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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세 사람과 그 네째 사람 (단 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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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때로 사람을 낙관론자와 비관론자로 구분하게 됩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은 꼭 같은 일이 닥쳐와도 그것을 대하는 자세는 완전히 반대로 갈라집니다.
  흔히 드는 예이지만, 물이 반 차 있는 컵을 볼 때, 낙관론자는 "물이 반 컵 남았다."라고 말하고 비관론자는 "물 반 컵을 벌써 없어져 버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좋지 못한 상황을 당하게 될 때면, 비관론자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 것이고 오직 낙관론자만이 그것을 극복하고 역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기독신자를 그러한 구분에 적용시켜 본다면 당연히 낙관론자 쪽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곤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불신자들은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헤쳐 나갈 길을 모색하려 하는데, 오히려 신자라는 사람들이 조금만 환난을 당해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고 비명부터 지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연약한' 죄인이라는 사실에 너무 감정이입 되어서, 또 늘 주님께 '의지'한다는 것이 오히려 핑계가 되어 버려서, 어쩌면 우리 신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앞에서 울보와 마마보이처럼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즉 기독신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세상의 환난 앞에서 불신자보다도 더 맥을 못 추는 경우들이 다반사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물론 참된 신자는 결코 그렇지 아니합니다.
  정말 제대로 중생 받고 은혜 생활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힘들 때, 넘어질 때, 아플 때를 통해서 더욱 튼튼하고 의연하고 성숙한 모습을 익혀 나가고 발휘하게 되는 자들입니다.
  물 반 컵이 남아 있어도 그것을 낙관적으로 볼 줄 아는 사람도 있는데, 하물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자기 곁에 계신 줄을 아는 신자가 어찌 매사에 긍정적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대표적인 모범을 증거해 주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서의 주인공이 다니엘임은 두말할 필요 없지만 그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역시 다니엘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훌륭한 신앙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다니엘의 그 세 친구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환난을 통과하면서 그 얼마나 멋있는 신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신자는 두려운 환난을 당할 때 그 때문에 하나님을 불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확신하는 기회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심히 고민스러워 보일만한 상황이 이 세 사람들에게 닥쳐왔을 때, 그들은 오히려 지극히 간단하게 대처했습니다.
  본문 1절로 12절의 말씀에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 느부갓네살 왕이 보내어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을 자기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게 하매 / 이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여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 반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가로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 하매 /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리어 절하니라 /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무릇 사람마다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리어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느부갓네살 왕이 꾀하고 있는 바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온 제국을 하나의 종교 아래 묶어서 자기의 정권을 확고히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앞장에 보면 다니엘이 현재 바벨론 제국의 상태를 '신상의 머리,' 즉 정금으로 만들어진 부분에 비유해 주었으니, 이 느부갓네살이 금으로 신상을 만든 것은 어쩌면 그 해석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 어쩌면 그 신상 자체가 바로 느부갓네살 자신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것이었을 가망성도 다분합니다.
  하여튼 본질적으로는 옛날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일본인들이 천황 숭배 사상을 강요함으로써 제국 산하의 모든 민족들을 정신적으로 하나로 만들려고 시도했던 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 앞에 그의 모든 신민은 그 어느 누구도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바벨론 제국 산하의 모든 고위 공무원, 판사, 변호사, 회계사, 컨설턴트에서 하급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느부갓네살이 주는 월급을 받아먹고 살고 있었으니 그 신상 앞에 국민의례를 하라는 명령에 아무도 거역은커녕, 그 어떤 하자도 달 리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거역하면 당장 화형에 처한다는 명령까지 딸려 있으니 더욱 두말할 나위 없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로 그런 막다른 골목과 같은 형편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심히 고민스러워 보이는 상황 같지 않습니까?
  왕의 명령에 따르자니 아무래도 신앙 양심에 걸리는 일 같고, 거역하면 당장 밥줄 정도가 아니라 목이 달아날 판이니, 정말 선택하기 어려운 처지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쪽도 저쪽도 곤란하다면 그 중간에 어디 적당한 타개책은 없을까 하고 머리를 짜내고 있을 법한 상황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어려워만 보이는 시험에 그 세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놀랍게도 그들에게는 그 진퇴양난의 난감하게만 보이는 상황이란 것이 조금도 고민거리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런 명령을 받고 그 신상 앞에 섰을 때 무슨 선택의 여지를 두고 고민했다든지 어떻게 적당해 해결해 보려고 타협책을 모색했다든지 하는 기색을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결코 그 신상 앞에 절할 수 없다는 그 결정을 지극히 간단하게 내리고 아주 당연한 일로 실천에 옮겼던 것입니다.

  이 삼총사의 그와 같은 자세는 나중에 느부갓네살 앞에서 한 말 16절에 기록된 말을 통하여 너무나도 명백히 드러납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고민이고 자시고 할 필요조차 이들은 느끼지 않았습니다.
  봉고파직이고 화형이고 하는 것조차도 하나님 아닌 다른 신 앞에서 절하는 이 중대한 신앙 문제를 두고서는 이들에게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눈에는 참으로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짜 신앙의 면모가 아니겠습니까?
  일제 때 조선의 교회들이 신사참배를 강요당할 때, 많은 목사와 교회들은 그것을 두고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신사참배 거역하다가 교회당이 폐쇄되고 목사가 감옥에 가는 것보다는 어떻게 적당히 타협하고 교회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 이런 이상한 고민들을 했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꼭 우상숭배가 아니라 그저 국민의례 정도로 받아들이면 성경적으로도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이런 고민에 갈팡질팡했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목사들에게는, 진짜 기독신자들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문젯거리조차 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우상인 신사 앞에 절할 수 없다."라고, 아주 명료하고도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고서 나머지는 하나님의 손에 맡겼던 것입니다.

  어려운 시험이 닥쳐오면 "아이구, 내가 이런 형편에서도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 "이런 경우만큼은 어떻게 성경적으로 용납되는 길이 없을까?"하고 고민하는 것을 당연히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하나님과 우상을 두고 그 사이에서 선택의 고민을 시작하고 경중을 달아 보기 시작하는 그 자체가 이미 불신앙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더라도, 그 어떤 경우에도 나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는 절대로 양보하거나 머리를 숙일 수 없다. 나와 내 집은 무조건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 참된 신자의 결론은 이처럼 항상 간단명료한 것이지 결코 복잡하고 어려운 선택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임을 알고, 환난 때문에 불신하는 약골교인이 아니라 환난이 배경이 되는 까닭에 자신의 신앙을 더욱 뚜렷하고 분명하게 발휘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는 환난이 점점 더 악화되어도 불신자 앞에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전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신앙의 삼총사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두 번째 모범이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 13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에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 온지라 /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어떤 갈대아 사람들"의 고자질을 들은 느부갓네살은 당장 이 세 사람들을 체포하여 그의 앞으로 끌어오게 했습니다.
  이미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였지만 느부갓네살은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려 했습니다.
  자비로운 마음에서 그리했다기보다는, 지금이라도 이들이 자기 명령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끝까지 거역하고 죽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보다, 그 많은 신하들 앞에서 느부갓네살 자신의 체면과 권위를 훨씬 더 높여 줄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 사람들은 여전히 그 명령에 대하여 일고의 여지조차 보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아예 한술 더 떠서 "느부갓네살이여"라고, '왕'이라는 호칭조차 붙이지 않고 부르면서, 그런 제의에 대답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는다고 간단히 일축했습니다.
  그리고는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라는 느부갓네살의 도전에 대하여 "우리 하나님은 극렬한 풀무불 가운데서라도 능히 우리를 건져내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맞받아치면서 오히려 자기네들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뜻'과 혼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아니할 줄로 아십시오."라고 실로 당당하기 그지없는 증거를 했습니다.
  자기네들을 언제든지 그 무엇으로부터든지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전능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은 그것을 써 주시든지 아니하시든지에는 전혀 상관없이 결코 변함없고 의심할 수 없는 일이라고, 너무나도 멋있는 증거를 그 불신 임금 느부갓네살 앞에서 청산유수처럼 보란 듯이 선포한 것입니다.
  이 세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반드시 풀무불에서 건져냄을 받아야만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하나님 이름을 증거한 일에 대한 체면이 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으실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믿는 마음에는 아무 차이가 없소."라고, 그들이 당할 일에는 전혀 상관없이 그 불신 임금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만을 끝까지 높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불신자 앞에서 전도할 때 그와 같은 당당한 자세를 지키고 있습니까?
  신자가 전도할 때 가질 수 있는 대표적인 오해 중에 하나는, 자신의 삶이 만사형통해야만 상대방을 설득시킬 근거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있는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잘되어 나가야만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 소위 말에 힘이 들어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반면에 예수 믿는다는 자신에게 환난과 시험이 생기고 점점 더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게 될 때면 불신자에게 전도하기는커녕 부끄러워 얼굴도 못 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되기 쉽겠지만 사실은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자신이 시험과 환난을 극도로 당하는 중에서도 오히려 더욱 강하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가 보기에는 하나님을 증거하기는커녕 저주라도 할 만한 지경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충성심에 변함이 없는 자세를 보여주게 되면, 그 불신자는 더욱 큰 자극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하고 육신에 병이 있고 집안에 큰 환난을 당하게 될 때, 주변의 이웃들은 마치 욥의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욕이라도 하고 죽으라."고 말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여러분들이 "당신의 하는 말은 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말과 같습니다."하고,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이십니다."라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 자세를 굳건히 지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죽도록 충성하는' 자세로 전하는 의연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잘될 때뿐 아니라 자기 인생의 주변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상황에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호를 더욱 당당하게 증거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자는 환난이 최악의 절망 상태에 이른다 해도 그럴수록 더욱 가까이 다가와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요지부동의 신앙 고집쟁이 세 사람들은 드디어 갈 때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헤어날 길 없어 보이는 풀무불 속에서 실로 의외의 '네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본문 19절로 30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배나 뜨겁게 하라하고 /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 /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당시 바벨론 제국에는 벽돌을 굽거나 대장간 작업을 위한 풀무가 있었습니다.
  돌이 귀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풀무 역시 벽돌로 만들어졌고 주로 석탄을 화력으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 풀무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는 느부갓네살의 명령은 이미 분기탱천할 대로 터진 그의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을 반영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불의 온도를 일곱 배나 올릴 수는 없었을 것이고, 또 사실 불의 온도를 올리면 올릴수록 화형당하는 자는 더 고통의 시간을 줄이고 죽을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은 이성적인 명령은 아닌 것입니다.
  하여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풀무에 던져졌고, 그 불의 뜨겁기가 얼마나 세었던지 그들을 던져 넣느라고 불 가까이 다가갔던 군인들이 다 타 죽을 정도였습니다.

  바로 그런 후에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는 희한한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격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이 세 사람이 유유자적하게 다니고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네 번째 사람이 하나 더 나타나서 그들과 함께 불 가운데에서 다니고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네째 사람의 모습이 "신들의 아들과도 같다"라고 말했고 또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네째 사람은 바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셨음이 분명합니다.
  신약에서 성육신하기 이전부터 성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처럼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자'란 이름으로 여러 번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 사람들은 풀무불이라는 갈 데까지 간 자리에서, 사람이 보기에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기에도 늦어도 너무 늦어 보이는 그 절망의 끝머리에서, 이제는 그저 순교할 길 밖에 남지 않아 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놀랍게도 성자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풀무불에 데이지 않게 하시는 정도로도 충분히 그들의 구원해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것만 해도 이 세 사람에게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정도만 가지고서는 마음에 차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믿기를, 혹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풀무물 가운데서 순교의 제물로 받아들이셨다 하더라도 그 네째 사람은 여전히 그 풀무불 가운데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게 될 때 그는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역시 혹 그 풀무불 가운데서 죽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그 불 속에서 그 네째 사람으로 나타나신 성자 하나님을 뵈옵는 가운데서 기쁘게 순교했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최악의 시험을 당하고서도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변치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그 풀무불 가운데 그냥 혼자 버려둘 수 없으셨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렵고 힘들다고 여겨질 때, 어쩌면 하나님이 가장 멀리 계신다고 여겨질 만한 바로 그 장소 그 때야말로 참된 신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환난과 고통이 신자들을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불신자들의 지레짐작에 불과합니다.
  신자는 배고픔을 당할 때 오히려 그 때문에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혈육이 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심정이 미어지는 듯이 아플 때, 우리는 바로 그 때문에 참된 의원되신 예수님께 더욱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오해를 받고 질투의 대상이 되고 미움을 당하게 되어 이 세상이 싸늘하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우리는 바로 그 세상의 차가운 풍랑 인하여 우리의 친구 되시고 신랑 되시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더욱 빨리 더욱 가깝게 안기려 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신자를 결코 혼자 내버려두시는 법이 없습니다.
  돌멩이 맞는 자리에까지, 풀무불이 타오르는 불꽃 속까지 찾아가셨던 주님께서 어찌 성도가 고통당하는 자리 중에서 힘들거나 귀찮으시다가 찾아와 주지 않으실 곳이 있겠습니까?
  예수 믿은 후에도 여전히 환난 시험이 있는 까닭에 신자는 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더욱 주님만을 의지하고 가까이하게 되는 줄을 깨닫고, 인생의 어려운 일, 괴로운, 슬픈 일을 당할 때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줄에 더욱 튼튼하게 묶이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당한 일은 언뜻 보기에는 신앙의 파선으로 가기 십상인 길처럼만 보였습니다.
  계명의 말씀을 지켜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심히 고민스러울 것처럼 보였습니다.
  불신자 앞에서 신자라는 사람이 완전히 망신당할 수밖에 없는 자리처럼만 보였습니다.
  아니 최소한 하나님 이름 욕이라도 한번 하고 죽어도 여전히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 처지처럼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오직 불신자의 눈에 보이는 상황이요 영적 비관론자의 수준에서 판단하는 말들일 뿐입니다.

  참된 신자에게는 그 어떤 딜레마처럼 보이는 시험을 당하더라도 항상 간단하고도 분명한 답, 끝까지 하나님 살아 계심을 믿고 그 계명을 순종하는 단 하나의 선택만 있을 뿐입니다.
  참된 신자는 예수님 믿다가 설사 순교까지 당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까지도 오직 하나님 이름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회로 삼을 줄 압니다.
  참된 신자는 남이 보기에는 신앙생활 더 이상 영위할 여력이나 이유가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러도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가까워지는 신비한 체험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삶입니까?
  이처럼 기독신자의 낙관적이고도 긍정적인 자세는 그저 머릿속의 사고(思考)에서만 그치지 않고 문자 그대로 전화위복, 그야말로 화처럼 보이는 일들을 복으로 바꾸어 버리는 일대 역전의 승리를 거두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새해 2006년에도 잘 믿는 신자를 시험하고 축복받는 교회를 시기하는 사단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환난을 당할 때에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비명을 지르는 못난이가 되지 말고,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라고 찬송함으로써, 늘 '이 세 사람들'과 동행해 주시는 '그 네째 사람'의 은총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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