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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훈련: 성경-언어 (행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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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일 저녁, 나는 남미 콜롬비아로 떠납니다. 헌 옷가지나 신발 등을 깨끗하게 세탁해서 가져다주시면, 콜롬비아 교인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전달할 교회는 보고타 달동네 개척교회입니다. 우리교회가 땅을 구입해 주었고, 매달 목회비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민가방 두 개 분이 필요합니다. 

나의 소망은, 나의 간절히 바라는 소망은 나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분,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시는 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한 소원이 있습니까? 무엇을 얻으려고 그분 앞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분을 만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그런 소원을 품고 있습니까?

우리 인생 여정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고단하고 힘들어도, 우리 삶은 충분히 견디고 이겨야 할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곧 하나님을 만나 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 그것은 기도입니다. 조용한 시간, 고요하게 주님과 동행하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과의 시간을 참으로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 시간은 보석입니다. 그 시간을 위해 우리는 수고하고 땀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다듬은 언어, 하나님을 만나 뵙고 드리기 위해 준비한 언어, 이런 언어로 살아가는 삶은 복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성경말씀으로 갈고 다듬는 우리의 언어생활입니다. 어떻게 말을 하고 살아갈 것인가?

말이란 무엇을 전달하고자 만들어진 것입니다. 무엇을 전달할까요? 내 속에 있는 무엇을 말하고 싶습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배운 사랑, 그 사랑을 전달하려고 입을 여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말하고 싶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 사람의 언어는 대단히 복잡한 구조를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문법을 사용하고, 논리를 이용합니다. 여러 개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렇지만 오해의 여지가 곳곳에 스며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별로 말이 없어도 대화가 됩니다. 논리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합니다.

오늘은 두 가지 차원의 ‘언어활동’을 이해함으로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하나는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의 언어활동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언어로 ‘합의’하고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벌을 받아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사방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2. 다른 하나는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의 언어활동입니다.
합심하여 기도하다가 오순절 날 방언을 받았습니다. 사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그들의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통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교회의 시작점을 바로 이 오순절 성령체험에 두고 있습니다. 이때로부터 비로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서 굳건히 섰습니다.

방언은 무엇입니까? 기도하다가 방언을 체험하셨습니까? 그것은 새로운 언어생활 경험입니다. 방언을 체험한 사람은 말을 한다는 것의 다른 깊은 차원을 여행한 사람입니다.

방언을 사모하는 사람은 정말 놀랍습니다. 대부분 간절히 사모할 때 방언을 받습니다. 방언을 체험하고 나면 정말 예수님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방언을 못해.’ 그런 부담을 가진 분이 있습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은 모두 ‘방언’하는 사람입니다.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이제부터 ‘언어가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방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설령 혀가 말려들어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낸다고 해도, 그 뜻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 얼굴의 기쁨과, 그의 삶의 변화가 그 말의 뜻을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방언하는 사람은 투명해집니다. 단순해집니다. 그러므로 복잡하지 않고,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바벨탑 사건을 돌아봅니다. 옛날 옛적에, 하나님과 만나기를 거절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대적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악한 목적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하늘 꼭대기에 닿는 탑을 쌓자고 제안했습니다. 모든 지식과 지혜를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바벨탑으로 인해 언어가 혼잡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것입니다. 서로 알아들을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서로 반목하면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모든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120명의 성도들이 기다리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써 서로서로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졌습니다.
언어는 입으로만 하지 않습니다. 바디 랭귀지를 주목하십시오.

언어의 변화를 주목하십시오.
성령님의 다스림 없는 언어는 찌르는 무기입니다.
말로 상처 받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세 치 혀가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무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그 말이 달라졌습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늘 이렇습니다: “성령님이시여, 나의 혀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1. 일상생활의 언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구별할 때 무엇이 기준이 되겠습니까? 옛날에는 옷 입는 것이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생활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어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을 그리스도인답게 해야 합니다. 언어의 다스림이 있어야 합니다. 감정에 따라 말하지 않고, 그걸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영적 언어
영적인 언어생활은 무엇입니까?

‘감사’가 있는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누구나 사용해야 할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는 사람이니까, 그분 앞에서는 늘 ‘감사’ 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하나님 앞입니다. 거리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병원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말을 조심해서, 가려가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가까운 데 세븐 일레븐이 있습니다. 새벽예배 가는 길에 자주 들러 커피와 쿠키를 삽니다. 그런데 종업원들이 한결같이 ‘Thank you'를 하지 않습니다. 얼마간은 나 혼자 하다가 그만 화가 났습니다. “나 혼자 감사를 말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지난 주였습니다. 들릴락말락하게 ‘Thank you' 하고 나오는데 귓등에 ’Thank you'가 들렸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그 자리에 서서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이미 다른 손님의 가격을 찍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고맙던지.

“감사합니다.” Thank you. 이건 정말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의 수고를 인정하는 말입니다.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하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날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사하신 분이십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사람도 참 감사한 존재구나!”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도와주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혼자서 세탁하고, 혼자서 빵 구우면서 살아갈 수 없게 된 세상입니다. 서로서로 감사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지어내셨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는 필요한 말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형제-자매 여러분, 감사합니다.”

‘찬송’
입에 찬송을 달고 살아야겠습니다.
찬송의 궁극적 내용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 자랑입니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3. 긍정적 언어생활
긍정적인 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네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 모든 편지는 ‘감사’와 ‘찬양’ 그리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빌립보서의 경우를 한 예로 듭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건 명령입니다. 상황에 따른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기뻐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세상을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기쁨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김활란 박사는 임종의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나를 위해 울지 말라. 찬송을 드려라. 내가 천국에 가는 데 슬픔이 왜 필요하냐?”

어떤 성도가 사랑하는 식구를 떠나보냈습니다. 슬픔에 젖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식구가 천국에 가셨습니다. 이제 성도님의 삶에 천국은 한층 더 구체적인 소망이 되었습니다. 가고 싶은 곳, 그리운 곳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성도님이 사랑하는 그분이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은 그 언어생활이 밝고 소망이 있습니다.

말이 행동을 낳습니다.
말은 마음에서 납니다.
마음은 영적 상태로 결정됩니다.

성령님께서 감동 주시기 전에는 말하지 맙시다.
그럴 때는 ‘침묵이 금’입니다.

성령님께서 감동 주셨을 때는 입을 엽시다.
그 때는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다’입니다.

방언과 사랑의 관계가 고린도전서 12-14장에 들어 있습니다.

방언은 본래 ‘알아듣게 하자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의 본질에서 벗어납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은, 그 방언을 통해서 서로서로 마음을 나누게 되고, 영적인 기쁨을 서로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인간은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후,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님께서 임했습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그들은 제자들이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서로서로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온 세계가 한 형제-자매가 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사랑의 언어는 성령님의 선물입니다.
누구도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사랑의 언어를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에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 기쁨은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입니다. 성령 충만의 증거입니다.

입을 열면 기쁨의 언어가 쏟아져 나옵니다.
금문교회는 기쁨의 언어가 충만한 교회로 자라가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모든 기준은 하나입니다. 그의 언어생활입니다.
말이 조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함께 일할 사람, 함께 살 사람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말이 품는 것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말은 성령의 은혜로 감동되어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을 거역할 때 언어가 혼잡하게 됩니다. 함께 있을 수가 없어집니다.

성령님의 감동이 있을 때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가장 주의하여 훈련해야 할 몇 가지 중 하나는 “언어”입니다.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나님이시여, 저의 입술을 성령의 불로 태우셔서, 정결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주신 말씀만 전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결론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언어생활로

1.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까?

2.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선 사람으로서 우리는 말에 깊은 의미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교회의 일원입니다. 성령님의 감동에 따른 말을 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 훈련의 몇 가지 단계 가운데 언어 훈련에 대해 전했습니다.
(조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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