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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날] 즐거운 곳에서는 (시 127: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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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저는 말씀의 제목을 ‘즐거운 곳에서는...’이라고 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제목에 뭔가가 이어질 것 같지 않습니까?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집 내 집뿐이리...’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홈 스위트 홈’의 가사입니다. 이 노래는 미국의 극작가 존 하워드 페인이란 사람이 노랫말을 짓고, 영국의 작곡가 헨리 비숍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노래에 대한 일화가운데 이런 감동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1862년 ‘레파하녹크’에서 있었던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로 북부 연합군 12,000명과 남부 동맹군 5,000명의 엄청난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이 전투가 한참 진행중일 때 양군의 군사들이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이들은 낮이면 치열하게 전투하고, 밤이면 지친 군사들을 주기 위해 군악대가 연주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당시 북국 군악대가 연주한 노래가 바로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였습니다. 연주가 시작되자 지친 군인들은 고향과 가족을 생각하며 따라 불렀고, 노래는 강 저편에 있는 남군에게도 전달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남군의 군사도 이 노래를 따라 함께 합창을 했습니다. 노래가 계속되자 이들은 모두 총을 버리고 다리로 모였고,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얼싸 안았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서로 적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나라와 고향과 가족을 생각하며 우렁찬 소리로 노래를 계속 불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전쟁이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가족을 소중하게 기억하게 만드는 하나의 노래가 이런 엄청난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오직 내 쉴 곳은 작은 내 집뿐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부모의 사랑과 품이 그리운 정겨운 그 집, 나의 고향을 찾아 우리 모두의 발길이 옮겨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동체를 향한 우리의 소원가운데 가장 귀하게 가져야 할 소원은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이 어떤 공동체보다 중요합니다. 이것은 창조의 원리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이어서 공동체의 제도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이 땅의 최초의 공동체는 국가나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가정부터 만드셨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공동체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곳이 바로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삶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동체를 향한 소원가운데 가정을 위한 소원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위하여 어떤 소원을 품어야 할까요? 오늘은 가정공동체를 향한 우리의 소원을 본문을 통해 찾아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주인이신 가정입니다. 본문은 솔로몬이 지은 대표적인 시로서 특히 가정을 노래하는 정말 아름다운 시입니다. 솔로몬은 평화로운 시대에 가정을 향한 이런 노래를 지으면서 모든 사람에게 가정을 향한 소원을 품게 했습니다. 그가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 함이 허사로다” 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집을 세우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출발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가정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는 더욱 인간의 세운 가정에 위기가 높습니다. 이런 가정을 어떻게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이 주도하는 가정, 하나님이 주인이신 가정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가정을 노래하는 비슷한 시편인 128편에서도 이것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도에 복종하는 개인, 가정이 바로 행복한 가정입니다. 이것이 가정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해마다 이런 명절이 오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우선, 그리운 가족, 그리운 고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즐거운 나의 집’과 함께 늘 부르던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던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저는 고향이 서울이라서 명절이 되어도 고향에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나마 저의 양가의 부모님이 다 해외에 계셔서 사람들이 고향 땅에 내려가는 것의 기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지난 12년의 해외생활을 하면서 고향이 얼마나 가고싶은 곳인지 경험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이맘때면 지치고 힘든 줄로 모르고 고속버스에, 열차에 비좁게 앉아 고향을 찾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족이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기서 내려가는 것보다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은 더 애절합니다. 동구 밖 멀리까지 나와 이 추운 겨울에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부모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자녀, 그리운 가족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족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만나려고 해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더욱 그리운 가족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영원한 고향인 천국을 바라보면서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명절 때에 그리운 가족과 함께 또 떠오르는 것은 무서운 가족, 두려운 가족입니다.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많이 일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제사문제로 더욱 힘들고 어렵게 보내는 명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마치 영적 전투의 현장에 서 있는 비장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영원히 풀어야 할 숙제이고, 우리 믿는 자가 끝까지 이겨야 할 싸움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이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성도가 있다면, 다시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이 주인인 가정, 하나님의 주도하는 나라, 민족공동체가 얼마나 큰 축복과 은혜를 받는 지 잘 압니다. 낙심하지 말고, 힘들어도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잘 극복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나의 온 가족이 구원 얻기까지 동일하게 쉬지 않는 분이십니다. 모든 가정이 다 예수 믿고 구원받고, 모든 가정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는 가정이 되기까지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가 되면 언제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이 소원을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둘째, 화목한 가정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가정을 위한 솔로몬의 노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어떻게 보면 잘 연결이 되지 않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 뜻이 가정과 연관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가정에서 여러 생활을 하는데 아마도 그 중에 가장 귀한 것이 잠을 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보금자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가정이 편하게 쉬는 보금자리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어느 때 잠을 자지 못합니까? 물론 몸의 이상으로 불면증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문자그대로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고 했으니까, 혹이라도 불면증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니까 하나님이 잠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몸의 이상으로 생기는 불면증 말고 또 어느 때에 우리가 잠을 자지 못합니까? 그것은 마음이 편하지 못할 때, 그러니까 화목하지 못할 때입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녀가, 형제와 형제가 다투고 싸워서 마음의 분을 삭이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아마 그런 경험을 종종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하나님이 잠을 주신다는 말의 의미는 화목을 강조하는 뜻입니다. 화목, 평화, 평안, 화해, 바로 이것이 보금자리를 만드는 방법이고, 그런 가정이 될 때 비로소 편하게 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가장 귀하게 새겨야 할 단어가 ‘화목’입니다. 신앙생활도 어떻게 보면 화목, 화해, 평화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아주 귀하게 강조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도 결국 화해가 이루어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사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은 우리와 하나님사이의 화목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이것을 잘 설명했습니다. “그는 또 우리의 화평이 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반복하는 것이 예배인데, 예배도 역시 화목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화목한 상태에서의 예배와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의 예배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자체가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이루는 현장이기에, 인간사이의 화목도 예배자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화목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가정과 연관해서 화목을 강조하는 말씀이 잠언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肉饍)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성경은 이처럼 우리 신앙과 삶에 화목을 강조합니다. 특히 가정의 화목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가 가정을 보금자리를 만들어 편하게 쉬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화목을 마음에 담아야 하고, 화목을 추구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매일 매일의 삶이 화목해야 합니다. 물론 가정도 공동체이기에 의견이 다를 수 있어서 다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다툼이 없기를 위해서도 물론 기도해야 하지만 그 갈등과 다툼을 풀고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장은 갈등과 다툼을 푼 현장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권면 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아주 귀하게 새길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도 있고, 물론 다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오래가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결국 오래가는 것은 마귀로 틈을 주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제 금년 한해 우리 가정의 화목을 소원으로 품고 나의 역할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자녀의 축복이 있는 가정입니다. 본문은 가정에 자녀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고, 태의 열매는 하나님의 상급이요, 축복이요, 은혜라고 말합니다. 특히 이런 자녀가 ‘전통’에 가득한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전통은 화살을 담는 그릇을 말합니다. 화살을 담는 그릇에 화살이 가득한 것이 당시 얼마나 든든해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연상하며 이렇게 자녀가 많은 것이 축복임을 선언합니다. 물론 지금은 다르지만, 당시는 그랬습니다. 자녀가 많은 것이 물질보다, 어떤 재산보다 풍성한 축복이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바로 자녀의 축복을 강조합니다. 가정에 자녀가 있고, 자녀들이 잘되는 것을 꿈꾸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소중한 기도의 제목이 또 있을까요?

  이번 대심방을 하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성도들의 가정의 기도제목가운데 자녀가 달라는 기도가 상당히 많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지금 우리 나라만해도 저 출산률 세계 1, 2를 다툽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입니까? 불과 몇 십 년 전 만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정마다 아이들이 많아서 이러다가 인구가 넘친다고 해서 아이를 그만 낳자고 계속 홍보했는데, 요즘은 아이를 낳으라고 권장합니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많은 혜택을 준다고 정부가 발표했습니다. 어제 신문도 일면에 11명의 자녀를 가진 어떤 다둥이 가정을 톱으로 실었습니다. 요즘 유치원마다, 학교마다 아이들이 없어서 심각합니다. 아이를 낳으라고 강조해도 잘 낳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회가 이제는 점점 개인주의화로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때, 우리의 가정에 아이를 낳기를 위한 소원을 품고 출발한다는 것만큼 귀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아름다운 소원을 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금년에 소원을 품고 아이를 낳기 위해 기도하는 모든 가정에 자녀의 선물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자녀를 낳는 것만 소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이 잘 되어야 합니다. 자녀가 잘 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합니다. 미국에 이민을 간 한인을 보면, 자녀를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수고하는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자녀의 성공, 그것 뿐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늘 있습니다. 부모보다 자녀가 잘되는 것을 믿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계속해서 밑으로, 아래로, 흘러가야 합니다. 부모보다 자녀가 잘 되고, 자녀보다 또 다음세대가 더 잘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소원을 품고 한해를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소원입니다. 모든 자녀들이 믿음 위에 든든히 서서, 가문을 빛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쓰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날마다 기도해야 하고, 그런 자녀가 되기를 위해 먼저 부모가 잘하고 수고해야 합니다. 바로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을 축복으로 인도해 가실 것을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정공동체를 향한 우리의 소원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주도하고 주인이 되는 가정,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 그리고 자녀가 잘 되고 축복을 받는 가정입니다. 새해 이런 소원을 품으면서 시작하시고, 이 소원을 꼭 이루는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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