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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빌 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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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가 시작되면서 아마 달력을 전체적으로 한번씩은 훑어보았을 것입니다. 금년에는 쉬는 날이 그렇게 많지가 않은 것을 봅니다. 구정도 주일로 겹쳤습니다. 추석만 한 주간으로 쉬는 것을 빼고 연휴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기념일을 중심으로 쉬는 날을 정하지만 미국은 주로 월요일을 끼고 공휴일이 있습니다. 물론 추수감사절이나 독립기념일은 다르지만 대부분 월요일을 끼어서 토요일, 주일, 월요일로 이어지는 기념일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런 미국의 공휴일 중에 1월에 가장 먼저 시작되는 기념일은 1월 16일 월요일입니다. 이 날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기념일로 지킵니다. 킹 목사님은 링컨 대통령이후, 흑인과 백인의 인종 갈등이 가장 대립되던 시기에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스물 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흑인의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서른 다섯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세계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가 남긴 명언들과 연설이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가 38세에 암살을 당하기 직전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듯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죽는) 그날이 오면 나의 인생을 남을 돕는 데 바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저는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전쟁 문제에 대해서 올바른 입장을 가지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일생 동안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일생 동안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이런 명언을 남긴 사람인데, 그의 생애가운데 가장 귀한 연설은 1963년 8월 28일, 워싱턴의 링컨 메모리얼 센터 앞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 앞에서 외쳤던 연설입니다. 제목은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 노예후손들과 노예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지금 꿈이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며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크리스천으로서의 꿈과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소원을 가져야 할까요? 오늘은 그것을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소원을 통해 찾으려고 합니다. 여기 그의 소원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여러분과 저의 한해의 소원이 되기를 원합니다.

  첫째, 부끄럽지 않는 삶입니다. 20절에 바울은 그의 꿈과 소원을 기대와 소망으로 말하고, 간절한 기대로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더욱 간절히 이런 삶을 살기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 언급한 것이 바로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이런 기대와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크리스천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라면 우선적으로 품어야 할 소원입니다.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것만큼 귀한 삶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십시오.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웠습니까, 아니면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보통 언제 부끄러워합니까? 이것을 알면 우리가 좀더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수 있다고 봅니다. 두 가지의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죄를 지을 때’입니다. 처음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들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산 나무숲으로 자기들의 모습을 숨겼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이 모습입니다. 사람은 떳떳하다가도 죄만 지으면 고개를 숙이게 되어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가끔 보여주는 죄를 지은 사람을 보면 대부분 고개를 떨구고, 보자기를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자기의 죄가 온 세상 사람에게 노출되는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부끄럽게 됩니다. 죄를 짓고도 떳떳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누구라도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죄의 유혹입니다. 죄의 유혹에서 몸부림치면서 나를 지키고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시편저자처럼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었나이다’하는 고백을 담고 죄를 이겨 부끄럽지 않기를 원합니다.

  또 언제 우리가 부끄러워합니까? 우리의 ‘속이 드러날 때’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살았습니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치부가 드러나고, 속을 보여도 부끄럽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로 몸을 가렸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모습가운데 수치심이란 것이 있습니다. 벌거벗으면 수치심을 느끼고 부끄럽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완전히 벌거벗은 채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주님은 온 사람들 앞에서 큰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속이 드러나면 부끄럽게 됩니다. 우리 몸만 드러나도 이렇게 부끄러운데, 우리의 속이 드러나면 더할 나위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자기를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남을 보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살피는 것부터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내 속에서 나오는 악하고 더러운 것을 보고 다스려야 부끄럽지 않게 됩니다. 새해에는 누구보다도 자기를 먼저 살피는 그런 신앙의 놀라운 힘이 있기를 원합니다.

  일제시대 활동했던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생각납니다. 그는 이렇게 자기의 삶을 노래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는 자기를 보는 사람이었고, 늘 부끄럽지 않기를 위해 다짐하며 살았습니다. 새해에 우리 모두 믿는 사람으로서 이런 소원과 꿈을 가지고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다짐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담대한 삶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바울은 그의 기대와 소원을 담대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걸어왔던 삶입니다. 전에도 담대하게 살던 것처럼, 이제도 담대하기를 다짐합니다. 온전히 담대하기를 결단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참으로 필요한 소원입니다.

  담대함의 반대는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두려워합니까? 역시 이것도 두 가지의 경우에 두려움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하나는 ‘죽음의 공포’입니다. 사람이 본질적으로 갖는 여러 가지 두려움 중에 가장 큰 두려움이 죽음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모든 두려움의 현상은 죽음의 공포가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 앞에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불신자만이 아니라, 사실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죽음의 위기가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닥칠 때, 태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911 테러가 날 때, 그래서 비행기가 무섭게 점점 빌딩으로 가까이 갈 때, 당시 비행기에 있던 사람들이 가졌던 공포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휴대폰으로 가족과 교신에서 밝혀진 것처럼, 그들은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으로 가는 그 순간이 더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두려움입니다.

  감사한 것은, 이런 죽음의 공포를 주님이 해결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의 공포에서 우리를 자유 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평안, 평화입니다. 우리 삶에 어떤 경우에도 주님은 우리를 평안하게 하십니다. 그 평안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해동안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평화가, 그 사랑의 물결이 이제와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은 축복의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언제 두려움이 생깁니까? 그것은 삶에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입니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늘 좋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고난이 올 수도 있습니다. 질병의 골짜기, 눈물의 계곡을 통과할 때도 있습니다. 평온하게 지내다가도 이런 일이 닥칠 때 우리는 흔들리고, 떨며, 두려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바로 이런 고난의 때에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아무리 우리 앞에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는 역경이 찾아와도 믿음이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는 힘이 됩니다. 믿는 자의 고난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함을 허락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파할 때 성령님도 함께 탄식합니다. 내가 힘들어할 때 주님은 언제나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내가 고통할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이제 우리 모두 이런 소망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두려움이 없는 용기와 담대함으로 앞을 향하여 힘있게 전진해 나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위한 기대와 소망으로 말씀의 결론을 맺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라는 말을 통해 그의 비장한 각오를 엿보게 됩니다. 오직 자기의 몸에서, 자기의 삶에서 그리스도만이 나타나고,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모습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바울은 이 편지를 감옥에서 쓰고 있습니다. 이미 그는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의 삶이 끝난다고 해도 후회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놀라운 그의 신앙과 고백이 바울을 바울 되게 했고,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오직 주님만 존귀하게 하고, 주님만 높이니까, 주님이 그를 높여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오직 내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 위해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주님의 존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할 수 있습니까? 역시 두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참되고 바르게 살 때’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삶의 현장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환히 비추는 사람이 되고, 소금처럼 부패한 세상에서 썩지 않게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님의 사람으로 바르고 참되게 살면,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내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둡고, 부패하면 결코 주님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국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평가되고 측정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도 어둡습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이 온 세상을 캄캄하게 덮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으로 우리가 나갑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작은 촛불이 된다면 우리 주변을 조금이라도 환하게 할수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도 부패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부패로 냄새나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세상으로 우리가 나갑니다. 만약 이런 세상에서 작은 소금이 된다면 부패한 세상을 썩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은 존귀하게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헌신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향하여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그의 능력으로 하실 일을 다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동참시켜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돌들도 사용하시고, 마른 막대기도 사용하시고, 동물도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천사도 흠모할 아름다운 일을 맡기셨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결코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사용하시려고 이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으면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헌신으로 주님은 결국 존귀하게 되고, 높아지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하나님이 나를 통해 뭔가 역사를 일으킬 때, 뒷짐지고 구경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제로 뛰어들기를 원합니다. 교회를 위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세계와 열방을 위해 하나님은 나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헌신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름 앞에 헌신하며 고백했던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고백이 한해를 시작하는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고 다짐이 되고, 기대와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주시고, 나를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여러분, 바울처럼 우리도 기대와 꿈이 있어야 합니다. 부끄럽지 않는 삶, 담대한 삶,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하는 삶에 대한 꿈입니다. 이런 삶을 다짐하면서 한 주간을 사시고, 2006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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