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탄]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마 1:18-25)

  • 잡초 잡초
  • 631
  • 0

첨부 1


성탄의 크신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께 "성탄의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합시다.

신앙이 좋다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보낸 크리스마스카드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 중에는 대통령이 보낸 카드를 보고 집어 던지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은 140만여 장의 카드를 발송했는데 이 카드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을 뜻하는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없고 단순히 ‘휴일(holiday)’이란 말만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카드의 그림은 눈 덮인 백악관 잔디밭에서 애완견과 고양이가 뛰어 노는 것이라니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려던 그리스도인 들 중에는 화가 날 만도 합니다. 문제는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는 뜻인데 성탄의 주인공인 그리스도는 간곳없고 ‘휴일’이나 ‘산타크로스’같이 성탄의 주변 일들이 주인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몇 년 전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라는 말 을 ‘윈터벌’로 바꾸자고 해서 문제가 됐던 적이 있습니다. ‘윈터벌’이라는 말은 겨울에 해당하는 윈터와 축제에 해당하는 페스티벌의 합성어입니다. 오늘날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과 상관없이 겨울의 한 축제가 되었으니 굳이 크리스마스라는 용어를 붙일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국!! 하면 감리교의 발상지로 개신교의 요람이라고 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를 '윈터벌'로 바꾸자는 것이 얼마나 세속적이고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는 잘못된 생각입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감사해야 할 성탄절에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님은 간곳이 없고 크리스마스를 빙자한 휴일이나 선물, 그리고 파티만 있으니 하나님 앞에 너무 죄스러울 마음뿐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나라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1200만 성도로, 국민의 4명 중의 1명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최근에 팻머스 문화선교회가 크리스마스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서울·경기 소재 중 고등학생 377명을 대상으로 했는데 그 결과 ‘산타클로스’라는 대답이 29.9%로 가장 많았습니다. 그 다음은 크리스마스 트리로 13.4%였고, 정작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린 응답자는 7.2%에 그쳤다는 것입니다.

산타크로스가 제일먼저 떠오르다니.. 말이 됩니까?
크리스마스에 가장 먼저 생각이 난다는 ‘산타클로스’는 전설 속의 인물로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산타클로스라고 알려진 인물은 AD 270년 옛 터키 항구 도시였던 파타라에서 태어나 343년 12월6일에 사망한 성 니콜라스(St. Nicholas)입니다. 이 사람은 자선을 많이 베푼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분의 일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느 날 그는 결혼 적령기에 이른 세 자매가 돈이 없어 거리의 여인으로 팔려나갈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고 금이 든 자루 세 개를 몰래 갖다 주었는데 이 자루가 기원이 되어 오늘날 ‘선물을 담는 산타의 양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산타클로스가 좋은 선물을 주는 분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산타크로스는 빨간 옷을 입지 않았어요! 산타의 복장을 만든 것은 코카콜라 회사입니다. 성탄절에 맞춰 콜라선전을 위해 빨간 옷의 산타크로스를 만든 것이 오늘의 산타크로스 복장이 된 겁니다.
미국의 화가 하돈 선드블롬(1899∼1976)은 코카콜라의 로고 색을 상징하는 산타의 빨간 옷과 콜라의 거품을 상징하는 풍성한 흰 수염의 삽화를 그렸습니다.(1931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광고) 그 결과 누구도 모르는 산타크로스의 옷은 빨간 옷과 얼굴에는 하얀 수염이 달인 모습이 마치 진짜 산타크로스인양 전 세계 어린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산타클로스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하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마귀의 장난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예수가 없는 성탄절의 산타크로스, 예수없는 축제, 예수없는 크리스마스카드는 마귀에게 속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 미국의 대형 교회 중에 8개 교회가 올해 성탄절에는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주일과 쉬는 날이 겹치니 주일보다는 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가정에서 가족끼리 예배를 드리도록 영상 DVD를 나눠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맞다! 틀리다! 논하기 전에, 과연 우리는 예수님은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니 우리 모두 가서 경배를 드리자는 성경의 성탄절 정신에 맞는 일인가? 의심이 됩니다.

이처럼 오늘날 이 땅의 크리스마스는 변질되었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짓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탄절에는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 경배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동방박사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 그리고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이들, 모두가 긍정적 부정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성탄절 예배자들은 예수님을 세상을 구원할 왕으로 믿고 섬겨야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통해서 크게 2가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신이신 하나님이 굳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존 그리핀이라는 사람은 백인입니다. 이 사람은 흑인들이 차별을 받는 것이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같은 사람끼리 피부색이 하얀가, 까만가로 차별을 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흑인들의 권리회복을 위해 나섰습니다. 그러나 흑인들이 하는 말이 "당신 같은 백인(white like you)은 우리같이 까만색의 흑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존 그리핀은 결심을 합니다. '내가 흑인들을 이해하기 위해 흑인처럼 되야겠다' 그래서 갖은 염색약과 방사선을 이용해서 자기의 얼굴과 몸의 피부를 검게 만들었습니다. 머리카락도 흑인들처럼 짧게 하고 흑인들 거주 지역에서 살면서 흑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흑인들을 이해하기 위해 백인이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한 것입니다. 흑인들은 그의 이런 노력에 감동을 받습니다. 지도자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위해 백인이 흑인이 되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당신이 우리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흑인들의 차별의 아픔을 안타까워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은 사랑이 있기에 ‘백인이 흑인이’ 된 것입니다. 존 그리핀은「나 같은 흑인 (black like me)」이라는 책을 쓰고 지난 80년에 나이 60세에 흑인의 피부를 만들기 위해 사용했던 약품의 영향으로 피부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진정 흑인들을 사랑한 백인이었습니다.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섬, 하와이에는 몰로카이라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이 몰로카이 섬에는 저주받은 병으로 불리던 문둥병인 한센병 환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해 그들만이 살게 됐습니다.
이때 다미앤이란 선교사가 단신으로 한센병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몰로카이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환자들은 철저하게 그를 외면했고 그가 전하는 복음도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너는 우리처럼 문둥병인 한센씨 병자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당신도 우리처럼 문둥병에 걸려봐라. 그러면 너도 예수를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거지요! 다미앤은 이런 비난과 핍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한센병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고 결국 그 한센병에 걸렸습니다.
신부 다미엔은 한센병자들에게 찾아가서 말합니다. “이제 나는 당신들과 함께, 우리라고 말할 수 있게 됨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에 감동해서 예수를 구세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존 그리핀이 백인에서 흑인 된 것과 다미엔이 건강한 몸에서 한센씨 병자가 된 것보다 더 큰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 된 것도 어렵지만 사람이 개가 된다면 누가 하겠다고 합니까? 그렇게 하기도 어렵지만, 그렇게 하려고 결단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신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은 것이 얼마나 큰일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백인이 흑인이 되고 건강한 사람이 한센병자가 되어 그들의 마음과 삶의 고통을 같이 겪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 그리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죄인 된 우리 인간을 대신하여 죄를 없애기 위한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신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죄의 고통을 다 받으신 것도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구원받게 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구원자 이십니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구원에는 세 단계의 구원이 있습니다.
첫째, 지난날의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입니다.
둘째,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험한 세파의 고난에서 구원하여 이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호받는 즐거움 입니다.
셋째, 영원한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여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소망을 가진 자로서의 평안함 입니다

그러면 첫째로 죄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은 무엇입니까?
21절을 같이 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말은 백성들이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죄를 지었습니다. 사람들이 죄가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법으로 판들을 하면 사람들은 다 죄인입니다. 로마서 3:10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에서 보면 "범죄 한 영혼은 반드시 죽으리라(겔18 : 20)"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있습니다. 죄인은 죽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강림하심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려고 세상에 오신 유일하신 분입니다. 이 죽음은 대속의 죽음입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를 할 때에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제단에 어린양이 되고 대속 제물이 되고 그래서 죄인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땅에서 노예로 고통을 받고 신음을 할 뿐, 애굽의 세력을 물리치고 자유를 얻을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일제의 36년 고통과 압제 속에서 해방됐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셔서 자유인이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는 것! 바로 이 상황을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쁨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죄인인 우리는 마귀의 종 노릇하 며, 세상의 유행을 따라 살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았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하는 일이 다 죄뿐입니다. 그 죄 값을 어떻게 다 치루겠습니까? 지옥가야 합니다. 율법아래서 보면 다 죄인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 주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의 죄는 용서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동시에 죄인에서 의인이 됩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몸을 입은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라, 내 딸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는 양자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분명 죄의 자녀이지만 예수를 구원자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죄가 있고 허물이 많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딸이라!”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만세!! 만세!!"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이 있음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 만세!!"라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인이었을 때, 율법 안에서 우리는 비판을 받고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는 사랑이 우리를 판단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의 법을 우리 자녀들에게 들이대는 부모는 없습니다. "너 이거 안하면 죽을 줄 알어" 했다고 안해 놓은 자녀를 죽이는 부모는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이심을 깨닫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구원은 험한 세상을 이기도록 하나님의 보호받는 하나님의 백성 된 즐거움입니다.
23절을 같이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세 살짜리 아이와 같이 길을 갑니다. 그러면 제가 이 아이를 보호하겠습니까? 이 아이가 저를 보호하겠습니까? 이 아이가 저를 보호합니까? 제가 그렇게 약해 보입니까?
당연히 제가 이 아이를 보호하지요. 신이신 하나님과 인간이 우리가 함께 한다고 하실 때에 사람이 하나님을 보호합니까? 하나님이 사람인 우리를 보호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상섬기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을 보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은 즐거움이 있습니다. 기쁨은 잠시지만 즐거움은 오래 지속됩니다.

예수님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설명할 때
-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님과 가지인 그리스도인
-목자 되신 예수님과 그의 기르시는 양인 그리스도인
주님은 끊임없이 보호자가 되심을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로 자라났지만 살인자가 되어 나이 40세에 미디안 광야로 도망해서 40년 동안 메마름 광야에서 비천한 직업인 목자로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두 아들들의 이름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맏아들은 게르솜, 둘째아들의 이름은 엘리에셀입니다.
게르솜이란 ‘이방의 나그네’란 의미이며 엘리에셀은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의 두 아들 이름은 우리 인생의 두 진리입니다.
우리는 다 나그네입니다. 나그네의 삶은 고달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이십니다. 나그네의 인생길에 도움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모세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나그네의 인생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셨다는 것은 우리의 동행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은 세계에서 가장 지혜롭고 부귀영화를 누린 왕이지만 그는 죽기 전에 말하기를 “세상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는 모든 것이 헛되다!” 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인생은 허무란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끊임없이 말하기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보호를 받기 때문에 가장 지혜 있는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돈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안에 살며, 기도안에 살며,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내가 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 뿐만 아니라 고달픈 인생길의 동행자가 되셔서 나를 보호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즐거움의 삶을 살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땅히 감사해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구원, 그 세 번째는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함을 받는 소망이 있는 평안함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자녀에게 유산을 물려주듯,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신 하늘나라의 유산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8:16~19의 말씀에“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 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신앙인들은 언제든지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얘기 할 때, 사도바울도 말했듯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고난이 있다. 그러나 장차 이 땅의 고난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영광이 우리에게 있다'는 세 가지입니다. 하늘나라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장차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이 완전한 구원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기쁨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즐거움을 가진 하나님나라 백성, 근심과 걱정에서 구원 얻은 성도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은 천국의 문이 열리는 순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예수님이 천군천사와 함께 마중 나와 계십니다. 그곳에는 근심이 없습니다. 고통이 없습니다. 수고함이 없습니다. 슬픔이 없습니다. 이별도 없습니다. 다툼도 없습니다.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곳에 우리들을 인도하시고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천국에 대한 소망이 흔들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흔들리면 안됩니다. 여러분 만일 천국에 가실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흔들리고 계신 분들은 이 말씀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평안함을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마태복음 6:19-20의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 하느니라”

빈털터리로 여행을 한다고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민을 간다고 가정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불안하고 답답합니까? 그러나 뭐라고 가지고 간다면 평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언젠가 우리 여전도회 회원들이 일산에 있는 장애인학교인 홀트 학교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장애인들을 돌봐주고, 씻겨주고, 빨래 해주고 청소해주고 기도해주고 보통 힘들 일이 아닙니다. 봉사를 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 여 집사님이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몸은 고단한데 왜 이렇게 맘은 편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마음에 평안함이 옵니다." 그 평안함은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아 놓는 그런 평안함입니다. 좋은 일을 해보세요. 얼마나 마음이 평안한지 말입니다. 길을 지나가도 종이 한 장을 주우면 마음이 편합니다. 가시다가 한 번 해보세요.

하물며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 만드신 기쁨, 하나님의 보호 받는 즐거움,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 가지고 우리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아 놓는 것이 기쁨입니다. 왜 평안이 없겠습니까? 왜 즐거움이 증폭되지 않겠습니까?

돈을 주어도 사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두 사람의 얘기를 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를 낮추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모든 역사가들에게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생애(휴우즈와 록펠러)
미국의 거부 하워드 휴우즈(Howard R. Hughes)는 ‘휴우즈 항공기 회사’를 설립했고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를 지배하고 TWA항공사와 ABC방송회사도 운영하는 세계적인 부자였습니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지요.

그가 죽었을 때 막대한 재산을 남긴 것은 ‘물어보나 마나의 일’인데 휴우즈는 하도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재산도 더 많이 있었으리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애의 말년 10년을 이 사람처럼 외롭고 고독하게 지낸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외부인을 전혀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하 직원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사람이 와서 자기를 해치지나 않을까 하는 노이로제에 걸려서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만나지 않았습니다. 계열사의 사장들에게 지시할 때도 전화나 마이크로 하고 얼굴을 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그는 음식을 마음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혹 누가 음식에 독을 넣지 않았을까 하고 염려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불쌍합니다. 그가 젊었을 때 그 준수한 용모로 수많은 여자와 관계하여 자식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한 사람의 아내도, 한 사람의 자식도 오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의 많은 재산이 자신을 불행하게 했습니다. 그는 많은 돈과 공포의 노예가 되어 자유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경건한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살았을 때, 자선사업이나 남에게 베푸는 삶을 영위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해 록펠러 1세(John Davison Rockfeller)는 좋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는 ‘스탠다드 석유회사’를 설립하여 미국의 재벌이 되는 과정에서 동업자들을 압박하여 피해를 준 것을 회개하고 말년이라고 하는 57세를 지나 98세까지 살았습니다. 자선사업가로 삶을 마쳤습니다. 그는 재산을 가졌으나 좋은 일에 썼고 명랑하고 행복한 대인관계를 가졌습니다만 재산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세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①가장 가난한 사람에서 최고의 부자가 된 것, ②다 죽었던 사람이 98세까지 건강하게 살았던 것, 그리고 ③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남에게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신앙인 록펠러는 맨하탄의 ‘리버사이드 쳐치’라는 허드슨 강가에 경치 좋은 곳에 대리석으로 웅대한 교회당을 지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매주일 가족과 함께 그 교회에 다녔고, 온 가족이 예배참석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그들만의 가족석이 있었고, 집에 돌아올 때도 차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설교 말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세계적인 거부가 한차고 가족들과 함께 교회를 다녔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또한 사회사업에도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록펠러 재단’을 설립하였고, ‘록펠러 의학연구소’를 창립하여 미국인에게는 물론 인류를 위하여 좋은 일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록펠러는 자기를 아는 겸손한 분입니다. 그의 아들, 흔히 록펠러 2세로 알려진 넬슨(Nelson)이 자기 집 가정부와 결혼한다는 소문이 나자, 남의 가정이야기를 파헤쳐서 먹고사는 기자들이 벌 떼처럼 모여와서 아버지 록펠러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아드님이 식모하고 결혼한다는데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가 대답하기를 “우리 할아버지가 스코틀랜드에서 못살아 미국으로 이민 올 때는 우리 며느리가 될 사람의 집보다 훨씬 가난했습니다. 우리집안은 며느리네 집안보다 형편없는 집안이었습니다.”라고 하여 기자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이런 분이 진짜 부자입니다.
그 며느리는 결혼 후 대학에 진학했고 온갖 교양을 갖추어 미국 사교계의 큰 별이 되었습니다. 넬슨은 평생 박애사업과 종교사업을 하여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의 손자, 록펠러 3세는 뉴욕 지사에 3선 연임하였고 공화당의 거물이 되었습니다. 1975년에는 부통령이 되었고, 록펠러 센터의 이사장이 되었습니다.
록펠러 자신이 자선사업을 많이 하고 그 후손들이 다 잘된 것은 모두 경건한 신앙생활에서 온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재물에 신앙을 겸비되면 큰일을 할 수 있고, 재물에 신앙이 있으면 당대는 지옥생활을 하고 후손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구원의 기쁨은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이요, 하나님의 보호받음의 즐거움이요,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소망 있는 평안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이나 평안함은 거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주를 위해 살 때 이러한 즐거움과 기쁨이 더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에 즐거움과 평안함이 더해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이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에게 성탄의 복이 함께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창우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