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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직헌신예배]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벧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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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삶

사람을 동물로 비유하여 분류하면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개형과 고양이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잘 따릅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 때문입니다. 개는 주인이 아홉 번 잘못하다가도 자신에게 잘해준 것이 한번 있으면 그 한번의 잘해준 것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억이 개로 하여금 사람을 잘 따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아홉 번 사람이 잘 해주다가 한번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 한번을 기억하고 그 기억이 사람을 잘 따르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실상은 고양이에게 개보다 더 많이 잘 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양이는 사람을 잘 따르지 않습니다. 이런 구분은 실제 개와 고양이를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말과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번의 사랑을 받고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 번의 큰사랑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사람을 나누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과 상처를 기억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대개는 사람들이 사랑을 기억하기보다는 상처를 기억합니다. 사랑은 금방 잃어버리면서 상처는 오래 기억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받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사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는 은혜를 맡은 자들입니다.

눈높이를 높이라

하나님은 이사야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9)

키가 똑같은 두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한 사람의 성장이 뚝 그쳤습니다. 반면 친구는 계속 성장해 갔습니다. 그는 친구를 가리켜 ‘키다리'라 불렀고 키다리는 그를 가리켜‘난쟁이’라 불렀습니다. 화가 난 난쟁이는 선생님을 찾아가 울분을 털어놓으며 말했습니다.“선생님! 저는 난쟁이가 아닙니다. 그가 너무 커버린 겁니다. 그를 키다리라고 부르는 것은 괜찮지만 저를 난쟁이라 부르는 것은 당치 않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이 말했습니다.“네 생각은 틀렸단다. 키다리 친구는 나날이 자라나니까 키다리가 아니란다. 나날이 성장하는 것이 정상인데 자라지 않은 네가 난쟁이인 셈이지. 물은 흐르고 있는데 제자리에 물고기가 그대로 떠 있다고 생각해보렴. 물이 흐르는 만큼 그 물고기는 떠내려가고 있는 게 아니겠니? 사람도 마찬가지란다. 제자리에 멈춰 있으면 난쟁이가 되고 되는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크는 것은 키다리가 아니라 정상인 것이란다”

자신의 눈높이에서 보면 자기보다 큰 사람은 다 키다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간간이 우리는 내가 자라지 않았음은 생각지 않고 내 잣대에 다른 사람들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중심의 핑계입니다. 현재 나는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영화‘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면 웰튼아카데미 고등학교의 교사인 존 키팅이 학생들에게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책상 위로 올라서라는 장면이 있습니다. 반 학생 모두가 책상 위로 올라서고 그들은 또 다른 관점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라는 선생의 충고를 듣게 됩니다. 자신의 키 높이밖에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학교 운동장이 무척 커 보였는데 어른이 돼서 보니까 조그마한 경우라든지, 작았을 때는 무척 높아 보였던 것이 커서는 만만해 보이는 것은 바라보는 위치, 지점에 따라 달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눈높이를 올려야 합니다. 내 믿음의 키를 높여가야 합니다. 어느새 자라나서 나도 모르게 우뚝 서있는, 그래서 전에는 무섭고 두렵고 힘들었던 것들이 이제는 자신 있고 여유 있는 것들이 되도록 주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주님의 높은 생각에 내 생각과 삶을 맞추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면서 제법 은혜 받은 분량이 많이 채워져간다면 우리의 받은 은혜의 분량으로, 아니 우리에게 은혜를 맡겨주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청지기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생일이 둘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우리들이 가지는 생년월일이라고 하는 것,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바로 그 날이 우리의 생일이 될 것이고, 또한 두 번째 생일은 나의 존재의 이유와 생이 주어진 목적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나는 왜 세상에 존재하나, 나는 무엇을 위하여 이 땅에 보냄을 받았는가, 그 의미를 깨닫는 바로 그 날이 두 번째 생일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 번째 생일을 맞지 못하고 사람다운 인생을 출발도 못하고 끝나는 그러한 유감 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그 섭리를 믿습니다. 그 거룩한 경륜 속에 내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 큰 역사 속에 나라고 하는 작은 존재가 꼭 필요합니다.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사명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고생도 하고 이런 일 저런 일도 있었고 실패와 성공, 배신과 신뢰,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런 것들이 버려진 과거이거나 잘못된 과거입니까? 적어도 소명을 아는 사람은 바로 이 시간을 위하여 지난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듣는 순간 그는 지난날의 80 년의 생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왜 바로의 궁전에서 40년을 살았는가? 왜 광야에서 40년의 목자생활을 했는가? 이 모든 것이 합쳐서 오늘을 위하여 그리고 내일을 위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거기서부터 나라고 하는 존재의 새로운 생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생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어진 생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나게 해서 내가 태어난 것일 뿐이지 내가 아버지 어머니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시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어진 생을 던져진 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각각 주어진 은사가 있습니다. 여기 소명이 있고 사명이 있는 겁니다. 무엇인가 할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해야만 되도록 은혜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위하여 주께서는 많은 은사와 은혜의 선물을 주셨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오이코노모스, 청지기라는 말은 옛날 번역에는 집사라고 번역을 하는데 이 집사는 타율성이 있고 자율성이 있습니다. 집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주인을 위한 겁니다. 주인이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주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인이 맡겨 준 것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영역을 맡게 되는데, 재산도 심지어는 하인도 혹은 어떤 권력도 맡겨주었습니다. 그 한계 안에서는 자율적이고 그는 자유합니다. 자기의 책임을 자율적으로 감당해야되는데 이것이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가 곧 이제는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오늘은 소중한 결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서로' 라고 하는 말이 세 번 있습니다. 서로! 서로 서로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서로'라고 하는 관계는 이것이 서로 하나의 큰 계약적 관계이지 인간적 관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관계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원인이 아닙니다. 결과일 뿐입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했고 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근거해서 우리는 그 결과로 서로 사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받았다' 하는 것은 은혜요, '사랑하라' 하는 것은 바로 은사인 것입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8)
마지막 시대 특징 중에 하나는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형태는 있으되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요 자기 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인 알프렛 아들러에게 우울증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의사는 그 여자 환경을 조사해 보았지만 나쁜 데가 없는 유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의사는 두 주간 복용할 약을 처방해 주면서 말하기를 이 약을 복용하면서 꼭 지켜야 할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두 주일동안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 이것을 열심히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사랑해 주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 환자가 그 의사의 말대로 그대로 했더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증은 치료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사랑을 받지 못하면 정신적으로 병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의 반쪽만 본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큰 병이 됩니다. 진정한 사랑의 힘이란 내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꽃이 있다고 아무나 꽃꽂이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대상이 있다고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심리학의 대가인 에릭 프롬은 사랑은 "The art of Love" 기술 혹은 예술이라고 했습니다. 시대의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버려져 있는 못쓴 대리석을 보면서 저기 천사가 하나 버려져있다고 했습니다. 울퉁불퉁한 대리석처럼 아무리 쓸모 없는 돌이라도 미켈란젤로의 손에만 가면 작품이 되어지는 것은 그가 기술자요 예술가이기 때문입니다.

참 사랑은 주고받는 Give and Take" 가 아닙니다. Give and Give 주고 또 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가 사랑을 안 알아준다고 사랑 안 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보통 암과 같은 중병은 스트레스로 생긴 병입니다. 우리말로 화병이고 한이 맺힌 병입니다. 그런 병은 어떤 종류의 약을 먹어도 안 듣습니다. 그런데 그런 환자에게 "나는 당신을 정말로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의 사랑이 필요합니다"라는 말을 하루에도 수 백 번 6개월만 해보십시오. 그 암세포가 떨어져 나가는가 안 나가는가?

오늘 본문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그 '열심히' 라는 말을 헬라 원문대로 좀 소개하고 싶습니다. '엑테네' 라고 하는 말인데요 이 말은 '잡아늘인다' 하는 뜻입니다. 그냥 보통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고 잡아늘이는 것입니다. 고무줄이나 스프링을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잡아늘이는 것을 말합니다.

경마로 쓰여지는 말은 그 말이 가지고있는 자기 능력이 있는데 이것을 극대화하려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잠을 재우고 훈련을 시키고 운동을 시키고 잘 다루었다가 경마장에 나가는 날 이걸 타고 나갈 때 그 잘 달리는 말을 또 때립니다. 계속 때리면서 그 능력을 극대화하고 그 능력을 잡아늘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의 영역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얼마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영역, 사랑의 힘을 잡아늘이다 보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하는 말씀처럼 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허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참 뜨겁게 사랑할 때, 정신 없이 사랑할 때, 추운 것도 모르고 더운 것도 모르고, 뭐 작으면 작은 대로 좋고, 크면 큰 대로 좋고, 실수하면 실수하는 대로 예쁘고, 그냥 무턱대고 마냥 좋기만 한 때가 있었다면 이것이 바로 사랑이 잡아 늘여진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허물이란 없고 실수도 없고 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열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피곤함이 없고 허물이 보이질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예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그런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이 「사랑의 네 단계」를 말합니다. 하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랑. 어린아이는 사랑 받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사랑 받고 사랑하는 그것이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사랑 받고 사랑해야겠는데 받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유치한 사람은 이렇습니다. 그런가하면 성숙한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자기 사랑으로 상대방을 덮기에 이유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하는 논리가 있습니다. 내게 필요하니까, 혼자살기 힘드니까, 내가 필요해서 남을 사랑하는, 극히 율법적이고 계약적이고 아주 실리적인 그런 사랑을 말합니다. 이런 사랑을 에로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숙한 사람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가 내게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대상으로 필요해요. 그가 나에게 어떻게 대하느냐는 상관이 없어요. 나는 너를 사랑함으로만 내 삶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없으면 내가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사랑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두 번째는 서로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대접한다는 말, '필록스세노이'라고 하는 헬라말을 설명하면 '필로' 라는 말은 사랑이라고 하는 말이고, '세노이'라는 말은 행동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번역할 때 호스피탈리티(Hospotality) 라고 번역합니다. 말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대접하는 것입니다. 음식도 대접하고 여러 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자가 필요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는 것을 말하고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대접이라는 것입니다. 행동적 사랑을 말합니다.

12세기의 수도사였던 꼴레르보 버나드라고 하는 분이 「하나님의 사랑」(The Love of God) 라고 하는 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우리가 시험에 빠지고 유혹에 빠지는 수가 있다"고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인데, 첫째는 실망입니다. 여러분, 참사랑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실망했다면 당신의 사랑은 거짓말이요 그건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무한하게 무한한 미래를 바라봅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들'이라고 하는 책에서 미국의 11대 대통령인 그를 대통령 되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들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하는 중에 그런 말을 합니다. 그 어머니들은 낙심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실수를 보면서도 절대로 실망하지 않았고 사랑의 실천을 현실로 보여주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고 자선사업을 하고, 그런 것들을 보여주었고 실천했습니다. 그것이 다른 점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며 절대로 사랑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쉽게 실망하는 것, 그것은 바로 참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절대로 절망이나 실망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은 사람들의 칭찬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알아주든 말든 칭찬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칭찬 받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병든 사랑이요, 사랑의 시험이요. 또 하나는 위선인 것입니다. 사랑의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습니다. 명예를 좋아하고 야망을 가졌을 때 사랑은 위선으로 빠집니다.

또 하나는 핑계입니다. 참사랑에는 핑계가 없습니다. 하지 말아야 될 이유, 사랑할 수 없는 이유만 생각을 한다면 벌써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없고 어떤 핑계도 없어요. 전적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래서 서로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원망 없이 하라고 했는데, 사랑의 행동에 무슨 원망이 있나요? 대접하는 일에 무슨 원망이 있습니까?

요즘은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한다고 해서 소위 지수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평가지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번 스스로 생각해봅시다. I.Q.를 지능지수, E.Q.를 감성지수, H.Q.를 유머지수, J.Q.를 잔재주 지수, 그런가하면 O.Q., 오버커밍 쿼션트(Overcoming Quotient) 극복하는 지수라는 말이 있는데, 어려운 일들을 넉넉히 극복하는 극복력 지수가 높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 더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S.Q. 봉사지수라고 말할 수 있는데, 당신은 얼마나 봉사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봉사하는 수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서로 대접하라고 성경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이 대접하는 일이 점점 없어져갑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정성을 다하여서 손님을 대접하고 낯선 분들을 대접하고 환자를 방문하고 하는 행동적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서로 봉사하라. 봉사하라는 말은 서비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에 보면,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겼다. 그러므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마땅하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는 세상에 오실 때부터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철저하게 그는 섬기는 자로 오셨고 섬김으로 끝을 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섬김을 받은 자로서 섬기는 자세로 살아갈 것입니다. 크라잉 벨이라고 하는 상담학자가 네 가지 힘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지배력, 공격력, 베푸는 능력, 협력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협력하는 능력,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라(10)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는 것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좀더 참을 걸, 좀더 즐겁게 살 걸, 좀 더 베풀 걸". 봉사는 베푸는 것입니다. 팔을 다쳐 흰 붕대를 오랫동안 감았다가 풀면 그 동안 쓰지 않았기 때문에 팔 힘이 없습니다. 샘터에서 물은 퍼낼 수록 맑은 물이 괴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산 속의 옹달샘은 떨어지는 낙엽에도 물은 곧 썩어버립니다. 아기에게 빨리는 젖은 점점 젖이 더 생기지만 봉사하지 않는 젖은 젖샘이 말라버립니다. 하나님은 사용하는 자에게 더 주시고 사용치 않는 자에게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아 버립니다

우리의 선한 일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봉사를 우리의 섬김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인간의 성공은 은혜를 아는데 있고 은혜를 베푸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아는데 있고 은사를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대접하고 섬기는 삶이 최상의 가치를 사는 길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얼마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를 베풀었느냐가 인간의 삶의 척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얼마를 섬기며 살았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열심으로 사랑하라' 그랬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습니다. 이제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열심으로 사랑하고 구체적으로 대접하고 서로서로 봉사하며 거기서 우리의 삶의 마지막을 가장 아름답게 의미 있게 꽃피워가야 할 것입니다.

물리학에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 있습니다. 의자가 타서 없어진 것 같아도 그 속에 있는 산소, 질소, 탄소와 같은 원소나 원자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봉사 불멸의 법칙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물한 그릇 떠준 것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롱펠로우의 시에는 이런 시가 있습니다.

나는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았네/ 그러나 그 화살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네
나는 천공을 향해 노래를 불렀네/ 그러나 나는 그 노래를 잃어 버렸다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나는 참나무 밑 둥에서 그 화살을 찾았다네
그리고 내가 불렀던 노래는/ 처음부터 끝 구절까지 친구의 가슴속에 숨어있었다네.

오늘 하루를 감동과 감사와 감격으로 시작하고 있는지요? 하는 일에서 감동을 받고 감사가 터지고 감격이 솟아나고 있는지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일에는 감사가 터집니다.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에는 감격이 솟아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감동과 감사와 감격이 없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짜증나고 고달플까요. 감동이 없는 일, 감사가 없는 기도, 감격이 없는 인생, 끔찍하지 않습니까? 감동 없이 일하고 있다면 그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닙니다. 감사 없이 기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른 영성생활이 아닙니다. 감격 없이 일생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중심인 지성소의 문이 열렸을 때 일어나던 감동, 터지던 감사, 솟아오르던 감격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내가 나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나 있음에 뿌리를 박으십시오. 더욱 이 깨달음의 빛을 기억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힘을 느껴보십시오. 그 힘과 빛으로 생각과 느낌으로 나만의 궁극적 관심을 실현해 나아가십시오.

일에 몰두할 때 감동이 일어나고 감동은 일에 더 몰두하게 합니다. 삶에 헌신 할 때 감사가 터지고 감사는 내 삶을 더 헌신케 합니다.

몰두와 헌신, 삶을 감동과 감사와 감격으로 살게 하는 길, 그것이 바로 은혜를 맡은 청지기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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