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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전도회헌신예배] 걱정은 내 친구!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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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3절).” 평소에 우리가 즐겨 외우는 말씀입니다. 이 두 문장을 이어주는 “그리하면” 은 참으로 매력있게 들리는 접속사 (Konjunktion)입니다. “만일 ... 한다면” 이라는 뜻을 지닌 이 접속사에 바탕하여 본문을 읽으면,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가장 먼저 구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도 채우시고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아주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함정이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렇게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 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생활에서 축복을 받는 조건처럼 들립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자칫하면 기복신앙, 곧 만사형통하는 인생의 비결로 가볍게 취급될 우려가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 자체를 믿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들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한글성서들이 이 부분을 “그리하면” (앞의 구절을 조건절처럼 해석하여) 이라고 옮긴 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영어 KJV번역: Seek ye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unto you; 독일어 Elbefelder 번역: Trachtet aber zuerst nach dem Reich Gottes und nach seiner Gerechtigkeit, und dies alles wird euch hinzugefügt werden). 아마 앞문장은 능동문이고, 뒤문장은 수동문이기에 “그리고” 라는 말로 연결하기가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이렇게 옮긴 듯합니다. 만일에 뒷문장을 앞문장과 같이 능동문으로 바꾸어 읽으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고 하나님 (너희의 하늘 아버지) 께서 이 모든 것들(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다.”

이렇게 앞문장의 주어를 사람으로, 뒷문장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의식하며 읽으면, 뜻이 분명해집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 은 하나님을 향해 사람이 해야 할 몫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먹고 마시고 입을 것” 곧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을 채워주시는 것은 사람을 향해 하나님께서 하실 몫입니다. 본문 25-32절에 새와 들꽃 (들풀) 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 나란히 기록된 것을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결론에 쉽게 이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 문장이 “그리고” 로 이어지면서, 사람이 행할 것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구별하여 나란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병렬법). 이 구별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칫하면, 신앙의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게 됩니다.

“무엇이든 큰 일을 앞두고 있으면, 저는 다른 것에 신경을 하나도 쓸 수 없어요, 다른 일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마치 온 세상과 제 자신이 그 일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답니다.”

사람들이 큰 일이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와지며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6,25-34절은 큰 일이나 중요한 일을 앞둔 사람에게 위로와 힘을 주시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여기에 “걱정”이라는 단어가 6번 되풀이 나옵니다 (25. 27. 28. 31. 34x2). 특히 25절, 31절과 34절은 “걱정하지 말아라” 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우리말로는 어법상 이 단어가 뒤로 갔으나, 그리이스어 원문에는 강조하는 뜻으로 이 단어가 문장 맨 앞에 씌였습니다. 여기서 걱정한다 (메림나오) 는 말은 “분열되다, 나뉘다” 는 뜻을 가진 말 “메리조” 와 “생각하다, 기억하다, 추구하다” 라는 뜻을 지닌 말 (음나오마이) 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이 말은 “생각이 흩뜨러지다, 목표가 나뉘어지다” 는 뜻입니다. 지나친 근심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상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마음을 집중해 나아가야 하는 데,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생각하느라 정신이 혼란스러운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지나친 걱정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장애를 가져다 줍니다. 위궤양, 피부염증, 신경쇠약 그리고 불치의 병 등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키는 것이 걱정입니다. 그리고 지나친 걱정은 몸과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생활의 의욕과 생동감을 빼앗아갑니다. 걱정하는 사람은 조바심을 느낍니다. 마음을 졸이게 됩니다. 사람이 일을 하면서 조바심을 내고, 마음을 졸이면, 엉뚱한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걱정과 염려로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정작 해야 할 중요한 일, 이루어야 할 소중한 일에 필요한 에너지를 엉뚱한 데 소모해 버립니다 (누가 10,41).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마가 4,18-19). 세상 일에 지나치게 염려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활과 신앙에서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구약 잠언은 걱정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15,13: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
17,22: 즐거운 마음은 건강을 좋게 하고, 기가 꺾인 정신은 뼈를 말린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사항을 구체적으로 짚어 주셨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우리 조상들도 옛날부터 말해 왔습니다: “제 먹을 몫은 제가 타고 난다”. 이런 사항을 알기 쉽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공중나는 새를 보라” 말씀하셨으며,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고 일러 주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세심하게 돌보시는가를 나타내는 표현이 본문에 두 번 나옵니다: “너희의 하늘 아버지” (26. 32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 이 바탕 위에서 오늘 본문에는 다섯가지 물음이 나옵니다:

25절 -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무엇이 더 중요한 지를 생각하라)
26절 - 너희는 그것들 (하늘의 새들) 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무엇이 더 귀한 지를 생각하라)
27절: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일 수 있느냐?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것)
28절 - 너희는 왜 입을 옷을 걱정하느냐? (부질없는 염려를 하지 말라)
30절 -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늘,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너희야말로 내가 돌본다)

우리 눈길을 세상으로부터 돌려 하늘 아버지를 향하도록,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으로 향하도록 하는 이 물음들에서 예수님은 비교법을 즐겨 쓰셨습니다:

목숨 (생명) -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하나님의 자녀 (신앙인) - 하늘을 나는 새
들의 백합꽃 - 솔로몬의 영화
하나님의 자녀 - 들판에 피는 꽃
신앙인 - 이방인 (믿음이 적은 사람)

이런 비교를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질없는 근심에 붙잡혀 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십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 6,34에서 이것을 더욱 강조하십니다. 우리말 개역성서에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고 되어 있어서, 미래의 걱정거리를 오늘이 아니라, 미래에 하라는 충고처럼 들립니다. 그렇지만, 그리이스어 원문대로 하면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입니다. 이런 걸 “아이로니” (역설법, Irony) 라고 하나요? “내일”이란 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간은 걱정하는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은 절대로 걱정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이 (스스로) 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정도로까지, 부질없는 걱정에 사로잡혀 사는 생활이 우스꽝스럽다는 점을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강조하십니다.

사실 세상에서 걱정을 하고 싶어서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격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 걱정이란 것이 마음 속에서 저절로 떠오릅니다.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중간 중간에,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사이 사이에 걱정거리가 생각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 옵니다. 바늘 가는 곳에 실이 가듯이, 사람이 살아 숨쉬는 시간 시간 마다 근심과 걱정도 같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걱정과 근심은 다정한 친구 보다도 더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멀리 하고 싶지만, 찰거머리처럼 우리에게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 근심과 걱정입니다. 그래서 걱정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사람들은 흔히 다음 세 가지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언더우드라는 사람이 제안한 방법입니다. 그는 걱정거리를 줄이려면, “걱정목록표”를 작성하라고 권합니다. 다시말해 자기가 걱정하는 일들을 사항별로 종이에 적고, 주의깊게 살펴 보라는 말이지요. 그가 자신의 걱정목록를 살펴 보고 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핵전쟁, 자연재해 등 앞으로 닥칠 지 모르는 재난에 대한 걱정 40% (곧 내일 홍수가 나면 어떻게 하나? 내일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나? 내일 아침 집을 나설 때 기와장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등)
2. 이미 결정이 나 있기에, 밀고 나갈 수 밖에 없는 일에 대한 회고 30%
3. 몸과 마음에 있는 질병 또는 질환에 대한 걱정 12%
4. 친구관계, 자녀의 일 등 인간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의 걱정 10%
5. 당장 뛰어들어 해결해야만 될 일에 대한 걱정 8%

그래서 언더우드는 이 목록을 자세히 살펴 본 다음에 92%의 걱정을 지워 버리고, 당장 해결해야 할 사항들 8% 에만 집중하여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상상력 (想像力)을 통해 걱정거리를 즐거움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입니다. 예를들어 내일 시험을 치른다면, “이 시험에서 성적이 좋지 않게 나오면 어떻게 하지 ...” 라고 걱정하는 대신에, 이 시험을 마치고 난 다음에 하게 될 즐거운 일을 계획하라는 것입니다. “내일 시험이 끝나자 마자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 (친구만나 수다떨기, 영화감상, 수영, 읽고 싶었던 책읽기, 운동 등) 를 할 거야” 하면서 그대로 실행하는 상상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다 보면 걱정거리 대신에 즐거운 영상이 떠오르면서, 내일 치를 시험에 용기있게 대처할 의욕이 생긴다고 합니다. 또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경우에도 이런 상상력은 도움이 됩니다. 비록 지금은 이 일로 고통을 겪고 있으나, 그 문제가 영원히 이어질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난 다음에 할 일을 미리 상상하면서 계획을 세워 봅니다. 그리고 그 일 속에서 생길 즐거움과 기쁨을 미리 상상해 봅니다. 그러다 보면,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골치아픈 문제을 향해서도 담대하게 맞설 용기도, 지혜도 떠오른다는 말씀입니다.

또하나는 복음성가나 찬송가를 부르는 것입니다.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부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근심 걱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생깁니다. 우리가 지난번 전교인 수양회를 할 때, 찬송가로 쟁반노래자랑을 하였습니다. 그 때 평소에 잘 부르는 찬송가 가사가 왜 그렇게 생각나지 않던지요.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더니, 우리가 찬송가를 부르면서, 자꾸 찬송책을 보는 습관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부를 때, 되도록 책을 보지 말고 가사를 외워 불러야 하겠습니다. 고민되는 일이 있을 때, 찬송가를 부르면 마음이 안정됩니다. 길거리를 걷거나, 걱정거거리가 있을 때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부르면, 마음이 편안해 지면서 새 힘이 솟고, 새 소망이 생깁니다. 찬송가, 복음성가를 부르는 일은 정신건강에 아주 좋습니다. 정신건강에 좋으면 당연히 몸의 건강에도 좋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걱정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걱정한다는 말은, 다시말해 무엇인가에 뜨겁게 바라고 있으며, 전심전력 (全心全力) 해서 몰두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루고 싶은 일 중에 걱정이 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이루려는 마음이 들어있는 일에는 반드시 걱정도 뒤따릅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치고, 걱정없이 저절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걱정이란 말 속에 나쁜 의미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뜻도 들어 있습니다. 지난 번 성서연구 시간에 같이 이야기 하였던 것처럼, 두려움, 걱정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걱정은 우리를 인생길을 도와주는 아주 친절하고 좋은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우선 걱정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발걸음을 해이하지 않게 만듭니다. 걱정은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에 바람직한 동기와 자극을 줍니다. 이렇게 걱정은 우리에게 유익을 끼칩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걱정하지 말라는 목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이유를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은 세상일에 대한 걱정, 세상에 사로잡힌 걱정, 세상풍조에 빠져들어가는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직업, 학업, 그리고 내적 외적 생활에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근심과 걱정도 더 많아집니다. 이런 일들에 열심이 임함으로써, 두려운 감정이나 걱정, 근심도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 있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요,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있다는 좋은 신호입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틈만 나면 고개를 쳐드는 우리 마음 속의 어두운 그림자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의 기를 꺽어 놓으려는 열등의식이나, 자만하게 만드는 우월감,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마음의 쓴뿌리”, “과거의 상처”들을 어떻게 제어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지닌 근심, 걱정과 맞물려 돌아가면, 자칫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마음에 커다란 장애물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걱정이 지닌 두 얼굴, 두 측면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겪는 상심 (傷心) 은 회개할 마음을 일으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을 후회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속적인 상심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7,10).

여기서 하나님은 걱정이 지닌 영적인 측면을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하는 두려움과 걱정은 이렇게 우리에게 믿음을 되찾아 주고,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향해 가는 우리 발걸음을 흩뜨러지지 않게 도와 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면적인 생활, 영적인 생활에 깊이 관심을 갖다보면, 우리 속에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햇살이 비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빌립보서 4,6-7).

사랑하는 여신도회 회원 여러분,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여신도회 헌신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여신도회원들은 가정과 세상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여성의 손을 거치지 않고 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일을 많이 하다보면, 걱정거리도 많고, 신경 쓸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를 깊이 묵상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내게 신경을 쓸 수 있는 건강과 기회와 능력을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사람은 이 근심과 걱정을 기도로, 믿음으로 연결시킵니다. 이렇게 근심과 걱정거리를 믿음향상의 기회로 만드는 사람은 자신이 겪는 근심. 걱정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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