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합심기도의 위력 (행 4:23-35)

  • 잡초 잡초
  • 1026
  • 0

첨부 1


기도에는 개인기도와 합심기도가 있습니다. 합심기도란 성도들이 함께 모여 같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마음을 합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두 종류의 기도가 다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합심기도의 위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합심기도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올해 저희 교회의 목표 데로 신앙공동체가 '성령의 임재를 깊이 경험'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올해 언덕 교회가 역점을 둘 두 번 째 실천방안인 수요합심기도와 연결됩니다. 올해 들어 구역이 돌아가면서 수요합심기도를 주관하게 되면서 아주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서 수요합심기도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더욱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이 뜨겁게 합심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결과 다 함께 성령충만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교회공동체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 암담한 시대를 뚫고 나갈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언덕에도 이런 아름다운 일이 일어날 수 있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합심기도를 어떻게 하였기에 이렇게 놀라운 위력이 나타나게 되었는가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사도들이 어려움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22)

베드로와 요한은 어려움을 겪게 되자 즉시 동료들에게로 가서 그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함께 나누었습니다. 여기서 동료들이 정확하게 어떤 사람들을 의미하는지 누가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이어지는 이야기에 별다른 설명이 없이 자연스럽게 교회공동체 전체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 5000여명 전부는 아닐지라도 예루살렘 공동체의 많은 성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합심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합심기도는 교회가 직면한 어려움을 성도들이 함께 나누는 장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체포되어 심문 받았습니다.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엄중히 경고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교회의 앞 길이 결코 평탄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상황을 그들은 자기들 가슴에만 품고 있지 않았습니다. 과감하게 동역자들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몇 일 전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교회에 대한 뜻깊은 비유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라 군함'이라는 것입니다. 유람선의 경우 소수의 항해사들과 일군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승객들은 편하게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반면 군함의 경우 각자 역할은 다르겠지만 승선한 모든 사람들이 전투를 위해 함께 준비하고 전투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교회를 유람선이 아닌 군함으로 간주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여 그들은 그들이 처한 영적 전투상황을 교회공동체에 상세하게 알렸습니다.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갈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교회가 군함이 아니라 유람선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도 사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비롯해 몇몇 사람만 고생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뒷짐지고 편안하게 지내도 교회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그 길을 갈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곰곰이 되씹어 보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을 어려움에 동참시켰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국교회가 몇 사람의 지도자 그룹에 의해 휘둘리게 되면서 온갖 부패의 온상이 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장 궁극적인 책임은 지도자들 자신에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 자신의 책임도 없지 않습니다. 혹시 교회의 힘들고 어려운 사안들은 몇몇 지도자 그룹이 다 알아서 처리하고 우리 자신들은 그저 유람선을 타고 편안히 즐기듯 교회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면 자연히 카리스마를 가지고 성도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지도자를 선호하게 됩니다. 성도들과 함께 책임을 나누어지고 함께 일하려는 사람들은 설자리가 없어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성도들이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한 한국교회의 현실은 별로 낳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언덕교회는 건강한 교회, 일하는 교회를 표방하고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유람선을 타는 기분으로 신앙생활하고 싶은 마음은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우리 언덕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서로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수요합심기도회는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수요합심기도회가 활성화됨으로 말미암아 언덕에 새로운 바람이 힘차게 일어날 수 있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기억했습니다(24-26)

사도들과 예루살렘 성도들은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문제에 짓눌리지도 않았습니다. 문제를 깔고 앉은 셈입니다. 그들은 다 같이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였습니다. 합심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제일 먼저 한 것은 그들의 눈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다시 회상하였습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기억해낸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주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이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크고 높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점을 너무 쉽게 놓칩니다. 저는 일찍이 어려서부터 참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키순서로 번호를 매겼기 때문에 1-2번을 넘어가 본적이 없었죠. 하지만 저는 항상 당당하게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제 친구들이 모두 키가 큰 아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저는 언제나 확신했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런 확신이 제 잠재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려워하면서 지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거나, 머리로만 생각하지 진실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을 수학적 계산이나 과학적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은근히 불안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합리적 사고를 깊이 하면 할수록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더 분명해집니다. 1997년 모 기관이 미국의 생물학자, 물리학자, 수학자들을 대상으로 신앙생활 여부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39%가 신(神)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10명중에 4 명인 격이죠.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그들은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는 신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수학자들의 믿는 비율이 가장 높았다는 점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강하게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유신론자인양 하면서 실제로는 무신론자로 살아가서는 안되겠습니다. 깊은 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 그리고 신앙의 결단을 통해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을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위기의 때, 문제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제일 먼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자이심을 기억합시다. 그 하나님을 힘입어 문제를 제압합시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현재에 부딪힌 상황에 가장 적절한 하나님 말씀을 기억해냄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마음에 새깁니다. 그 말씀은 성령께서 다윗을 통해 쓰게 하신 시편 2:1-2입니다. "어찌하여 이방 민족이 날뛰며, 뭇 백성이 헛된 일을 꾀하였는가? 세상 임금들이 들고일어나고, 통치자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과 그의 메시아에게 대적하였다(25b-26)". 다윗은 세상 권력자들이 메시야에게 대항할 것을 내다 보며 이를 비웃으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통해 현재 상황이 미리 예견된 것임을 받아들임으로 놀랜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적대세력을 가볍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냄으로 두려운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누군가 우리 홈피 기도실에 릭 워렌의 좋은 글을 퍼 날랐습니다. 재인용합니다.

한 문제를 놓고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걱정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생각하면 그것이 묵상이다. 우리가 걱정하는 방법을 안다면 묵상하는 방법은 이미 터득한 것이다. 단지 우리의 관심을 걱정거리에서 성경 구절로 돌리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묵상할수록 우리의 걱정거리는 더 줄어든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바로 이런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걱정거리에 너무 짓눌려 있으면 기도할 힘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 관심이 걱정거리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이동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기도할 힘을 얻게 됩니다. 위기의 때 기도하면서 이렇게 먼저 적절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모든 스포츠의 경우 기본 동작을 꾸준히 반복하는 훈련을 합니다.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몸에 베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야 실전에서 자동적으로 탁월한 동작과 행동이 나옵니다. 언덕의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삶을 소홀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위기 상황에 적절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낼 수 있는 성도님들이 꼭 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래야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3. 구체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27-30)

먼저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아뢰었습니다. "사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한패가 되어, 이 성에 모여서, 주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대적하여, 주님의 권능과 뜻으로 미리 정하여 두신 일들을 모두 행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상황설명을 안 들어도 이미 아십니다. 하지만 이렇게 상황설명을 드리면서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는 아주 구체적인 관계가 되고 깊어집니다. 하여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상황설명을 듣길 원하십니다. 부모의 심정을 생각하면 간단해집니다. 학교를 갖다 온 우리의 자녀가 부모를 본척 만척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꼼짝하지 않으면 얼마나 서운합니까? 그러나 아이들이 주저리주저리 학교에서 있던 일들을 말해주면 얼마나 즐겁습니까?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정보를 캐내는 재미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녀와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합심기도를 할 때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아뢰는 훈련을 쌓아나갑시다. 현재 하나님께 말씀드려야할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은 무엇일까요? 수도 없이 많겠지요? 한가지만 꼬집어서 말하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초대교회를 에워싼 세력이 눈에 보이는 권력자들이었다면, 오늘 한국교회를 둘러싸고 위협하는 세력은 눈에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맘몬 즉 돈입니다. 맘몬은 어떤 때는 하나님과 자신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달콤하게 유혹하고, 어떤 때는 안색을 확 바꾸어 자신을 버리면 기어이 망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공갈협박을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이런 위기 상황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길 바랍니다.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간절히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아룁니다. 그 제목들이 너무 깊고 멋있습니다. 첫째,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란 33절에 잘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의 진리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부활이 무너지면 기독교는 함께 무너지고 부활이 살면 기독교는 함께 삽니다. 부활의 진리는 세상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요 승리의 선포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약한 실패가 아니요, 바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확증합니다. 부활은 세상 권력자와 맘몬을 비롯해 예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은 거짓이며 결국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예수님만이 죽음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영원하신 주님이심을 선언합니다. 세상과 맘몬을 권좌에서 내려오게 합니다. 예수님의 통쾌한 승리를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싫어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싫어하는 주님의 말씀 즉 부활의 진리를 외치려면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그런 담대함은 주님이 주셔야 합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주님의 종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맘몬 앞에 기가 죽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들을 가만히 분석해보면 맘몬의 비위를 맞추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성도들이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가를 감동적으로 선포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삶을 뜨거운 눈물로 책망하고 도전하기보다는 그런 삶을 위로하고 정당화해줍니다. 이 세상에서 실패할 지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정의로운 삶을 살자고 용감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기복신앙과 값싼 은혜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부활의 진리를 전하려면 보통 담대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담대함은 오직 주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의 능력의 손을 뻗치시어 병 낫는 일이 있게 하시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마치 엘리야가 제단에 불이 내려 물에 흠뻑 젖은 제물이 불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과 흡사합니다. 올해 첫 설교에서 같은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올해 들어 언덕 성도님들의 생각과 자세가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여기 저기서 발견하게 되어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나야 할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한국교회가 개혁될 것이라는 전망을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한국교회 개혁은 하나님도 못하실 것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다 나왔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손길을 사모해야 합니다.

4. 합심기도는 위력을 발휘했습니다(31-35)

그들이 합심기도를 마치는 순간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달라고 기도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의 간구한 바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에 틀림없습니다. 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이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많은 수의 사람들의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실천적 사랑으로 똘똘 뭉친 것입니다. 재산과 돈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었습니다. 맘몬에 대한 통쾌한 승리입니다. 모든 재산을 공동의 것으로 여기고 함께 사용한 셈입니다. 어려운 이웃의 형편을 보는 대로 자신의 땅이나 소유를 팔아 그 판 돈을 사도들에게 가져다주면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공정하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들 중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를 트뢸치라는 신학자는 '사랑의 공산주의'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런 합심기도의 위력을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몇 사람의 뛰어난 사람들의 성령충만으론 안됩니다. 그것이 오늘날 소수의 사람들이 교회를 장악하는 병폐를 낳았습니다. 성도들이 다 함께 성령충만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맘몬에 대하여 통쾌한 승리를 거두고 사랑의 공동체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역사를 진정으로 사모합시다. 어떻게 이런 위대한 경험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그 비밀은 성경적으로 바르게 드리는 합심기도에 있습니다. 합심기도의 불을 뜨겁게 일으킵시다! (박득훈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