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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운명을 바꾼 사람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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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어진 환경과 운명에 순응하는 사람입니다. 대개 이런 분들은 운명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뭔가 잘못되면 다 자신의 팔자소관이려니 하고 받아들입니다. 양과 돼지가 시궁창에 빠졌습니다. 양은 어떻게 해서든 시궁창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고 애를 쓰지만 돼지는 덥석 드러누워 여기가 내 자리려니 하는데 바로,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운명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운명을 변화시키며 개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대개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인생을 삽니다. 그들은 긍정적으로 사고합니다. 그들 앞에 절망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늘 마음속에 불꽃같은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은 불가능한 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존재한다는 로버트 슐러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감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도 운명을 바꾸고 개척해 나갔던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야곱입니다. 그는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았다가 결국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오랫동안의 나그네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오는 길에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게 됩니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당신을 결코 놓아드릴 수 없다는 야곱의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야곱이 도망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스스로의 운명을 바꿔 나간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압 땅 이방 여인이었던 룻이란 여인도 그렇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편이 죽었을 때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어머니의 고향이 나의 고향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어머니에게 공경을 다하고 어머니가 추천하는 보아스라는 유력한 친족과 결혼함으로써 인생이 바뀝니다. 그녀는 이제 한갓 소망 없는 이방 여인이 아니라 다윗의 조상이 되고 메시야의 육신적 조상이 되는 축복의 인물이 됩니다.

  현재 미국의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내는 강영우 박사가 계십니다. 이 분은 참 훌륭한 분입니다. 그는 고향이 경기도 양평 서종입니다. 시골학교를 다녔는데 축구를 하다가 그만 공에 눈을 맞아 실명을 하게 됩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좌절하고 낙심하고, 불평과 원망, 반항아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실명은 나의 장애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거룩한 도구’라고 고백하곤 했습니다. 그는 맹아 학교에 들어가서 점자를 배웁니다. 그리고 연세대학교 교육학과에 당당히 입학하고 차석으로 졸업합니다. 미국에 유학을 가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펴면서 대통령의 눈에 띄었고, 차관보라는 고위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맹인으로 높은 관리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자랑이 아닙니다. 그는 종종 시간만 되면 한국에 와서 많은 교회와 단체에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섭리 가운데 내가 오늘날 이런 인물이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그는 두 아들도 잘 키워서 미국의 유수한 대학의 법과 대학과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훌륭한 인물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헌당하고 난 이후에 강영우 박사님 같은 분을 꼭 모셔서 간증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갖고 있습니다.
  보통 실명한 맹인이라고 한다면 어떤 인생을 살겠습니까?
  안마사가 되든지, 침술사가 되든지 하는 범주를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자기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언젠가 시사 매거진 2580에 방송되었던 태호라는 소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2년 전 다섯 살이었으니 지금은 일곱 살일 것 입니다. 태호의 이야기가 많은 이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태호는 태어나면서부터 양 팔이 없었습니다. 허벅지가 짧아서 다리도 한 쪽이 짧습니다. 또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발가락도 여덟 개 뿐입니다. 또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피에르로빈증후군이라는 아주 희귀한 병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수술을 하면서 힘겨운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래도 태호는 밝은 미소를 잃지 않습니다. 기자가 “태호야 힘들지 않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괜찮아요.”하고 천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조금 힘들면 죽겠다고 못살겠다고 난리 법석을 떠는데 이 태호는 양 팔이 없는 아이이면서도 “저는 괜찮아요.” 하며 천사의 미소를 짓습니다. 그는 지금도 중증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상락원'이란 곳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태호는 양 팔이 없기 때문에 두 발로 모든 일을 다 합니다. 밥도 발로 먹습니다. 수저를 발가락에 끼워서 밥을 떠 먹습니다. 옷도 두 발가락으로 합니다. 세수도 두 발로 합니다. 모든 문제를 척척 해결합니다.
  태호를 볼 때 마다 참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사지가 멀쩡하면서도 입만 열면 불평이요, 원망이요, 못하겠다고 하는데 태호는 어린 나이에도 그의 앞에 닥친 엄청난 장애의 시련 앞에서 당당하게 도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어떤 삶을 원하십니까?

  아니, 여러분의 인생이 진정으로 변화되길 원하십니까? 진정 인생의 변화를 원하신다면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못가로 내려가셔야 될 것입니다.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아멘.

  유대인의 명절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것이 유월절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부림절이라는 데 견해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 부림절이란 절기는 파사 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 에스더가 왕비가 되었는데 그 때 하만이라는 나쁜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꺼번에 죽이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그 때 에스더는 그것을 간파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지혜를 얻습니다. 그리곤 3일 동안 금식하고 왕 앞에 나아갑니다. 그는 죽으면 죽으리란 각오를 가지고 나아갈 때 왕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구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의 날, 민족해방절이 바로 이 부림절입니다. 너무 좋은 날입니다. 축제요 잔치의 날입니다. 바로 우리의 민속 설날과 같은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절기에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습니다. 제자들은 기대가 많았습니다. 시골 동네에 있느라 굶기도 했을텐데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기름진 것 좀 먹겠다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십니다. 이 양문이란 것은 양이 들어가고 나가는 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물로 쓰일 양들이 그 양문을 통해 들어가고 나갑니다.
  이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1년에 한번 천사가 내려와 물을 흔드는데 그 때 들어가면 누구든지 병을 고친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환자들이 거기 모여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모여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명절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절기가 되어도 가족 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 소외되고 고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곳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 교회의 마음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고독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본분은 명절 속에서도 고독한 사람들을 찾아가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그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무기력합니다. 자기들 스스로 자기들의 병을 고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나를 구원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들입니다. 뭐 좀 가졌다고, 좋은 옷 입었다고 으스대고 폼 잡을지 모르지만 사실 별 것 아닙니다. 감기만 걸려도 꼼짝 못해서 누워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별거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무능한 사람입니다. 나는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들 가운데 소경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이 있지만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도 그 분이 메시야인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눈이 있지만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갖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 가운데 절뚝발이, 절름발이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걸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환경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가고 싶은 곳에 마음껏 갈 수 없습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린 새해가 되면 늘 결심합니다. 새해엔 이렇게 살아야지, “새벽기도 좀 열심히 나가야지, 저녁 예배도 나가야지, 새해엔 전도도 해야지, 봉사도 해야지.”하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작심삼일입니다. “그래, 나는 역시 나지, 내가 무슨 신앙이 있다고 새벽기도를 나가...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던 거지”하고 자기 주어진 환경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환경의 노예, 습관의 노예, 성품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오늘 인간들의 모습이 바로 거기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혈기가 말랐다고 했습니다. 손에 신경이 죽고 피가 말라서 손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손은 있으되 이웃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거기,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병이 이미 오래된 줄 아시고, 이미 그의 마음을 아시고 그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를 건강한 사람으로 바꿔 주십니다.
  여러분, 38년 동안 병을 앓았다면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스물에 병을 얻었다면 58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남편, 아내가 사랑스러워도 20~30년 병석에 누워있다면 참 어려울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 사람은 가족에게 버림받은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가족에게서 외면당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명절 때도 찾아 올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가까운 친구 하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을 때 그는 “물이 동할 때 나를 들어서 옮겨 줄 사람도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보면, I have not a man, 친구하나 없다는 매우 고독한 사람입니다. 남들은 즐거워하는 명절이었지만 그는 자기 몸 하나 옮겨 줄 사람도 없는 고독한 사람이었습니다.
  명절 때가 되면 많은 이가 차를 타고 이동하지만, 그 때 오히려 유독 더 고독한 사람도 있습니다.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분들, 자녀가 멀리 가 사는 분들, 홀로 되신 분들은 더 외로워 합니다. 명절이 없었으면 할 것입니다.

  오늘, 이 38년된 병자를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바꿔주셨습니다.

  자, 우리도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요?

  첫째,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날 때 변화되었습니다.
  저는 점 쳐서 사람 달라졌단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 성격이 못됐는데 점 쳐서 사람 달라졌대”하는 말은 못 들어봤습니다. 명절이 되면 점치러 가는 분들이 많이 있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왜 점치러 가냐고 물으니 점치면 응답이 빨라서 그렇답니다. 기도하고 응답 받으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점은 5분이면 즉각 응답이 온다는 것 때문이랍니다.
  우리나라는 명절 때가 되면 점 산업이 활개를 친다고 합니다. 백화점, 유통업이 잘 되는 것이 아니고 점집이 잘된답니다. 점을 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직업이 안정된 사람들, 잘못 안하면 내쫓길 염려가 없는 공무원보다는 언제 명퇴달할지 모르는 회사원들, 사업하는 사람들이 점을 치러 많이 간답니다. 그저 씨를 뿌리고 가을이면 추수하는 농부보다는 바다에서 배를 타는 어부들이 점을 치러 많이 간답니다. 미래가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술인이 45만 명 이라고 합니다. 6000만 명 인구 중에 약 140명 당 1명이 점쟁이랍니다. 상당히 많은 숫자입니다. 교회가 많다해도 점쟁이가 훨씬 더 많습니다. 1년에 점쟁이에게 갖다 부어 주는 돈이 약 2조원입니다. 1년 영화산업의 매출액이 2조 3천억이라는데 2조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점쟁이에게 가져다 준답니다.
  사람들은 점쟁이를 만나면 운명이 바뀌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바뀌지 않습니다. 요즘은 못 배운 사람들이 점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많이 배운 사람이 간답니다. 주식 투자하는 사람들, 주식 전문가들이 어느 주식에 투자해야 돈을 버냐고 물어보러 점 집에 간답니다. 저는 참 이해가 안갑니다. 아니, 그러면 점쟁이가 미쳤지 왜 점치고 있습니까? 자기가 주식투자해서 자기가 돈 벌지 말입니다. 어느 주가가 오를지 알면 왜 남에게 정보만 주고 있습니까?
  자기 인생도 바꾸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남의 인생을 바꿔줍니까?

  진정한 인생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이루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서 인생이 변했습니다. 세리 마태도 예수님 만나서 인생이 변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죄의 종이었고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니,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보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여러분 안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모의 마음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백부장이 찾아가서 “주여, 제 하인이 병들었나이다” 하고 찾아가서 고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병들었다고 찾아가서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38년된 병자는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발로 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한 사람을 아시고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인생 속에 찾아 오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내 힘으로, 내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만나러 오셨습니다. 은혜의 사건입니다. 여러분, 주님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이 주님을 만날 만한 때 입니다. 이 좋은 명절 날, 여러분 다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운명을 바꾸는 인생이 되려면, 변화를 향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6절, 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아멘.

  오늘 예수님이 이상한 질문을 하십니다. 지금 38년된 환자에게, 병 고치려고 드러누워 있는 사람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너무 당연한 질문 아닙니까? 참 이상합니다.
  여기엔 예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38년 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아마 처음 1,2년은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10년동안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를 들어서 옮겨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 이 연못에 들어간다고 꼭 낫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더라도 한번 들어가 보고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암 걸리면 죽을 걸 알면서도 한번 수술이라도 받아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관악교회의 어느 권사님이 암에 걸렸는데 수술을 안 하셨답니다. 수술비 5000만원을 건축헌금으로 드리셨답니다. 내가 수술해서 얼마나 더 살겠느냐고, 괜한 고생만 할 뿐이라며 오히려 하나님 앞에 건축헌금드리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고 말입니다.
  38년된 이 병자의 마음속에도 어찌 보면 절망의 어두움이 그림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38년동안 아파서 누워 있었는데 정말 고칠 수 있을지 기대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갈 데가 없으니 여기 앉아 있는데 여기 떠나면 굻어죽을 테니 말입니다. 여기 있으면 누가 먹을 것도 갖다 주고 구제도 해 주지 여기를 떠나면 어떻게 살지 막막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그의 마음속에 간절한 치유의 열정, 소망이 있느냐를 묻고 계십니다.
  너희 마음속에 진짜 네 인생을 변화시키고 싶은 열망이 있느냐를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은 간절한 열망입니다. 불타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주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습니다. 병자를 고칠 때에도 병자의 마음속에 치유 받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주님은 일하십니다.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정말 고침 받고 너의 운명을 바꾸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38년동안 앉아 살았다면 이 사람 다리 고치고 일어나면 더 불편할 것입니다. 그동안은 먹여주고 입혀주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다 해결해야 합니다. 38년 동안 맹인으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뜨면 그 때부터가 고민입니다. 이제까지는 누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돌봐 주었지만 이젠 그 임무를 그가 해결해야 합니다.
  북에서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넘어오신 분들이 타락하거나 문제를 겪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북한에 있을 때는 못 살아도 먹여주고 입혀줍니다. 남한에 오니 아무도 안 먹여줍니다. 굶어 죽을 판입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야 하는데 그럴만한 용기와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그런 삶에 익숙해졌었기에 말입니다.

  고정관념을 깬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네가 정말 네 인생이 변화되기를 원하느냐?”

  여러분, 정말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새벽기도 나오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건강주시면 저녁예배도 나오기 원하십니까?
  대개 아닙니다. “하나님이 심장병 주신 것 어떡합니까? 전 심장 때문에 새벽기도 못 나갑니다. 찬바람 쐬지 말라고해서요, 주여 감사합니다” “저 저녁예배 못 나갑니다. 다리 아파서. 다리 아픈것도 감사합니다.”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자기 습관에 머무는 것입니다. “주여, 새벽기도 나가고 싶어요. 심장병 고쳐주셔요. 주여 저녁예배 나가고 싶어요. 다리 낫게 해 주세요!” 이런 열망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분은 교회 가까이 이사 안 옵니다. 왜입니까? 멀리 있어서 좋답니다. 교회 못 나와도 말도 안합니다. 주일 한번 왔다 가면 한 주간 내내 잊어버려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답니다. 너무 편하고 좋답니다. 이사 올 생각을 안 하고, 점점 멀리 멀리 갈 뿐입니다.

  여러분, 뭘 원하십니까? 여러분, 진정 변화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정말 교회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불편할 것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변화되면 불편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어떤 분은 남편이 너무 신앙이 없어 신앙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순간 남편이 은혜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꼬박꼬박 십일조를 온전히 내는데 감당이 안 되더랍니다. 예배도 꼬박꼬박 나가는데 남편이 변화되니까 갑자기 겁이 나더랍니다. 집안 재산 다 교회 가져다 줄 것 같고, 회사 일도 다 그만두고 교회 가서 살 것만 같습니다. 이렇듯 변화되면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대로가 좋사오니...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부족하니... 올해도 이렇게 살겠나이다하는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진정 변화를 원하십니까? 변화를 갈망하십니까? 또 다른 인생을 원하십니까? 주님 앞에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 변화의 갈망, 열망의 불꽃을 태울 때 주님 여러분의 인생을 바꿔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38년된 병자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예!” 하면 됩니다. 그런데 설명이 구구절절 깁니다. “제가 이 물에 들어가야 하는데 저를 들어서 옮겨 줄 사람이 없고 지금까지도 들어가지도 못했고...”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그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의 마음속에 자기 병을 고치고 내 인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의 마음속에 불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런 불꽃이 타오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변화는 갈망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달에 가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이제 10년만 있으면 달에 마음대로 갈 것입니다. 지금도 1억만 내면 달에 다녀올 수 있답니다. 여러분, 인간은 갈망하면 이루어집니다.

  세 번째로, 운명을 바꾸는 인생이 되려면 말씀에 순종하셔야 합니다.

  8절,9절 말씀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아멘. 

  만약 제가 38년된 병자라면 저에게 예수님이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면 아마 쳐다봤을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내가 38년동안 누워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걸어가?’라는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날 들어서 옮겨주든지, 동전을 던져 주든지...뭘 일어나 걸어가? 38년동안 못 걸었는데...' 하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걸을 수 없다는 생각에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믿음이 참 대단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마음의 감동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났습니다. 그의 굳었던 다리가 힘을 얻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는 자리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너희 주저앉았던 그 운명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라, 믿음으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망만 있다면 주님은 언젠가 우리를 도우십니다.

  여러분, 기적은 순종에서 출발합니다. 이 사람은 순종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걸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 데로 그물을 내리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릴 때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람의 장군 나아만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에 순종할 때 어린 아이와 같이 깨끗한 피부를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순종할 때, 여러분의 열망의 불꽃이 꺼지지 않을 때, 여러분에게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기다리십시오. 준비하는 자에게 반드시 기회는 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 건강할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카네기 홀을 만든 자선 사업가 카네기에게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영국 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방직공이었습니다. 카네기는 미국에 건너와서 여러 가지 일을 해 봅니다. 기관 조수도 하고, 전보 배달원도 하고, 전신기사도 하고 외판원도 합니다.
  어느 날 너무 피곤하고 지친가운데 외판원 일을 하다가 한 사무실 앞에서 그림을 하나 보게 됩니다. 그 그림엔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 배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배 위엔 노가 걸쳐져 있습니다. 그 배는 지금 항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오리라! ”

  지금은 썰물입니다. 물이 없습니다. 배는 항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때가 되면 밀물이 올 것입니다. 곧 밀물이 들어오면 그 배는 보란듯이 물 위에 둥실 뜰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카네기는 굉장한 도전과 용기를 받습니다. 그래, 내 인생에도 반드시 밀물 때가 올 것이다. 성공의 때, 번영의 때, 축복의 때가 올 것이다라고 도전을 받습니다. 그는 절망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제철업을 하게 되었고, 세계적인 대사업가로 변신하고 성공하게 됩니다. 그는 그의 재물을 다 내 놓아서 카네기홀을 만들고, 연구소를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선사업을 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소망의 불꽃이 꺼질 때 그 인생은 끝나고 맙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갈라디아서6장 9절에서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꼭 밝은 아침이 올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능력을 믿으시고 기도함으로 이 운명을 바꿔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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