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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창조적 소수 (민 13:25~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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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혼란과 위기 그 자체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그러합니다.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반미 친북 좌파들이 민주인사로 인정을 받고 사는 세상입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습니다. 청년 실업자는 매년 늘어나고 있습니다. 서민들은 먹고 살기가 힘이 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혼란과 위기 상황으로 깊숙이 빠져들어 가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J. 토인비는 "한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사회가 새로워 질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의 위기를 자기의 온 몸으로 느끼는 용기 있는 사람들의 헌신과 결단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그들이 바로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하고 자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실 때, 무의미한 다수를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창조적 소수를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정탐꾼들이 40일간의 정탐을 마치고 바란 광야 가데스에 돌아와 온 회중 앞에서, 그들의 정탐 활동을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정탐활동의 보고가 있은 후, 그들에게 갈등과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열명의 정탐꾼의 보고와 두 명의 정탐꾼의 보고가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는데 무의미한 다수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창조적인 소수, 즉 여호수아와 갈렙을 택하시고 사용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창조적 소수는 어떤 사람입니까?

Ⅰ.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창조적 소수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온전 히 의뢰하는 자입니다.

열 지파의 정탐꾼들의 보고는 가나안 땅의 토질과 생산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것이었으나 그 땅을 공략함에 있어서는 부정적이었습니다. 본문 27과 28절에 보면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나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우리가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그 땅의 거민들이 장대할 뿐만 아니라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보고는 사실인 것도 있지만 과장된 보고였습니다. 그들은 처음 보고와는 달리 가나안 땅을 악평하여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땅의 백성들은 모두 다 신장이 장대한 대장부들이고 자기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도저히 상대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두 지파의 정탐꾼은 우리가 능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본문 30절에 보면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하였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과 두 명의 정탐꾼이 서로 다른 보고를 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정적인 보고와 긍정적인 보고를 하게 된 배경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정적인 보고를 한 열 명의 정탐꾼들은 사물의 현상만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았습니다. 육신적인 눈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를 느꼈던 것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장대한 거민과 견고한 성읍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고 반석을 처서 물을 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선한 역사를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왜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백성들을 불신앙으로 이끌고 갔습니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했습니까? 저들은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들은 같은 기간 동안 같은 장소에서 정탐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서로가 엄청난 다른 보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명의 정탐꾼들은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싸움도 하기 전에 심리적으로 이미 패배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두 명의 정탐꾼들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하였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육신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았습니다. 현실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보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였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룰 수가 있습니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 보면 "…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창조적 소수는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Ⅱ.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창조적 소수는 미래에 대한 확실한 꿈과 비전을 가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과거를 회고하였습니다. 민수기 14장 4절에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전에도 애굽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민수기 11장 5절에는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11장 6절에서는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먹는 일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원망의 선을 넘어서 애굽으로 돌아 갈 것을 원했을 뿐만 아니라, 모세가 아닌 새로운 지도자(한 장관)를 세우자고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했던 것입니다. 왜 저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을까요? 저들의 애굽 생활은 결코 행복한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비참한 노예생활 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은 것은 저들에게 꿈과 비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민 14:4). 현재의 고난 때문에 미래로의 목적의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창조적인 일은 꿈과 비전이 없이는 결코 이룰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 꿈과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고통과 희생이 수반되지 않고는 결코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특별한 사람과 보통 사람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특별한 사람과 보통 사람과의 차이점은 그가 가진 재능이나 지식의 유무가 아닙니다. 그가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인생을 결정짓는 열쇠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비록 노인이지만 청춘으로 살아가고, 꿈이 없는 사람은 비록 청년이지만 노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꿈이 천박한 사람은 천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꿈이 고상한 사람은 고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꿈이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꿈이 역경을 이겨내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그러했습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큰 꿈과 비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고상한 꿈 소망의 꿈을 꾸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어려운 형편만을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사의 주인공이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택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예비해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형편 자기의 능력 자기의 치수에 맞추어서 사건을 보거나 사리를 판단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회 일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교회의 일, 하나님의 일을 자기의 형편, 자기의 능력, 자기의 치수에 맞추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잣대를 재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현재보다 더 발전되고 향상된 내일이 우리 앞에 있음을 바라보고 그때를 대비하는 안목을 가지고 생각하며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신명기 1장 11절에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배나 많게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60장 22절에는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조적 소수는 미래에 대한 확실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꿈과 비전이 없는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꿈과 비전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확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불신앙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거나 이루어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답답해서 꿈도 비전도 확신도 믿음도 없는 이런 불신앙의 사람을 데리고 일 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아십니까? 꿈도 없고 비전도 없고 미래도 없고 소망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 여러분 모두는 꿈과 비전을 가지고 미래 지향적인 사고를 가지시고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창조적 소수가 받아 누리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Ⅲ.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창조적 소수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기쁨으로 수 고하고 희생합니다.

꿈을 가진 사람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꿈을 가지고 있어도 대가를 치루지 않은 사람의 꿈은 개꿈이고 망상입니다. 꿈이 크면 클수록 그 대가도 크게 치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땀과 희생과 눈물의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오해를 받고 바보 취급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당하는 고난은 사실은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땀과 희생과 눈물의 대가가 기쁨으로 나타나고 기쁨으로 승화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므로 능히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용기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참된 용기는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성경은 신앙의 세계를 논할 때 언제나 인간 지식 이상의 신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렇지만은 신앙의 세계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전혀 다른 특별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말하게 될 때 불안전한 인간의 한계성을 넘어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완전하심에 근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장 23절에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스가랴 4장 6절에서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못하나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항상 인간으로는 할 수 없으되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다고 하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어느 때나 어떤 일이나 하나님께서는 부정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에게 역사의 어느 한 부분도 맡기신 일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그 일(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기쁨으로 수고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이런 자세야말로 성공의 비결이며 구원받은 성도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창조적 소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의미한 다수를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창조적인 소수만이 하나님 편에 서서 이 다수와 싸웠습니다. 그러면 그 창조적 소수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창조적 소수의 원형입니다. 그리고 창조적 소수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바로 창조적 소수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창조적 소수인 것입니다. 창조적 소수인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실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기쁨으로 수고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눈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 "운동장에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느뇨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가 받는 상급의 존귀함을 가리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4). 이 상은 생명을 바쳐 자기 사명을 완수한 충성스러운 종들이 받는 최고의 자랑입니다(계 2:10). 이 한해에도 갈보리인에게 맡겨주신 귀한 사명들을 잘 감당하므로 인하여 주님으로부터 잘 했다고 칭찬받고 축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  (류근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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