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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연약함의 담당자 (마 8: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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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장은 예수님께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신 후에 행하신 초기 갈릴리 사역을 다룬 내용입니다. 그 사역이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23절을 보면 그 사역의 성격은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이 말씀은 9:35절에서 그대로 반복되면서 감싸는 구조(inclusio)를 이룹니다.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이 예수님께서 어떻게 가르치시고, 어떻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는지를 말한 것임을 나타내는 당시의 문학기법입니다. 그래서 5-7장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8-9장은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을 통해서 천국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천국의 이상적인 모습만 설교 하지 않으셨습니다. 설교하신 그대로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얻고, 애통한 자가 위로를 얻도록 능력을 행사하셨습니다. 8-9장에 언급된 10종류의 기적 행하심은 크게 3부분으로 묶을 수 있는데, 처음 4가지는 연약함을 담당하심과 관련 있습니다.

1-4절은 문둥병자의 연약함을 담당하심을 보여줍니다. 당시 문둥병자는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보다 더 큰 고통이 따랐습니다. 성경에는 전염성이 강한 지독한 피부병도 포괄적으로 문둥병으로 분류했는데, 그들은 사회적인 활동이나 종교적인 활동에 전여 참여할 수 없었고, 사회에서 철저히 격리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도 함께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사회에서 산채로 매장당한 셈입니다. 좀 더 큰 고통이 또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여선지 미리암(민 12:10), 웃시야 왕(대하 26:19), 엘리사의 종 게하시(왕하 5:27)가 하나님의 징계로 문둥이가 됩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문둥병을 하나님께서 저주로 인식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과 누가 어울리겠습니까? 사회적으로 매장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거부합니다. 저주받은 자로 대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비수처럼 문둥이의 마음을 찔렀을 것입니다.

왕따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생들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언론에 매도당하거나 정치적으로 희생양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몇몇 사람들이 자기에게 향한 비난과 멸시와 조롱을 견딜 수 없고 마음에 파고드는 절망감을 떨칠 수 없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문둥이는 그 보다 더 치명적인 소외를 당했습니다. 왕따도 이런 왕따가 없습니다. 사회에서 버림받고, 가족들에게도 버림받고, 하나님께조차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면 하늘 아래 갈 곳이 없고 쉴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문둥이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수리아 전역까지 널리 퍼졌던 예수님의 소문을 통해 그분이시라면 문둥병도 능히 고쳐줄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의 불안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 같은 자를 영접해 주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고쳐달라고 요청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2)고만 말합니다. 그는 가난한 마음과 애통한 심정으로 주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문둥이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3) 문둥병은 즉시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을 치료해 주실 뿐만 아니라 제사장에게 병 나았음을 보이고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4). 문둥병자는 가족의 품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 전체가 회복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가 회복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의 아픔과 슬픔, 그가 겪은 멸시받음과 저주를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실 때에, 그의 모든 연약함이 예수님께 전가되고 예수님이 주시는 천국의 평안과 기쁨이 그에게 전가되었습니다.

5-13절은 백부장의 종의 연약함을 담당하심을 보여줍니다. 당시 이방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개같이 취급되는 존재였습니다. 또한 종은 주인의 소유물로 여겨지는 시대였기 때문에, 병들어 노동력을 상실한 종은 버려지기 예사였습니다. 본문의 종은 병세가 심해서 노동력으로 평가한다면 전혀 무가치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당시 상황에서는 있으나 마나한 정도도 되지 못하고, 없어야 좋을 백해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만 생명을 부지할 수 있고, 스스로 예수님께 나올 수조차 없을 만큼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3자의 부탁에도 기꺼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6)고 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 시로” 하인이 낫게 하셨습니다(8). 보통 당사자의 믿음이 있어야 병 나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 예수님은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백부장의 믿음만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병자의 믿음이 병을 낫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긍휼이 병을 낫게 한 것입니다.

14-15절은 베드로의 장모의 연약함을 담당하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나 아들이나 딸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당신께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10:37). 예수님의 제자로 살려면 가족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해야 하는 것으로 자칫 오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접어두고 당신을 따르게 하셨지만, 친히 그 가족을 돌봐 주셨습니다. 본문의 상황을 보면 아무도 예수님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있는 근심거리를 모른척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인 베드로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대신 담당해 주셨습니다.

16절은 귀신들리고 병든 자의 연약함을 담당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네 부류의 기적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께서 인생들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로 말미암는 병도 있지만, 모든 병이 특정한 죄 때문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질병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각색 병자들이 고침을 받은 것은 그곳에 천국의 통치가 시작된 결과입니다.

사람은 강한척해도 근본적으로 연약함 때문에 신음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인간은 문둥병자처럼 죄의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죄가 인격을 망치고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부패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 죄를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결심을 하고 죄를 버려도 금단 현상처럼 금방 죄가 못 견디게 그리워집니다. 죄의 영향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고 무력한 중풍병자가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죄의 자리를 떨치고 일어서지 못합니다. 또 인간은 모두 죽음의 열병을 앓고 있는 여인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모습처럼 아름답고 거룩하게 살고 싶지만 아무리 원해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점 잡히지 않으려고 연약함을 감추지만, 그럴수록 그 마음속에는 있는 광인은 미칠 듯이 발광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원해도 깨끗하게 될 수 없었던 문둥병자처럼, 주인이 아무리 원해도 일어설 수 없었던 중풍병자처럼, 가족이 아무리 원해도 나음 받을 수 없었던 베드로의 장모처럼, 그리고 아무리 원하고 원해도 고침 받지 못했던 광인과 병자들처럼, 인간 스스로는 죄의 비참한 상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죄가 사로잡는 만큼 죄가 시키는 대로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연약함 속에 있는 인간을 누가 건지셨습니까?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장당한 사람을 누가 회복시키셨습니까? 불치의 병속에 신음하는 사람을 누가 구원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버림받은 문둥이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저주받은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중풍병자의 고통과 슬픔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중년 여인의 열병도 담당하셨습니다.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며 병든 자를 다 고치셨습니다(16).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은 은혜를 베푸셨고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누구보다 연약했던 사람들이 강건함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 하면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11:5).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은 것은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되었던 구원자이심을 나타냅니다. 백부장을 통해서도 그분은 존경의 차원을 넘어서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수천 키로 떨어진 곳에서도 백부장을 순종케 하는 로마 황제보다, 말씀 한마디로 중풍병자를 낫게 하시는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도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임을 과시하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병에서 나았다는 것을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했습니다(4). 그러나 그분이 통치하시는 곳에는 기적의 역사는 어떤 모양으로든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천국을 통치하시는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에게나 선포되지만 그 나라를 누리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나 권세 있는 자나, 자신의 혈통과 신분을 자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애통해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가 천국을 누립니다. 문둥병자나 백부장은 단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용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이 칭찬을 받은 것은 예수님의 권세를 바르게 알고, 예수님의 본질에 합당하게 대우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의 간구를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바른 태도가 있는 곳에서 발견됩니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나 태도가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사람은 그만큼 예수님을 바르게 대하게 되고, 그 믿음만큼 천국을 풍성하게 누립니다. 우리 시대는 예수님보다 기적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분보다 그 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이런 시대에 연약함의 담당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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