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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있는 자의 생활! (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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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본문에서 말하는 “복”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쉐레, (ashere)”라는 말로써 집합 단수입니다. 여기서 복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오는 충만한 복”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8복과도 같은 복을 말합니다. 즉 복이 차고 넘치는 자를 본문에서 “복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있는 자의 생활은 !

1.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태풍경보가 내려 졌는데도 무인도의 갯바위에서 낚시질 하다가 실종되는 사람들, 홍수 경보가 났는데도 계곡에서 야영하다가 실종되는 사람들, 폭설 경보가 났는데도 자동차를 몰고 눈구경나갔다가 조난당한 사람들, 정부에서 위수령을 내렸는데도 데모 구경나갔다가 끌려 들어가 반병신 되어 나온 사람들은 다들 자기를 지키는데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연탄공장에 가면 연탄가루 뒤집어쓰기 마련이며, 밀가루 공장가면 밀가루 묻혀 오기 마련입니다. 봉재공장가면 실오라기 묻어오기 마련이며, 타작마당가면 덤터기 덮어쓰기 마련입니다. 막노동판에 가면 욕얻어 먹기 마련이며, 장기 훈수 뜨다가 귀뺨 얻어맞기 일쑤입니다.

정몽주의 모친 이씨는 아들에게“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울세라. 청강에 좋이 시슨 몸 더럽힐까 하노라”라는 “경세가(警世歌)”를 지어 아들을 달랬습니다.
정몽주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술을 먹으며 노비에게 나는 죽으러 가니 너는 돌아가라고 권하니 자신도 함께 죽을 것을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정몽주는 말을 거꾸로 타고 선죽교에 이르니 이방원의 가병에 의하여 살해되었습니다. 정몽주가 죽은 곳에 피가 돌에 묻어 붉게 물들고 그곳에 지금도 붉은 흔적이 남아 있다고 전해옵니다

악하고 패역한 세대의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를 세상과 세속에서 지키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자기를 영적으로 지키는데 실패하면 세속에 물들고 맙니다.
세속에 물들면 신앙생활에 실패합니다. 신앙생활 실패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 받은 하나님의 축복까지 상실하고 맙니다. 영육간에 빈털터리가 되고 맙니다.

1) 악인의 꾀를 좇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악인들은 다윗 시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가인을 비롯하여 가인의 6대손 라멕에 이르러서는 악인이 세상에 득세하여 득실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노아시대에 이르러 네피림과 거인들이 난무하기 시작했습니다.

네피림은 노아시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현대판 네피림들이 우글거립니다. 아낙 자손은 가나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현대판 아낙 자손들도 많습니다. 

창세기 6:5-7절에 “여호와께서 ❶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❷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❸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❹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노아시대의 모든 네피림들이나 거인들은 항상 악한 꾀(계획)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6:8절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씀했습니다. 노아는 악인들의 꾀(계획)를 좇아가지 않았습니다. 

악인의 꾀를 좇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악인에게, 사탄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서 무슨 복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악인을 졸졸 따라 다니면 처음에는 보호를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 악을 행하는데 앞잡이로 나서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용을 당합니다. 이용을 당하면 함께 악인이 되어 악인의 최후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늦게나마 깨닫고 이용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면 다음단계는 배신자로 몰아 세워 무서운 응징을 받게 됩니다.

2)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합니다.

옛말에 “남이 장에 가니까 ❍❍❍지고 따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장보러 간다고 볼일도 없이 따라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인의 길이요, 하나는 의인의 길입니다. 죄인의 길은 죄인들이 가는 길이요, 의인의 길은 의인들이 가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죄인의 길은 죄를 마음 놓고 지으면서 갈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죄인은 조만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한 길입니다.

마태복음 7:13-14절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말에 고문관(顧問官, Adviser)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매우 고상한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좋지 못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미군정당시 미군 군사 고문단이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해 “어리바리하게 행동하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고문관의 유형은 ❶ 말끼를 못 알아듣는 유형 ❷ 혼자 잘 난척하는 유형 ❸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군에 그런 고문관이 엄청 많았다고 합니다. 6.25동란당시에는 남자라고 생겼으면 누구나 다 군에 끌고 갔습니다. 우리 고향의 한 사람이 휴가 때 집을 못 찾아와 대전출신의 병사가 데려왔습니다. 몇 날 몇 시에 대전역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김천역에서 서울 행 군용열차 대신 부산행 군용열차를 타고 대구역에서 내렸습니다. 한 사람은 대전역에서 헤맸고, 한 사람은 대구역에서 헤맸습니다. 다행히 대구역 헌병대에서 발견하여 같은 사단 사람을 붙여서 며칠 늦게 귀대했다고 합니다. 워낙 고문관이라 부대장이 오히려 반가워 하더랍니다. 

신앙생활에도 고문관이 있습니다.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길을 잘못 들어 죄인의 길에서 서성거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영적인 고문관들입니다. 다가 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징계를 눈치 채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복을 차버리고 쏟아 버린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오만한 자(the scornful)는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반역하고, 비방하는 타락한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종교를 완전히 부인하며, 무시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교회를 모욕하고 주의 종들을 능멸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본문 1절에 “복 있는 자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했습니다.

교인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하고,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오만한 자들의 모임에 앉아서 하나님을 욕하며 반역하는 자들의 틈새에 끼어 앉아 경거망동하는 행동과 말에 대하여 “당신의  말도 일리(一 里)는 있어요...”라고 하면서 맞장구를 칩니다. 마라톤대회에서 100리 중 1리를 뛰었다고 그를 마라톤 선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마라톤의 문외한이라고 해도 100리 중 1리는 달릴 수 있습니다.

“그 생각도 일리(一理)는 있어요라고 흥얼댑니다.”100가지 이치 중 한 가지 이치에 맞는다고 같이 앉아서 장단을 맞출 수 있습니까? 아무리 살인강도라 할지라도 그의 말을 들어보면 100가지 이치 중 한 두 가지 이치는 맞을 수도 있습니다.

복 있는 자들은 100리 라면 100리, 100가지 이치(理致)라면 100가지 이치가 다 맞는 “진리(眞理)”가 아니면 같이 하지 아니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일리(一理)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眞理)로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27절에서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악인의 꾀를 절대 좇지 않으며,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말아야 복 있는 자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13장을 보면은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에서 벧엘로 내려가 자기의 지위를 떠나 제단에서 분향하는 여로보암을 향해 “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2)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실 때 그곳에서“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9)고 당부하셨습니다.  이 당부의 말씀은 벧엘을 쳐서 예언할 자가 그곳에서 먹고 마시면 같이 물들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의 청은 거절하고 하나님의 당부의 말씀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벧엘의 늙은 선지에게 속아서 그의 집에 따라 들어가 먹고 마셨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자에게 찢겨 벧엘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벧엘의 늙은 선지가 유다의 죽은 선지의 시체를 일컬어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26)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27절에서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로라”고 말했습니다.

2. 여호와의 율법으로 살아갑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율법은 순수한 하나님의 복된 진리의 말씀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율법은 복음과 반대되는 의문(儀文)의 율법을 말합니다.

세속적인 쾌락과 즐거움은 수명이 짧습니다. 먹고 마시는 즐거움도 많아 보아야 한 두 시간입니다. 황금보석 오래 가야 며칠입니다. 부귀영화 짧은 세월입니다. 뜬 구름입니다. 안개 같습니다.

성경적인 즐거움은 세속적인 향락과 쾌락과는 개념이 틀립니다. 성경적인 즐거움은 육체에서 나오는 즐거움을 말하지 않습니다. 심령 속에서 샘솟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한번 얻으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소멸되지 않는 그러한 즐거움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즐겁게 사는 사람입니다. 즐거움의 근원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습니다. 시편 119:143절에서 시편기자는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시편119:103절에서 시편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하니이다”라고 노래하고 기도했습니다.

도대체 꿀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꿀에 비유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까?

벌꿀은 꽃가루 특유의 비타민, 단백질, 미네랄, 방향성 물질, 아미노산 등의 이상적인 종합 영양 성분 이외에 각종 효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식품” 이라고 하며, 포도당과 과당에 의한 피로 회복 효과는 어떤 식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벌꿀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포도당과 과당을 주성분으로 한 벌꿀은 체내 장벽(腸壁)에 직접 흡수되어 글리코겐(Glycogen)이 된 후에 간에 저장됩니다. 포도당은 주로 체내 근육 세포에서 연소하여 생명을 지속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발생합니다.

사람이 필요한 무기물의 대부분을 벌꿀이 함유하고 있어 체내에 있어서 중요한 생리 작용을 원활하게 하고 골조직(骨組織)의 발육을 완전하게 해줍니다. 영양 회복, 심장 질환의 치료에 포도당 주사를 행하고 있는데, 이때 포도당을 다량 함유한 벌꿀을 내복하는 것은 다소 목적이 다르지만 영양 장애, 피로 회복에 현저한 효과가 있습니다. 벌꿀 반컵 정도가 영양제 한병 주사와 맞먹는 이유가 거기에서 연유하는 겁니다.

벌꿀을 아이들에게 1일 2회 복용시켰을 때 적혈구가 85%나 증가하였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혈액 응고작용이 저하된 사람이 부상을 당하거나 치아를 뺐을 때 출혈을 막을 수 있습니다. 벌꿀 1파운드(453.6g)당 1,602칼로리의 열량을 내는데, 이것은 우유에 비하여 약 여섯 배나 됩니다. 따라서 벌꿀은 당분의 중요한 공급원이 됨은 물론 그 밖에 자양식료(滋養食料)로써 중요합니다.

벌꿀의 주요 성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분:17.20, 당류:79.59, 과당:38.19, 포도당:31.28, 자당:1.31 2, 당류:7.31, 호정(糊精) :1.50,  단백질:0.26, 회분:0.17, 미량의 각종효소가 들어있습니다.

설탕은 분해과정에서 비타민이나 무기질류를 필요로 하지만 꿀에 들어있는 당분(포도당, 과당)은 체내에서 더 이상 분해될 필요가 없는 단당체로 되어 있어 체내흡수가 빠르고 아주 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되며 영양의 밸런스를 깨트리지 않고 곧바로 에너지로 활용됩니다. 

벌꿀은 위를 편안하게 해주고 특히 변비에 효과적입니다.  벌꿀은 장의 연동운동을 도와 정상작용을 해주고 “비피더스균”은 증식시키고 “창자속의 장균”은 억제시키기 때문입니다. 

벌꿀에 들어있는 철분은 빈혈을 예방하고 치료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벌꿀에는 각종 비타민(B, C군)류와 미네랄(칼륨, 아연, 칼슘)등도 흡수되기 쉬운 상태로 함유되어 있어 피부미용에 좋으며,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벌꿀속의 칼륨성분은 체내의 콜레스테롤 및 혈관속의 노폐물을 제거해주는 역할을 하여 혈행을 원활하게 해주고 혈액을 알칼리성으로 유지하고 혈관을 튼튼히 하며 내장의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작용 이 있으므로 고혈압, 심장병, 변비에 특효식품입니다. 

벌꿀은 살균력이 뛰어나며 질병에 대한 저항력과 항균력을 가진 비피더스균의 증식을 돕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인체에 가장 악성인 이질병이나 장티푸스균도 벌꿀 속에서는 몇 시간 생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입안이 헐었거나 물집이 생겼을 때 꿀을 바르면서 먹으면 빨리 치료되며, 생꿀 한 컵만 마셔도 감기가 낫고 이질환자에게 2~3일 동안 다른 음식물을 끊고 벌꿀만을 먹이면 금방 치료된다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벌꿀속의 마그네슘 성분은 진정작용이 있어 신경통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꿀을 우유에 타서 먹이면 모유와 다름없는 저항력을 키워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벌꿀은 식물이 만들어낸 종합영양제입니다. 식물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영양이 포함돼 있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도 거의 들어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하루에 순수한 벌꿀 3번씩 한 스푼정도만 먹으면 항암(抗癌), 항균(抗菌), 항풍(抗風), 항로(抗老 ), 항질(抗疾)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벌꿀의 모든 영양은 소화작용없이 곧 바로 투입이 된다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영양의 도움이나 희생 없이 곧 바로 사용됩니다.

시편 19:9-10절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의롭습니다. 우리의 육신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말씀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만 밤낮으로 묵상하여 생명의 양식으로 삼으면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복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3. 그 행사가 다 형통합니다

오늘 본문 3절에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나무 중 가장 행복한  나무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들입니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들은 사시사철 물 걱정이 없습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잎사귀가 시들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걱정 근심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로 살아가게 되니 하나님께서 만사형통하는 축복을 주심으로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끝맺는 말

복 있는 사람은 그 생활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 드림으로 하나님도 그의 가는 길을 인정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6절은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라고 말씀했습니다.성경 잠언 3:6절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신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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