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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욥의 고난, 왜 그렇게 길었던가? (욥 4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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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고, 한국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정권이 수차례 바뀌는 과정에서도 그 기반을 튼튼히 다져왔습니다. 그런데 그 불사조 같던 삼성이 요즈음 심상치 않습니다.
내부적으로는 'X파일' 문제와 부당한 주식증여로 인해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삼성의 반도체 산업에 대항해서 세계적인 반도체회사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전방위적인 협공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대기업 삼성전자도 263조 정도면 외국인에게 적대적 인수합병(M&A)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집안의 문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 본인은 몇 차례의 암수술을 받은 상태로 해외에서 머무르고 있는 중이고, 얼마 전 유명 연예인 며느리의 이혼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그가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이 미국 유학중 맨해튼의 숙소에서 자살한 안타까운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이 욥이 당한 시련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 보입니다.
욥에게 갑자기 불어 닥친 시련은 처절하기 그지없었고, 처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모든 고난과 시련은 '아직 말할 때에'라는 구절이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비되어 있지도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 고난이라는 불청객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찾아와서 힘들게 합니다.
부자, 가난한 사람, 젊은 사람,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런 측면만 본다면 고난은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꼭 공평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순결한 사람에게나, 죄 있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오기 때문입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고난이 예수 믿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도 가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에게, 인격적인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고난이 찾아왔을 때, 특히 더 큰 아픔과 좌절을 느끼는 것입니다. 즉 고난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습니다.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 재산을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을때에 고향사람들이 그녀의 초라한 행색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자 나오미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사람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만큼 부당한 대우를 받으신 분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고난 앞에서 이러한 태도를 취하신 주님에게 모든 고난은 삼일만에 끝나버렸습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은 왜 그렇게 길었을까요? 욥기 3장에서 끝나야 할 고난이 왜 42장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처음 욥에게 고난이 닥쳤을 때는 신앙으로 잘 대처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연속적으로 닥쳤을때에도 그는 동일하게 믿음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때부터 발생합니다.
욥을 괴롭히던 사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한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욥의 친구들입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 멀리서 달려온 친구들은 분간할 수 없는 욥을 바라보며 가슴아파합니다.
욥의 처한 형편을 보며 뭐라고 위로의 말도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욥은 친구들이 찾아와서 슬퍼하고 위로해 주어서 마음에 커다란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의지하고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한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사탄이 정말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사탄은 지금 뒤로 숨어 있습니다. 그 대신 욥의 절친한 친구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욥의 고난이 왜 그렇게 길었을까요? 욥의 시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 욥은 하나님만 상대하고 하나님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찾아오고, 걱정해주니까 하나님을 향하던 마음이 친구들에게로 향했습니다.
친구들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을 상대했다는 말은 시선을 친구들에게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려 42장까지 욥과 친구들의 지루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고, 욥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친구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한 욥의 고난은 절대 끝날 수 없습니다.
지독할 만큼 친구들과 논쟁하던 욥이 42장에 와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습니다. 그의 상대가 하나님이 되어 있습니다.
친구들을 바라보던 시선을 하나님께 향하고,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욥의 변화가 친구들이 떠나갔기 때문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욥의 주변에 있습니다. 다만 이제 친구들과의 모든 논쟁을 접고 하나님께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그때 욥에게 엄청난 일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니까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던 마음에 대해서 눈물과 회개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친구에게 향하던 시선을 하나님께 옮겼을 때, 바로 그때 욥의 인생에 펼쳐진 그 질기고 긴 고난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고난 앞에서 눈을 주께로 향합니다.
앗수르왕이 유다를 쳐들어와서 항복을 요구하는 장문의 편지를 히스기야에게 주었을 때 히스기야는 주저없이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합니다.
그러자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의 군사 185,000명을 죽여 버립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뜻이 분명함을 전달합니다.
그때 히스기야에게 생명이 연장되는 놀라운 은혜가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시선은 누구를 바라보고,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우리가 사람을 의지하고 바라보면 고난의 사슬은 끊을 수 없습니다.
고난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모든 고난이 해결될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습니까?
이제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면서 그분만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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