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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과 요나단 (삼상 20:1-11, 롬 12:14-21, 요 15: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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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친구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신 대로 친구 된 우리를 위하여 그 목숨을 버리시므로 가장 큰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았노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이 놀라운 사랑 즉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을 알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되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형제자매 된 우리끼리 먼저 피차 뜨겁게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면 비로소 세상 사람들이 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말하기를 “사랑”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달고 다닐 뺏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랑중의 하나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에 대하여는 이미 많이 언급을 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요나단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아들로서 왕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시골출신 목동 다윗과 우정을 나누었고, 그 우정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요나단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요나단은 옳고 그름에 대한 공정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친구 사이에서 누가 내 편인가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옳고 그름을 떠나 내편이면 무조건 옳다고 하고 내편이 아니면 비록 옳은 것이라도 무조건 반대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비록 왕이요 또 아버지이지만 옳지 않은 일에 대하여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판단력을 가지고 그는 부왕의 잘못에 대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진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나단이 자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부자의 연을 무시했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잘못에 대하여는 눈물을 머금고 분노를 터뜨리면서도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효자였습니다. 우리가 혹 서로 간에 의견의 충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방법론에 관한 것이어야지 그것 때문에 사람을 적대시하거나 원수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로 요나단은 끝까지 신의를 지킨 사람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다윗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다윗은 기가 막히도록 왜곡된 삶의 현실에서도 하나님께서 요나단과 같은 사람을 보내주셔서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울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반대하고, 교회 일에 비협조적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요나단과 같은 사람도 보내주십니다. 그리하여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고,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더해 주십니다.

바울이 처음 예수님을 믿고 예루살렘 제자단을 찾아갔을 때, 바울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아무도 선뜻 그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이미 옛 소속 교단인 유대교를 떠난 바울이 새로 입교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도 말하자면 “왕따”를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울에게는 엄청난 위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를 따뜻이 환영해 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바나바 때문에 나중에 가장 위대한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이런 따뜻한 마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그럼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어떤 것입니까?

(1) 그것은 마음과 마음이 하나된 우정입니다.

삼상18:1에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습니다. 개역 한글판 성경에는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슬로 고리가 맺어져 끊어질 수 없이 연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새즈믄 우리말 구약정경”에서는 “요나단의 심정과 다윗의 심정이 서로 결속되었다”고 번역했습니다.

우리 동양속담에 “얼굴을 아는 이는 천하에 가득하되 마음을 아는 이는 몇 사람이나 될까?”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마음을 툭 터놓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전두환 정권 시절에 “以心傳心”이란 말을 엉뚱하게 사용하기도 했지만 정말 이심전심의 우정이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정에는 그들의 일치된 여호와 신앙, 대장부다운 기개, 그리고 나라를 위하는 애국심의 일치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교회를 위하는 열심과, 그리고 인격을 귀하게 여기는 그 사랑으로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2)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역경에서 오히려 결속되었습니다.

정말 다윗을 시기하고 대적해야할 사람은 사울이 아니라 차기 왕권계승자인 요나단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한 반면 오히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고 그를 변호하고 나중에는 다윗을 지켜주려고 하다 자기 목숨까지 잃을 뻔 했습니다.

다윗이 위기에 처했다고 해서 요나단이 그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내가 잘되면 박수를 아끼지 않고 내 주위에 몰려들지만 내가 어려움에 빠지면 가차 없이 외면하고 비판자가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이 매우 어려울 때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를 돕기 위해 나서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우정입니다. 서양 속담에 ‘어려울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그들의 우정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a.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냥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라 “주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b. 그들의 목표가 일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목표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단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패거리처럼 끼리끼리의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지혜에 일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 서로 사이에 이런 친구관계가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c.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는 서로 숨기는 것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심정을 요나단에게 털어 놓았고, 요나단은 다윗을 위한 정보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다 알려주셨듯이, 우리가 주님 앞에서 우리의 속마음을 숨김없이 털어 놓으면 여기 주님과 나 사이에 정말 밀도 깊은 사랑 관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주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투명한 관계를 말합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고, 이렇게 하나 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시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친구이신 것을 아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친구 되신 우리 주님을 더 가까이 사귀고, 그에게 여러분의 모든 사정을 숨기지 말고 다 알려드리시기 바랍니다. 이미 우리 위해 목숨을 버리신 우리 주님은 이제도 우리를 위하여 모든 도우심으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서로 사이에 주를 믿는 믿음과 주의 사랑으로 연결되는 친구관계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 서로를 위로하고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3.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살필 것은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와 요나단이 속한 베냐민 지파의 역사적 관계입니다.

옛날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 형들이 양식을 사러갔다가 당시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이 그들을 간첩이라면서 베냐민을 데려오도록 해서 그 베냐민을 애굽에 억류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때 베냐민 대신 억류를 자청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유다였습니다.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관계는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전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요나단과 더불어 세운 언약 때문에 자비를 베풀어 그들의 땅을 회복해 주었습니다. 훗날 솔로몬이 죽고 그 아들 르호보암 왕 때 남북이 분열되었습니다. 그때 유대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가 여로보암을 따라갔지만 베냐민 지파만은 유다지파와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천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유다지파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이 복음은 단지 유대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거되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직계제자들은 모두 순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세계적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역을 위해서 선택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가 바로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이 유다 지파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박해하고 진멸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눈이 멀어질 만큼 밝은 빛을 받고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고 하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놀라운 모습으로 자기 앞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신 것을 알고 그는 그 앞에서 완전히 항복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철저하게 예수 맨이 되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에서 사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게 사는 이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이전에 좋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목숨을 주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상에 편만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지극한 우정을 말할 때 흔히 “관포지교”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서양 사람들은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을 말합니다. 이 놀라운 우정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얼마나 놀라운 역할을 했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이에 이런 사랑으로 우정관계가 맺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그의 일을 크게 이루시게 될 줄 믿습니다.

요나단의 위치에서 볼 때 다윗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우정이 이런 인간적인 판단을 뛰어넘게 했고, 그들은 하나님께 가장 귀하게 쓰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세련된 바리새인 바울의 위치에서 나사렛 예수는 아무것도 아니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을 때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그의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실 때, 먼저 우리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의 도구로 들어 쓰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그의 친구인 것을 확인하시고 더 좋은 친구 되기 위하여 여러분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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