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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사 55:7~13, 빌 4:4~9, 요 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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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55:7 ~ 13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참으로 너희는 기뻐하면서 바빌론을 떠날 것이며, 평안히 인도받아 나아올 것이다. 산과 언덕이 너희 앞에서 소리 높여 노래하며,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다.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는 잣나무가 자랄 것이며, 찔레나무가 자라던 곳에는 화석류가 자랄 것이다. 이것은 영원토록 남아 있어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증언할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빌립보서 4:4 ~ 9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요한복음서 9:1 ~ 7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주님은 이미 2000년 전에 오셨고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세상은 여전히 절망의 어두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기아는 계속되고,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속이고 죽이면서 자기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급급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나의 봉사와 나의 노력과 나의 기도와 나의 예배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체성에의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가난한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너무나 배고파서 동네에 있는 양 한 마리를 훔쳤는데, 도둑질이 어눌해서 이내 주인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매를 흠씬 때리고 그것도 모자라 두 형제의 이마에 화인을 찍었습니다. 양도둑, sheep thief의 약자인 St라고 하는 인서를 찍은 것입니다. 너무나 창피한 나머지, 형은 동생에게 마을을 떠나자고 이야기했고 그러나 갈 곳이 딱히 없었던 동생은 형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형만 그 마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동네를 떠난 형의 소식은 바람결에 가끔 들려왔지만,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내 사라졌습니다. 반면 동생은 마을에서 묵묵하게 살아갔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그저 열심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지가 처지인지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주로 하게 되었으며, 친절을 베풀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라고 용납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자 인근 마을 사람들이 그 마을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끔은 아주 멀리서도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마을에 있는 그 성자를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마을에 도착하면 산이나 서원으로 제일 먼저 향했습니다. 성자는 산이나 서원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자는 늘 마을길에 서 있었으며, 그 이마에 saint의 약자인 st라는 이니셜이 찍혀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덧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십니다. 성경에서는 그 사람을 ‘앉아서 구걸했던 눈 먼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그의 삶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어제와 똑같이 어두운 오늘만이 존재할 뿐, 내일이란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 약속된 미래란 주면 먹고 안주면 굶는 나날 뿐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이 그 앞을 지나가십니다. 주님은 늘 이럴 때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 앞이 캄캄하고 내일이 존재하지 않다고 좌절했을 때에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제자들은 눈 먼 사람을 보고 예수께 질문을 드립니다. 이 사람이 눈이 멀게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질병은 바로 죄의 결과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질문은 눈 먼 사람, 본인이 던지고 싶은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주님, 왜 저의 인생은 늘 춥고 어둡습니까. 왜 저는 이렇게 비루한 인생으로 태어났습니까. 제가 무슨 죄를 그토록 지었단 말입니까. 저에게 봄의 희망과 여름의 푸르름과 가을의 결실은 언제 찾아온단 말입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중요한 내용 하나를 잊었습니다. 그것은 눈 먼 사람이 왜 이 땅에 왔는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주님, 이 사람이 왜 눈이 멀었습니까”가 아니라, “이 사람이 이 모습으로 이 땅위에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어야 합니다. 과거의 책임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예상과 통념을 완전히 뛰어 넘는 대답을 주십니다. 그것은 누구의 죄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는 것뿐이다.

주님의 대답은 가능성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늘 가능한 선에서의 선택을 한 사람들에 의해서 진보한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에 대한 도전을 한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발전되어 왔으며 세상은 변화되어 왔습니다. 세상은 항상 세상에 이미 존재했던 답을 내어 놓지만 오늘 주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답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은 과거의 결과가 아니라 내일에 대한 확증이라는 답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현재의 어려움을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힘든 삶을 살지라도, 이 모든 것은 나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미래를 축복하신다는 증거라고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왜 어렵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내가 왜 잘 살게 되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오늘 바로 나의 이 모습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고백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눈이 먼 자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보이십니다. 주님은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른 후, 실로암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 만으로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지구상에서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었던 그 불가능에 도전하시면서 주님이 사용하셨던 것은, 진흙, 침, 그리고 말씀뿐이었습니다.

진흙은 우리의 본래 모습입니다. 침은 하잘 것 없음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실로암은 어떤 연못입니까. 신화의 연못이나 전설의 연못이 아닙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연못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는 눈 먼 이에게 바로 그 연못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에게는 잔인한 주문일지 몰라도, 냉정하게는 눈을 뜨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에게 다른 선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나에게 향한 명령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권장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몫은, 다른 사람의 몫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주님과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장 낮은 곳은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않습니다. “낮은 마음”의 소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마음을 가졌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빌립보서의 말씀대로 관용의 삶을 의미합니다. 관용은 epi eikos라는 말로, 겸손과 인내를 의미합니다. 겸손하고 인내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비천이든 풍부이든 궁핍이든 모두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만을 감사함으로 간구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나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 바로 그것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삶이 비천하고 척박하며 너무나 잔인하여 외면하고 싶더라도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나에게 명하신 실로암이라고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요 태도인 것입니다. 나의 길은 비록 암흑이지만, 오늘 주시는 주님의 말씀 속에 희망이 잉태되어 있다고 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될 삶의 태도요 자세입니다. 성서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칭합니다.

오늘 우리가 현실 세계에 던져야 할 질문은 과연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에 의해 과거의 책임과 원인을 묻는 질문입니까, 아니면 나의 내일을 계획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 나에게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질문입니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물어보는가에 따라서 질문하는 사람의 정체성도 같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서에 보면 눈먼 사람은 실로암으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왜라는 질문이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물음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삶의 마지막 장에서도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오직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순종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모든 것을 수용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땅의 절망을 하늘의 소망으로 바꿀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눈 먼 사람은 모든 것을 묵묵히 흘려 보냅니다. 자신의 절망스러운 인생도, 고단하다 못해 처절한 일상도, 제자들의 조롱도, 예수님의 명령도 모두 자신의 삶 속에서 녹여버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이것이 현실에 대한 순응과 포기로 보이겠지만 그는 이것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승화시켜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그 분의 일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은 왜라는 질문을 절대로 던지지 않습니다. 단지 그 길을 갈 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눈으로 이미 미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있기 위해 어제가 있었고, 그리고 내일을 위해 오늘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눈을 뜨는 주님의 역사를 위해 위해 눈감음도, 고단함도, 조롱도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은혜와 감사와 기쁨으로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물음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왜라고 묻지 마시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오늘, 바로 지금이 있었다고 고백합시다. 주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보다 크고 주님의 길은 나의 길보다 높습니다. 우리의 삶의 마침표는 내가 찍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찍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찍으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백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기뻐하고 노래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양 도둑이 성자가 되었던 것처럼, 나의 인생도 이 세상의 가시나무와 찔레나무 대신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나무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 분의 일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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