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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합 왕의 근심 (왕상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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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 관한 애기입니다. 우리가 아합 왕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선지자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싸웠습니다. 그때 거짓 선지자들의 배후엔 아합 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합 왕의 배후엔 그의 부인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은 이방신을 섬기는 두로 왕의 딸입니다. 성경은 아합 왕에 관한 기사를 무려 여섯 장이나 할애하여 기록한 것은 그의 권력이 막강했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시리아와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모두 이겼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전쟁에서 이긴 후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빼앗았다는 얘기입니다. 아마 아합 왕의 별궁이 이즈르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즈르엘은 므깃도와 벧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제런(Zerin)으로 추정되는 성읍입니다. 아합은 자기 별궁 주변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이 탐이 나서 팔기를 요청했으나 나봇이 거절했습니다. 아합이 돈을 주고 사려고 한 것을 보면 그가 나름대로 합리적인 인물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합이 후한 보상을 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봇이 이를 거부한 것은 그 포도원이 선조 대대로 전해 내려온 유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매매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땅을 팔았으면 희년이 되는 해에는 다시 되돌려 받았습니다. 나봇은 율법과 전통에 충실하려는 인물이었습니다. 나봇으로부터 거절당한 아합은 근심하고 답답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침상에 누웠습니다. 마치 투정하는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갖고 싶은 것을 못갖게 하자 심통난 아이처럼 식사를 거절하고 누워버린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는 전혀 성인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마마보이’입니다. 어느 책에 보니 신혼여행가가지고 제 신부한테 매맞고 ‘어마’한테 전화걸었다고 합니다. “엄마, 나 맞았어.”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이런 마마보이가 믿지 않는 여자와 결혼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여자 말 듣고 교회 안나올 것입니다. 폭군의 딸 이세벨과 아합의 결혼은 뻔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이 이스라엘을 덮었던 것입니다. 

침대에 누워있던 아합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은 이세벨이 아합에게 말합니다. 내게 맡기라고 말입니다. 사악한 이세벨이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취하기 위하여 거짓 증인 두 사람을 매수하여 재판정에 세웁니다. 죄목은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봇은 비류들의 거짓 증언에 의하여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들이 나옵니다. 즉, 우상숭배, 교만, 그리고 인권유린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켜 아합에게 말하게 했습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왕상21:19).”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욕심에 의해 죄를 범하고 결국은 죄 때문에 죽음을 면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합 왕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그는 일국의 왕입니다. 전쟁에 승리하여 막대한 권력을 지닌 왕입니다. 조금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직 한 가지를 얻지 못했다하여 근심하다가 엄청난 일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 작은 근심으로 인하여 결국 살인으로 이어지고 자신의 몰락을 자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없으면 세상 것 다 소유해도 거기에 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소유보다 더 귀한 것이 자세(attitude)입니다. 전에 중국 연길에 있는 장사가 잘된다는 냉면집에서 냉면을 먹는데 비닐 포장지로 싼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그 비닐 포장지에 이런 문구가 파란색으로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만족하시면 친구에게 알려 주시고 문제점을 발견하시면 저희들에게 알려 주세요.” 생각할수록 뜻깊고 의미 있는 문구였습니다. 맛이 있고 만족하면 친구들에게 널리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점을 발견하면 우리들에게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즉 단점이 발견되시면 밖에다 나팔불고 다지지 말고 우리에게 직접 알려 주시면 즉시 고치고 시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냉면집이 잘되는 것 같았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부자 되는 자세가 준비되어 있기에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혼다 켄이 쓴 <부자가 되려면 부자에게 점심을 사라>란 책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해가 좀 안되는 제목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점심을 사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부자에게 점심을 사라는 말은 부자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부자에게 점심을 사면서 부자에게서 배울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자세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서울대학교 없애려 말고 서울대학교 수준의 학교를 더 만들면 됩니다. 미국에도 한국의 서울대학교와 같은 하버드대학교가 동부에 있습니다. 동부에 하버드대학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비슷한 수준의 대학교가 여럿이나 됩니다. 그리고 북부엔 시카고대학교를 세웠고, 서부엔 스탠포드대학교를 세웠고, 남부엔 듀크대학교를 세웠습니다.

요즘 'win-win'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바로 모두 함께 잘 사는 것입니다.  어느 회사에 새로운 사원들을 뽑기 위한 입사시험이 있었습니다. 그 입사시험에 났던 문제인데 여러분들도 다같이 답안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청년이 혼자 비 오는 날 저녁에 자동차를 몰고 작은 마을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가다가 정류장에 세 사람이 아주 초조하게 비를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차를 세워 놓고 보니 한 사람은 막 죽어가는 할머니였고, 또 한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살려준 의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청년이 사모하고 있던 예쁜 아가시였습니다. 청년이 몰고 가던 자동차는 스포츠 카였기 때문에 좌석은 하나뿐입니다. 당신이라면 누굴 태우겠습니까?”하는 문제였습니다. 200명의 응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답을 썼는데 그가 합격되었습니다. 답을 이렇게 썼습니다. “내 자동차의 키를 의사에게 주고 아픈 할머니를 좌석에 모시고 병원에 가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우산을 들고 내려 예쁜 아가시와 데이트를 하겠습니다.” 남도 살리고 자기 소원도 이루어지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만 우리가 사는 삶에서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두 다 함께 잘 사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또,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금실 좋은 부부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 격으로 남편이 폐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가산을 탕진해서라도 남편의 병을 고치려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병은 점점 더 깊어만 갔습니다. 죽음을 앞에 놓은 남편이 곰곰이 생각하니 저렇게 예쁜 아내를 두고 죽는 것이 억울했습니다. 아내의 손을 잡고 “ 나 죽으면 재가 하겠소?”하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펄쩍 뛰면서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 핀잔을 주면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접고 병에서 빨리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며칠 못가서 또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내는 특별히 눈과 코가 예뻤습니다.  예쁜 아내를 동네 남자들이 그냥 둘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아내는 조용히 부엌에 들어가 부엌칼로 코를 베었습니다. 콧구멍이 훤히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들어가서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안심이 되오. 이제 코 없는 년을 누가 데려간단 말이오.” 그런데 웬일입니까. 몇 개월 못산다는 남편이 죽질 않고 살아난 것입니다. 병세가 호전되었습니다. 얼마를 살다보니 아내의 코 없는 얼굴이 보기가 싫고 코먹어리 소리가 듣기 싫어졌습니다. 그럴 때 마다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는 줄 알고 자기 스스로 나무라기도 수없이 했지만 그 생각은 잠깐이요 보기 싫은 것은 오래였습니다. 그때부터 아내를 구박하고 술집 여자를 가까이 했습니다. 아내는 분해서 고을 원님에게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그것을 본 원님은 남편을 데려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들이, 저놈의 코를 당장 베어버리라.” 그랬더니 남편이 부인에게 “당신도 코 없고 나도 코 없으니 우리는 천생연분이야”하면서 사이좋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왜 낮은 수준으로 맞추어 살아야 합니까? 낮은 수준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잘 사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인생은 자세입니다.

아합 왕은 나봇을 죽이고 난 후 세 번째 시리아와 전쟁을 치릅니다. 이번에는 남쪽  유다와 연합해서 시리아를 쳤습니다. 그러면 더 쉽게 이길 것 같았습니다.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이  아합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른 선지자 미가야는 승산이 없다고 반대했습니다. 아합은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출전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 선지자의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변장하고 군중 속에 자신을 감췄습니다. 자신의 고유 신분을 상징하는 왕복을 벗어버리고 평범한 군인으로 변장한 것입니다.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을 그 자리에서 무시하였으나 아합은 내심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나름대로 예방책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의 최후는 어이없게 찾아왔습니다. 한 병사가 우연히 아무렇게나 쏘아 댄 화살 하나가 아합을 맞춘 것입니다. 그것도 가슴을 막고 있는 갑옷의 이음새를 파고 들어가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적의 눈은 속였으나 하나님의 눈은 속이지 못한 것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마련한 보호막 속으로 자신을 숨겼지만 끝내 하나님의 시선을 속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허술한 보호막 속에 자신을 가리고 살아갑니다. 군중 속에 몸을 담긴 아합처럼 익명의 다수로 구성된 세속적 습관에 적당히 자신을 실은 채로 하나님과 직면하기를 꺼려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분리된 영혼은 그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로는 참된 안전을 얻지 못합니다. 언제고 갑옷 솔기를 파고드는 화살처럼 살의 충격이 그의 영육을 뚫고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정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겸손히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김인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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