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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 (빌 2: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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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빌립보서 2:29)

  한 사람의 삶은 그가 살아가는 그 시대와 주위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이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바로 살지 못하고 악하게 살아갈 때, 그 사람에 의한 손실과 악영향이 엄청난 것으로 파급되는 것을 봅니다. 반대로 한사람이 값지고 책임적인 선한 삶을 살아갈 때, 한 세대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수많은 사람을 바르게 세워주는 은총의 역사를 만드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볼 것 없는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분의 그리스도의 인류구원의 삶은 온 인류를 구원하는 은총의 역사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의 믿음의 삶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평가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 평가는 교회 안에서 그 사람이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얼마나 존귀히 여김을 받느냐에 있습니다. 교회가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 믿음은 훌륭한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해도 교회공동체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 믿음은 극히 비정상적인 것임을 볼 수 있고, 그렇게 크게 덕이 되지 못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축복 받은 성도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인정받고 교회공동체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목회자와 교인들로부터 비난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존귀한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바울사도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존귀히 여기라고 한 에바브로디도의 믿음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함께 할 줄 아는 사람

  에바브로디도를 가리켜 바울은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25절) 고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하고 빌립보 교회와 함께 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일에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함께 염려하고 함께 고생하며, 함께 나누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함께 하는 믿음은 존귀히 여김을 받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강철왕 ‘엔드류 카아네기’의 강연회 중 그에게 “만약 당신의 왕국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회중을 향해서 “여러분, 단신들은 내 건물을 취할 수 있고, 내 공장들을 불사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 재산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나의 중요한 참모들을 남겨준다면 잃어버린 왕국을 재건하겠습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꿈과 함께 할 수 있고 그의 경영에 함께 할 수 있는 참모들만 있으면 얼마든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삶은 항상 교회의 사역에 함께 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갇혔을 때, 빌립보 교인들의 정성어린 선교헌금을 전하는 일에 함께 했고, 빌립보 교인들을 대표해서 옥중에 있는 바울을 돕는 일에 함께 하기 위해 바울과 함께 옥살이를 자청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복음을 위한 싸움에 바울과 함께 했고, 재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바울의 선교사역을 위해 쓸 것을 힘써 지원함으로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하는 사람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함께 하는 신앙의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의 사람

  에바브로디도는 교회에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사랑의 대상으로 살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돕기 위하여 빌립보 교인들의 정성을 가지고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을 찾아 전하고 바울을 돕다가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인들은 크게 근심하고 염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를 급히 빌립보에 돌려보냄으로 빌립보 교인들의 근심을 덜어주고 기쁨을 나누도록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중병은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에게 큰 근심이 되었고 그의 회복은 다시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에바브로디도는 사랑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요일 4:21)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을 받고 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는 아픔을 자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사셨고, 목마른 인간들에게 사랑의 주님으로 시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를 감정의 관계로 합니다. 내게 나쁜 감정을 주었으면 계속 나쁜 감정으로 관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틈만 있으면 나쁜 감정을 가지고 그 대상을 흠을 잡아 들추어내고 깎아 내립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그 미움과 증오의 감정에 빠져 기쁨을 읽고 괴로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를 이해 관계로 관계합니다. 이용가치의 득실을 재어보고 관계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인간관계는 용납하고 희생하며 기뻐하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두 가지 양면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모습과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포악하고 거칠고 잔인한가 하면, 착하고 다정하고 인자합니다. 사랑은 부정적인 모습을 다스리고 긍정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합니다. 사랑은 평화와 기쁨의 인간관계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제의 아버지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주정을 부렸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술 취한 아버지를 향해 욕설과 함께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형제는 도저히 본받을 수 없고 자랑할 수 없는 부모와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20년 후 두 형제의 인생은 완전히 갈리고 말았습니다. 형은 의과대학의 저명한 교수가 되어 ‘금주운동’을 전개했고 동생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의 현실에 대하여 동일한 답변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된 것은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때문에” 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은 비극적인 환경을 교훈 삼아 변화와 희망의 삶을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환경의 노예가 되어 원망과 불평 속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형은 주어진 환경을 사랑을 가지고 수용하며 극복하여 금주운동을 벌이는 훌륭한 의사가 되었고, 동생은 환경을 증오와 원망의 대상으로 여기며 아버지처럼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인생을 포기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랑의 사람으로 모두에게 기쁨이 되는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으로 사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을 가지고 대하십시오.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살고,  사랑의 받는, 사랑의 대상이 되십시오. 그러므로 존귀한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수고하는 사람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형제처럼 바울과 함께 복음사역을 돕기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군사처럼 고난을 겪으며 수고했고, 빌립보 교인들의 심부름꾼과 같이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위하여 열심히 수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중학교에 새로 부임한 여자 음악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관악부를 조직했습니다. 음악교사가 생각하기에는 아직 연주할 준비가 되어있지 아니한데, 교장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첫 연주회를 결정해 버렸습니다. 선생님도 선생이지만 학생들의 놀람과 당황함은 너무 컸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여 연주회가 시작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음악교사는 잔뜩 긴장해 있는 학생들에게 “만약 자신이 없는 사람은, 연주를 하는 척만 하라”고 했습니다. 여교사는 침착하면서도 힘있게 지휘봉을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척만 했을 뿐 소리를 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는 척만 하고 하지 않는 사람은 수 백명이 모여도 또는 악기가 아무리 좋아도 소리가 나지 않으며 어떤 화음도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가 어떻게 위대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을 따라가 옥살이를 자처하며 바울의 선교를 위해 병들어 죽기까지 수고를 아끼지 아니한 에바브로디도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왜 그렇게 은혜롭고 풍성한 희생이 있는 교회였습니까?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모두가 고마워하며 감사할 수 있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일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하는 척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죽기까지 수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30절)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고하는 사람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수고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교회에서 존귀한 성도입니다.
  예수 믿고 은혜를 받으면 세 가지 ‘뻐’ 자가 들어가는 삶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기뻐지고, 예뻐지고, 바뻐(빠)진다.”는 것입니다. 척만 하는 신앙인은 기쁨이 없습니다. 내적인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척만 하는 신자는 예뻐지지 않습니다. 척만 하는 신자는 바빠지지 않습니다. 책임과 성실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에 주시는 말씀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위한 충성의 삶은 수고의 삶을 요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수고의 인생은 본인은 물론 교회공동체에 가치와 보람을 안겨줍니다. 수고하는 성도로 존귀히 여김 받는 믿음의 삶을 이루십시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이 존귀히 여기는 동역자였으며 성도들로부터도 존귀히 여김을 받기에 합당한 그리스도의 일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절)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존귀한 삶을 살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하나님과 교회공동체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는 축복된 성도의 삶을 이루십시오. 그러므로 세상가운데서도 존귀한 사람이 되십시오. 아멘. (김성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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