? 물으나 마나 미국의 부시 대통령입니다. 그가 묵은 방은 통 유리창으로 해운대 앞 바다와 광안대교, 동백섬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92평의 방으로 일반 객석 10개 규모입니다. 그 넒은 공간을 14억원을 들여 최고급으로 단장하고 부시 대통령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엄청납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야, 그런 데서 평생에 하룻밤이라도 자 보면 여한이 없겠다!” 이런 건가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이겠죠. 그러나 이 시간 예수님이 지구를 방문하신 첫날밤을 보내신 숙소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4년 짜리, 기껏해야 8년 짜리 대통령도 그런 호화스런 곳에서 묵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과연 어디에 묵으셨는가? 오늘 본문이 그 숙소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 : 인간의 죄를 위한 대속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분이 왜 하필이면 인간의 모습으로 와야 했을까요?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 ‘대속’(代贖)이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죄를 대속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개인적, 가정적, 사회적, 국가적, 세계적인 비극들)의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한결같이 ‘죄’입니다. 예를 들어, 왜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까? 죄 때문입니다. 왜 가정이 갈등과 불화를 겪습니까? 역시 죄 때문입니다. 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에 3백년이 된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죽어갑니다. 그 나무를 살리고자 전국의 유명한 식물학자들이 총출동해서 살려보려고 애썼지만 허사였습니다. 나중에 나무를 베어내면서 그 원인이 밝혀졌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딱정벌레 몇 마리 때문에 그 큰 나무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것 같지만 우리 안에 내재하는 죄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고 멸망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인생의 최우선 과제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롬6:23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죽음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 죄값을 치르게 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기신 하나님이 제3자를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대속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인간 중에서는 대속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죄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죄한 인간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방법은 피 흘려 죽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히9: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래서 십자가 대속이 이뤄진 것입니다. 이런 이치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구원과 영생이 주어지게 됩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따라서 예수님이 성탄하신 것은 십자가 대속물이 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이 택해서 나신 곳 : 베들레헴 마구간의 말구유
  우리가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더라도 더 좋은 방법으로 오시면 좋았을 텐데 ...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닙니까? 본인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화려하고 좋은 데를 골라서 태어나실 수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당시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에서, 아니면 하다못해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라도, 왕궁에서, 아니면 웬만한 저택에서 태어나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신 곳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1절~7절을 보면 나와 있습니다. 로마황제의 호적령이 내려 나사렛에 살던 마리아와 요셉이 본적지인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그곳은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그런데 마침 호적하러 온 사람들로 인해 사관마다 만원이었습니다. 결국 아기 예수는 마구간으로 갑니다. 당시 동굴로 된 마구간이 사관 근처에 있었을 텐데, 그 누추한 곳에 마땅한 자리가 없으니까 구유(여물통, 먹이통)를 침대 삼아 아기 예수를 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신 그분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의 마구간 구유 위에 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겉으로 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 요셉과 마리아, 사관 주인과 손님 등이 연출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배후에서 역하신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많고 많은 장소가 있었지만 굳이 그런 곳을 골라서 탄생하신 겁니다. 

[3] 베들레헴 마구간 말구유의 의미 : 비천한 장소, 고요한 장소, 고난의 장소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그런 곳을 택해서 오셨을까요? 그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의미가 있습니다.

  ① 비천한 장소 :
  예수님은 본래 가장 높으시고 존귀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낮아지신 겁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면 왜 그러셨을까요? 만일 예수님이 왕의 모습이나 귀족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웬만한 사람은 감히 접근하지 못할 겁니다. 왕궁에서 나셨다면 왕족이나 측근들 일부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천한 목수의 집안, 작은 마을, 마구간, 말구유에서 나셨으므로 누구나 접근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왕자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민정 시찰을 나갔다가 시골 마을에서 한 처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습니다. 왕궁에 돌아와서도 잊혀지지 않고 갈수록 그리워집니다. 물론 강제로 데려올 수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쑥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 부담이 되어서 도망가 버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왕자의 옷을 벗어던지고, 평민 복장으로 그 마을에 내려간 겁니다. 그 마을에서 평범한 모습으로 살면서 자연스럽게 그 처녀와 접촉하고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자기 신분을 밝힌 겁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기에 누구라도 다가올 수 있게 된 겁니다. 아기 예수께 첫 번째로 찾아와서 경배한 사람들이 목자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합니다. 당시 목자는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 경배 받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별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용납하시고 영접해 주십니다.  다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사절입니다. 교만한 사람들!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막2:17 “ ...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 의사는 오직 병자들에게만 필요합니다. 건강한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마찬가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낮고 천한 게 문제가 아니라 교만이 문제입니다. 가난한 자라도 교만하면 그게 문제입니다. 부자라고 교만하면 그게 문제입니다. 낮은 자라도 교만하면 문제이고, 높은 자라도 교만하면 문제입니다. 낮고 천해도 겸손히 회개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 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우리가 낮고 천하다고 생각합니까? 괜찮습니다.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높고 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죄인이기에 겸손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디 아기 예수를 영접하는 큰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② 고요한 장소 :
  베들레헴은 본래 작은 마을로 조용한 곳입니다. 그런데 당시는 호적령으로 인해 몰려든 사람들로 붐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란한 사관을 피해 고요한 마구간에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요한 곳을 좋아하십니다. 사역을 위해서는 소란한 곳을 마다하지 않고 가셨지만 홀로 계실 때는 늘 고요한 장소를 좋아하셨습니다. 공생에 기록을 보면 매일 새벽 고요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막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
니 ... ” 매일 새벽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예수님은 새 힘을 얻고 새 지혜를 얻으며 하루하루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영력을 얻습니다. 지혜도 얻습니다. 우리의 살 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의 소리요, 축복의 소리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있습니다. 이런 소리 저런 소리 ... 그런데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온갖 소음, 그리고 영혼을 죽이고 황폐화시키는 소리만 들립니다. 생명의 소리는 고요한 중에 들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늘 생명의 소리, 영적인 소리(靈音)를  들려주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다른 소리들 때문에 듣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리를 피해 고요한 중에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죠. 방안에 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똑딱거리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방안에 혼자 있거나, 모든 식구다 잠든 밤이 되면 똑딱거리는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시계 소리가 항상 있었지만 고요한 중에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도 고요한 들판에 있기 때문에 천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그 영혼이 삽니다. 인생의 승패도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가 언제 승리합니까? 애굽 궁궐에 있을 때입니까? 그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40세가 되었을 때 혈기를 부리다 살인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궁궐에서 도망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광야로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특별히 호렙산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때 사명 받고 출애굽의 대역사를 감당합니다. 
  여러분, 이 성탄 절기에 고요한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새 힘을 얻고 꼭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고난의 장소 :
  예수님이 오신 곳은 가난과 궁핍 등 고난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가난해도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아기가 어디 있습니까? 그만큼 예수님은 극한 가난 중에 오신 것입니다. 또 아기 예수를 강보로 쌌다고 했는데, 강보라는 단어는 본래 ‘찢는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는 것 같이 좋은 감이 아니고, 여기 저기 찢어진  누더기 같은 것으로 대충 감싸준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아기 예수는 탄생 즉시부터 가난을 경험하셨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서는 헤롯의 핍박 때문에 핏덩이 같은 몸으로 애굽에 피난을 갑니다. 그리고 33년의 지상 생애 내내 온갖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굶주림, 목마름, 고독, 슬픔, 멸시, 천대, 핍박, ... 그리고 급기야는 십자가 죽음을 경험하셨고, 무덤에 장사되는 경험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체험들을 다 겪으셨습니다. 단 한 가지, 범죄의 경험만 없으실 뿐입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체휼’이란 단어가 중요합니다. 몸소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므로 무엇이든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로받고 마음 속 깊이 감동을 받으려면 ‘공감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이 다르므로 예수님이 신성으로만 우리를 도와주시면 뭔가 허전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서 모든 인생고를 몸소 겪어 보시고 우리를 도와주니까 우리에게 큰 감격이 되는 겁니다.

  이철환 씨의 <연탄길> 1권을 보면 ‘아빠의 눈물’이란 글이 나옵니다. 어느 가족의 이야기인데, 온 가족이 휴가를 다녀오다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중3 딸아이가 크게 다쳐 목발을 집게 됩니다. 아빠도 목발을 짚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다른 가족들은 경상으로 금세 회복됩니다. 한참 예민한 청소년기에 딸아이는 방황합니다. 그럴 때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항심이 생깁니다. 심지어 엄마의 말조차 위로가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처지인 아빠의 위로는 큰 힘이 됩니다. 세월이 흘러 4년 후 대학에 합격해서 입학하는 날 온 가족이 입학식을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캠퍼스를 빠져나오는데, 어린 아이가 놀다가 한길로 뛰어나옵니다. 자동차가 달려와서 위험한 순간입니다. 그때 아버지는 목발을 던져두고 달려가 아이를 구해냅니다. 딸은 깜짝 놀랍니다. “아니, 아빠가?” 나중에 알게 된 시연인즉슨 청소년기의 딸아이에게 위로가 되려고 다치지 않은 발을 저는 척하며 목발을 짚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아빠의 사랑은 딸에게 더 큰 감격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체휼’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고난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임마누엘(God with us)인 것입니다.(마1:23 참조) 또 요1:14에 보면, 사도 요한이 성탄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장막(Tent)를 치고 함께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 함께 살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종류의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 현장에 와 계십니다. 동병상련이라고, 주님은 사람이 되셔서 사람처럼 모든 고난의 경험을 해 보셨기에,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동정해 주시고, 또 가장 효과적으로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잊어버리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성탄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부디 이 성탄절기에 주님이 나의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심을 굳게 믿고 새 힘과 새 용기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아기가 되어 베들레헴 마구간 말구유에 오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성탄 절기에 주님의 사랑이 깊이 감사하며 새 은혜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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