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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을 좇아 (딤후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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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함박눈이 펑펑 내린 다음날 이른 아침에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 위를 걷던 그 느낌과 기분을 기억합니다. 지나온 세월은 발걸음마다 허물로 얼룩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간밤에 아무도 밟지 않은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제 지나간 모든 허물들은 떨쳐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한 해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순교를 앞두고 옥중에서 쓴 최후의 서신으로 주후 66-67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루하루를 눈물과 두려움 속에서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아비의 심정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2). 디모데는 당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64년에 로마에 대화제가 있었는데 화제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떠넘긴 네로 황제로 인해 교회는 심각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거짓교사들이 침투해서 영지주의 이단 사상을 퍼트려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또한 디모데는 연소함으로 인해 업신여김을 받아 목회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디모데는 눈물을 흘리며, 두려움에 빠져있었습니다(4, 7).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사도 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6). 디모데는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와 같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를 꾸짖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 속에는 여전히 거짓 없는 믿음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5).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사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다시 활활 타오르기를 바랍니다(6).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는 서두에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여기서는 ‘긍휼’도 함께 기원한 것을 보면, 그가 디모데를 매우 긍휼히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6-8) 디모데의 은사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모든 은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려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을 생각할 때, 목회자로서 교회를 참되게 든든히 세워 가는데 필요한 은사였을 것입니다. 이 은사를 불타오르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무엇이며 주시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되새기지 않고서는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a spirit of timidity)입니다. 기질적으로 약한 분들이 있습니다. 참 믿음을 소유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잘 인식하고 자신의 강한 면보다는 약한 면을 예리하게 감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제에 직면하면 낙망하여 위축되거나 두려움에 빠지기 쉽습니다. 담대한 기질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존하기보다 자기 힘으로만 문제를 돌파하려는 교만에 빠지기 쉬운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어떤 기질의 사람이든 명심해야 할 것은 성도는 기질에 지배를 받기보다는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 소심한 정신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나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나를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것은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주셨다는 단어는 한 번 주심으로써 계속적으로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원리적으로 보면 아무리 연약한 신자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불신자과는 다른 탁월한 어떤 면을 소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능력의 영(a spirit of power)을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난은 사람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지속적인 고난은 담대하던 사람도 소심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예수님을 믿는다하면서도 끊이지 않는 고난 속에 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뭔가 잘 못 믿고 있는가?’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가?’하는 자책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능력은 고난을 담대하게 받을 수 있게 합니다. 고난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주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게 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를 개척할 때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이여 오라. 안 오면 내가 간다’고 말하면서 일부러 고난 속으로 돌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받는다고 해서 기질적으로 고난을 좋아하도록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성도에게도 역시 고난은 싫은 것이지만 고난 때문에 복음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받는 고난이라면 피하지 말아야 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인 그레이(Jane Grey, d. 1554. 2)는 여왕이 된지 9일(1553. 7. 10- 7. 19)만에, 5년 동치 기간 동안 273명의 순교자를 만들어 ‘피의 메리’로 악명 높은 메리 투더(Mary Tudor)에 의해 처형되어 ‘9일간의 여왕’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죽기 전에 그녀를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인은 종교개혁자들이 물려준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며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4일 후 18세의 꽃다운 나이의 그녀는 런던탑에서 도끼날에 목을 베입니다.

어떤 분은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고문만 해도 금방 예수님 부인해버릴 텐데’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나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기질적으로는 연약한 사람도 당당하게 고난을 감당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주어져 있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사랑의 영(a spirit of love)을 주셨습니다. 디모데후서 3:1-5절에 때가 이르면 사람들은 3가지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물질적이고 쾌락적인 세상 풍조에 기독교가 오염되어 그것들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리라고 했습니다. 신자의 모양은 갖추었지만 참 신자로서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을 예언한 이것은 꼭 우리 시대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이들에게 동화되지 않고 단호히 돌아설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시면 평소에 무관심하게 냉대했던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세속적인 가치관과는 질적으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다릅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사랑할 수 없을 때 침체에 빠집니다.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미워하고 원망했던 사람도 사랑하고 축복할 수 있게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자제의 영(a spirit of self-discipline)을 주셨습니다. 디모데후서 4:1-5절을 보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권하면서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했습니다. 바쁘면 바쁜 대로 한가하면 한가한 대로 자기를 적절하게 절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에 충실하려고 하다보면 다른 하나에는 부실하게 됩니다. 직장에서 맡은 업무가 있고, 가정에서의 역할이 있고, 교회의 일이 있고 …. 한꺼번에 감당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고도의 절제력이 요청되는데, 적절하게 자기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일에 끌려 다니며 뭐가 중요한지도 놓쳐버리고 정신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한군데서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 연쇄적으로 모든 일에 영향을 미쳐서 엉망이 되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제의 영을 주시면 고도의 절제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과 전도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동시에 많은 일을 해내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시간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간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떤 정신을 소유하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마음’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 혹은 ‘정신’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바빠서 못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시간이 많아도 못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은 바쁜 사람에게 시키라는 말도 생기는 것이고,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영적 침체에 빠져 은사를 발휘하지 못할 때, 표면적으로는 기질적인 문제나 환경의 문제, 혹은 능력이 없거나 사랑이 없거나 절제력이 없는 문제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결코 그러한 않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두려움은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마음은 주시지 않은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받지 못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불신이고 죄입니다.

불은 가만히 두면 사그라지는 성질이 있어서 한 번씩 휘저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휘저어 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고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영을 좇아, 내게 주신 은사들을 불 일듯 하게 함으로서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한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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