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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심코 버린 삶들 (요 4: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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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상에서 읽은 예화.
“어느 깊은 밤, 한 젊은이가 강가에서 돌이 가득 담긴 자루 몇 개를 발견하였습니다. 젊은이는 강가에 앉아 자루 속에 담긴 돌을 하나 둘씩 꺼내 무심코 강물 속으로 던졌습니다. 어느덧 모든 자루를 다 비우고 몇 개가 남았을 즈음 환히 아침 햇살이 비쳤습니다. 이때 그곳을 지나가던 이가 이 장면을 보면서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젊은이가 던지고 있는 것은 돌이 아니라 다이아몬드였기 때문입니다.”
어떠세요?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게 다이아몬드라니?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요? 그동안 우리는 살아오면서 무심코 버린 값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간. 80세 된 할아버지가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70세 된 할아버지도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그런데 그 10년, 20년, 30년도 더 젊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냥 그 시간들을 무심코 버리고 있지 않은가?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는 세월과 하나님께서 엮어주신 사랑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될 가르침들을 돌멩이인줄 알고 한 자루 두 자루 세 자루 그렇게 다 비우고, 이제 몇 개를 남긴 순간에서야 그 모든 것이 큰 실수였음을 알고 탄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나는 과연 내 인생의 결실을 맺고나 있는지?”
그래서 또 한 번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물어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적도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으킨 엄청난 사건들을 공관복음서들은 ‘기적’으로 표현하였는가 하면, 요한복음은 ‘표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것은 기적 자체보다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가리키는데 그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일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누가 이일을 일으키셨느냐에 촛점을 두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역시 그런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의 출발점은 물입니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셨고, 여인은 “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엉뚱하게 “네가 하나님의 은사를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며,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누가 물을 달라 했는데 예수 아닌가? 그런데 이제는 거꾸로 예수님 자신이 생수를 주실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애당초 물 달라 하지 말았어야지요.
그래서 여인은, “선생님,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또 우물도 깊은데 어떻게 나에게 생수를 구해 주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또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은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요한복음은 단순히 물 하나 놓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물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시는 물, 마시고나면 또 목이 마르는 그런 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수가 있는데, 예수님이 바로 그 생수를 주실 분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생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대화가 있은 후 여인이 물었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 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 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니고,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여인이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말하자면, “내가 바로 너가 기다리는 메시아다.”라고 하십니다.
“물을 달라”는 일상적인 대화의 시작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고 믿게 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인에게 예수님은, 처음에는 유대 남자, 그 다음에는 예언자, 마침내 오실 메시아로 고백하게 합니다. 마시는 물 역시,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 영생에 이르게 하는 영생수로 바뀌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하던 여인이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먹을거리를 사라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랍비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 몰래 숨겨 놓은 양식이 있단 말인가? 또 양식이 있다면 우리가 사러갈 때 가지 말라 하고 그때에 양식을 내 놓으셨어야지. 기껏 사오니까 나한테 있다는 또 뭔가?”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자들은 압니다. 예수님께서 먹을거리가 없다는 걸. 그래서 제자들은 서로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님의 양식은 세상의 물이나 세상의 떡이 아닙니다. 그분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 그 보다 좋은 생수를 주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의 떡? 보리 떡 다섯 개만 있어도(그것 없어도 가능 하시지만) 5천명에게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실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제자들이 권하는 그런 양식 하고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 곧 사람들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뜻과 제자 곧 사람들의 뜻이 달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도 그랬습니다.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사마리아 여인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목마르지 않을 생명수를 말씀하시는데 여인은 두레박으로 퍼 올리는 물만을 생각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양식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임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돈 주고 사온 음식인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생각과 일치 합니까?
우스갯소리처럼, 밤새도록 울다가 아침에 “누가 죽었지?”  하는 거 아닙니까? 그동안 신앙생활 한다고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봉사도 하고 그러다가도 “예수님이 누구지?” 그러는 거 아닙니까? 정말 가려운 자기 다리 굵어야 하는데 남의 다리를 긁고 있는 것 아닙니까?
주님의 뜻, 주님의 일과는 전혀 다른 신앙생활. 그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은 믿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믿으면 받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초점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뭘 모르면 맹목적인 믿음이 되는 겁니다. 이단, 삼단 그래도 “아무렴 어때. 내가 믿는 믿음이 중요하지. 어디서나 내가 열심히 믿으면 되는 거지” 그럽니다. 그래요? 내가 열심히 믿기만 하면 되나요?
기독교의 초점은 믿음에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 있는 겁니다. 내가 열심히 믿으면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도행전 4:12에,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곧 예수) 밖에는 달리 없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교훈과 삶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일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요한복음 5:30,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라시는대로 심판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구원은 요한복음 19:30,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예수님의 양식이었습니다.

양식은 매번 필요한 겁니다. 한 번 먹고 영원히 안 먹는 것 아닙니다. 수시로 먹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이 양식이라 할 때, 그것은 어느 날, 혹은 먼 훗날 한번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 순간순간 마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 순간순간마다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식은 또한 생명입니다. 양식 없으면 죽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 그것은 생명 걸고 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양식만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31-33,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양식이 뭐냐? 먹는 것 마시는 것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식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두 개의 격언을 인용하셨습니다.
그 하나는 35절입니다. “너희는 추수 때가 오자면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된다고 말하지 않느냐?”
보통 유대인은 1년 농사 주기를 6등분 합니다. 파종기, 겨울, 봄, 추수, 여름 그리고 폭염으로 나누어서 한 주기가 2개월씩 지속됩니다. 예수님은 이 1년 농사 주기를 근거로 하여 “너희들은 씨를 뿌리면 추수하기까지 적어도 4개월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씨를 뿌리고 추수 하는 데는 적어도 4개월이 걸립니다. 이것은 자연 질서요, 법칙이요,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밭을 보아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추수 때가 4개월 뒤가 아니라 ‘지금’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4개월 뒤가 아닙니다. 지금입니다. 은혜의 세계에서는 4개월이란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입니다.

물론 아직 추수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추수해야 할 것을 보셨습니다. 30절, 예수님과 대화하던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서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 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이 동네에서 나와서 예수께로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을 향해 모여드는 그 사람들을 보신 것입니다. 들녘을 가로질러 예수님께 나아오는 그들이 마치 추수를 기다리는 익은 곡식처럼 보였던 겁니다. 그들을 거두어들이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일이며, 그들을 거두어들이는 그것이 곧 예수님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예수님은 들판의 곡식에 대한 추수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영혼에 대한 추수를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들판의 곡식은 씨를 뿌리고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 추수합니다. 그러나 영혼에 대한 추수는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 거두어 들어야 합니다.
이 ‘지금’은 언제나 ‘지금’입니다. 어제 저녁은 어제 저녁이 지금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은 오늘 아침이 지금이었습니다. 내일은 내일이 지금이 됩니다. 내가 숨 쉬고 있는 지금이 곧 지금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숨 쉬고 있는 지금이 곧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은혜의 때에 나는 네 말을 들어 주었다. 구원의 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산하고 또 기다립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추수요, 열매요, 보상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보장되지 않거나 불확실하면 씨를 뿌리지도 땀을 흘리지도 않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 보장 없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추수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전도할까? 29절, 사마리아 여인이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라고 말한 것 같이 하는 겁니다.

지방 어느 장로님이 “진주제일교회 교인들은 참 행복하겠다. 좋은 목사님, 사모님을 만났으니” 그 말을 들을 때 기분 좋더라구요. 그런데 그들이 좋은 목사인지 사모인지 어떻게 알아요? 아마도 우리 교인들이 좋은 목사, 사모라고 말했지 않았겠어요?
전도는 바로 그런 겁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예수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본문의 또 다른 격언이 37절입니다.
“한 사람은 뿌리고 한 사람은 거둔다.”
그런데 이 말씀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시편 126:5-6에, “눈물을 흘리며 씨 뿌리는 자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 씨를 담아들고 울며 나가는 자 곡식 단을 안고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 말하자면,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는 동일 인물입니다. 한 사람입니다 그래야 맞습니다. 내가 거둔다고 생각되어야 내가 씨를 뿌리는 거지, 다른 사람이 거둘 걸 내가 왜 씨를 뿌리느냐 말입니다. 내 수고로 얻게 될 열매를 다른 사람이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아야 하고, 한 톨이라도 손해 보고는 견딜 수 없이 하는 야무진 현대인에게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각각 별개의 사람이라는 것은 결코 납득 될 리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은 그 말이 옳다고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옳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땀 흘리고 심고 가꾼 적이 전혀 없는데도 다른 사람(전혀 모르는)이 수고하여 맺은 결실을 수확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국립묘지에 잠든 무명용사들의 희생, 4.19탑 아래 묻힌 200에 젊은 청소년들의 죽음, 이 땅의 7.80년대에 인권신장과 민주화 운동을 펼치다 고문당하고 온갖 것을 빼앗긴 사람들, 그들의 죽음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면,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심고 맺은 열매를 따서 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 또한 이미 심고 가꾸어 온 수많은 신앙인들과 전도자들의 땀과 희생의 결실인 것입니다.

한국 교회 대형화를 자랑합니다. 서점에 나가면 목회 성공 사례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와 잇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부흥은 “겉보리 서 말이라도 부르면 간다.”는 각오와 신앙으로 일구어 온 선배 목회자들의 땀과 기도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열매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든, 자기 자신이 수고해서 거두든, 남이 수고한 것 거두든, 거둔다고 하는 것, 추수한다고 하는 것, 열매를 따먹는다고 하는 것은 신나고 기쁜 일에 틀림없습니다. 허지만 심는 자, 뿌리는 자가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더군다나 추수하는 자가 따로 있다면…….
심는 자, 뿌리는 자의 기쁨 그것은 내다보는 기쁨입니다. 내가 심고 가꾼 것의 열매를 어느 누군가가 추수하며 기뻐하리라는 것을 앞당겨 지금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심고 뿌리는 일 그 자체만으로도 지금 마냥 기뻐하는 겁니다.

철인 스피노자는 “나는 내일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오늘은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는데 바로 그런 사람. 노자가 말한 “공성이불거” 곧 공을 세우고도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 사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왼손이 하는 것은 다른 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들이 갖는 기쁨인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헌금 많이 하면서도, 누구보다도 교회에 큰 공적을 세웠으면서도, 어느 누구보다도 신앙 경력이 깊고 신앙 체험이 많음에도, 그 열매를 스스로 거두지 않으려는 사람은 심고 뿌리는 그 자체로서 기뻐할 수 있는 신앙입니다.

12월 초겨울. 어떤 사람이 산길을 가다 꽤나 폭이 넓은 개울을 건너야 했습니다. 신발을 벗고, 바지를 올리고, 그 차가운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그 개울을 건널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돌아 올 까닭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는 가던 발길을 멈추고 돌을 주어다가 징검다리를 놓았습니다. 발은 시리지만, 돌을 무겁지만, 입고 있는 양복에 물도 튀고 흙도 묻었지만, 그는 징검다리를 다 놓고서 빙그레 웃으며 제 갈 길을 갔습니다. ‘내 뒤에 오는 사람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나처럼 신발을 벗지 않아도 될 것을 앞당겨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그는 징검다리를 놓은 것입니다.

38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려고 너희를 보냈다. 수고는 남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고 하십니다.
인류의 구원, 그 씨를 뿌리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의 복음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전파되었고, 그래서 우리도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구원 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들이 또한 거두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나아가 복음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전도하는 것, 그것은 곧 거두는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면 36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씨 뿌리는 이와 거두는 이가 함께 기뻐 할 것”입니다.
씨 뿌리는 것과 거두는 것은 언제나 되어져야 합니다. 세상의 추수는 씨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가 따로 있지만, 영혼의 추수, 은혜의 추수는 씨 뿌리는 것과 거두는 것이 언제나 동시입니다. 뿌리면서 거두고 거두면서 뿌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 건강, 물질, 지식, 하나님의 사랑 등등 이 귀중한 것들 무심코 돌멩인 줄 알고 버려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은 것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이니까. 내 나이 몇이 되었든 ‘지금’입니다. 내 형편이 어떻든 ‘지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 곧 예수님의 생명을 건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양식이요, 생명 걸고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식 그것이 또한 여러분의 양식이 되시길 축원 합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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