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바울의 신앙을 본받자 (행 20:17-24)

  • 잡초 잡초
  • 410
  • 0

첨부 1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설립자인 [에드워드 요나단] 목사와 당시 술집을 크게 경영하다 알코올 중독자로 죽은 [마이크 슐츠]라는 사람의 5대손을 조사하여 자료를 보고한 것을 보았습니다.

[에드워드 요나단] 목사 가문
  목사와 선교사 : 116명 
  교수와 총장 : 86명
  문필가 : 75명
  상하 의원 : 4명
  부통령 : 1명
  실업가 : 73명
  발명가 : 21명
  장로와 집사 : 286명

[마이크 슐츠] 가문
    교도소 수감 생활자 : 96명
    알코올 중독자 : 58명
    창녀 : 65명
    정부보조 극빈자 : 286명
    불량 무식한 자 : 460명

[에드워드] 목사님의 5대 후손에는, 목사와 선교사가 116명이 나왔고, 86명의 교수와 총장이 나왔고, 문필가가 75명, 상하 의원이 4명, 부통령이 1명, 실업가가 73명, 발명가가 21명, 장로와 집사가 286명이 나왔습니다.
한편 술집을 경영하다 알코올 중독자로 죽은 [마이크 슐츠]의 5대 후손 1.000명을 조사해 보았더니, 교도소 수감 생활을 한 사람이 96명이 나왔고 알코올 중독자가 58명, 창녀가 65명, 정부보조 극빈자가 286명, 불량 무식한자가 460명, 사고로 낭비한 연방 정부의 돈이 그 한사람의 씨앗에서 나온 사람들을 위해 1억 5,000만 불의 손실이 났다고 합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맺는 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예수님도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가시나무에서 포도열매를 따겠느냐? 좋은 나무라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 는 말입니다.
열매가 좋지 아니하면, 좋은 나무라 말할 수 가 없습니다.
종자가 같아야 같은 열매가 나옵니다.

***** 어미 닭 품에 꿩알, 오리 알, 계란을 넣어서 3주 동안 품게 했습니다. 3주 후에 알에서 새끼가 부회되어 나왔는데 꿩알 속에서는 꿩 새끼가 나오자 산으로 기어가고, 오리 알 속에선 오리새끼가 나오자 물로 들어가고, 병아리만 어미 닭 주변을 돌더랍니다.
종자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모습은 생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함은 생활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하면서, 변화된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어딘가 신앙이 병들었거나 참된 변화가 없는 신앙임을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합니다.
신앙은 변화되는 것이지 꾸며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변화만이 새사람이 됩니다.

돼지에게 양의 가죽을 씌웠다고 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겉모습이 양처럼 보여도 본질이 돼지이기 때문에 돼지가 좋아하는 시궁창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요즘 돼지새끼를 애완동물로 많이 키운다고 합니다.
하루는 돼지새끼에게 목욕을 시키고 목에 리본을 달아주고 발톱에 메니큐어를 칠해서 안고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이 돼지 새끼가 시궁창을 보자마자 펄쩍 뛰어내리면서 시궁창에서 뒹굴더랍니다.
돼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겉을 단장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마음이 변해야 합니다.
마음이 건강해야 합니다.
칼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들어 있는 마음의 칼이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신앙의 변화는 곧 마음의 변화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마다 이런 놀라운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못된 악습관에 빠졌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평안을 얻었습니다.
원망과 불평, 절망 투성이던 사람이 어느 날 예수를 믿고 감사를 고백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갈등과 분쟁으로 불행하던 가정이 행복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삶 중심에 모실 때에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울이 이런 변화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자랑으로 삼던 생활이 예수님을 자랑하는 삶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인생관이 바뀌었고 인격이 바뀌었습니다.
삶의 본질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바울은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3년간이나 눈물로 세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 삶을 고백하는 바울의 고별 설교입니다.

바울은 말로만 신앙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살아온 삶 자체가 신앙의 본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가르침과 삶이 일치하게 살았습니다.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첫날부터 지금까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라.”(18절)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게 살았기에 바울은 항상 담대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신앙과 삶이 불일치하는데서 자꾸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 중심으로 천사 같고 진실하고 거룩하게 사는데 교회를 떠나 밖으로만 나가면 신앙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방법으로 살고 있습니다.

신앙이 생활화되지 않는 데서 갈등이 생깁니다.
고민이 생깁니다.
평안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 한 직장에서 부장하고 과장하고 싸움이 붙었답니다.
과격하게 싸우다가 부장은 턱 뼈가 부러지고 과장은 콧 뼈가 부러졌습니다.
서로 고발을 해서 경찰서에 끌려와 조사를 받다 보니까 둘 다 잘못을 했으니 합의를 하라고 하더랍니다.
“아닙니다. 저놈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저놈을 구속해야 합니다.” 서로 그러다가 둘 다 잡혀 들어갔다고 합니다.

한참 후에 목사님이 성경책을 들고 급히 들어오시더니 “오! 장로님 어쩌다가 턱뼈가 부러졌습니까?” 그러면서 기도를 하고 가시더랍니다.
조금 있다가 다른 목사님 한 분이 오시더니 “집사님, 어쩌다가 콧 뼈가 부러졌습니까?” 그리고는 기도를 하고 가시더랍니다.

목사님들이 다녀가신 후에 두 사람의 대화입니다.
“아니, 장로님! 10년 동안 한 직장에 있었으면서 어쩌면 그렇게 신앙을 감쪽같이 속이고 술 마실 때면 그렇게 앞장서서 잘 마셨습니까?”
그러니까 부장 장로가 하는 말이 “김 집사! 자네는 어쩌면 그렇게도 나쁜 짓이라면 제일 먼저 앞서서 했나?” 그러면서 서로 손을 잡고 회개를 하고 바로 살기로 다짐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없고 양심에 갈등을 느끼고 신앙에 근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천국생활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게 살 수가 있습니까?
참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는 내적인 변화요, 또 하나는 외적인 삶의 변화입니다.
바울은 내적인 변화가 분명한 신앙입니다.

행 9장에 보면 다메섹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 주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순간 지금까지 바라보던 눈이 다시 열렸습니다.
지금까지 땅을 보던 눈이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고, 육의 것만 보며 살던 생활이 신령한 것을 보게 되었으며 자기 자랑하던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생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아니라 바울이 되었습니다.
내적인 변화가 곧 외적인 생활의 변화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내면적인 삶의 변화가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나무는 보이지 않지만 뿌리가 튼튼해야 열매가 좋아지듯이 신앙생활도 보이지 않으나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외적인 생활까지 좋은 신앙의 열매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를 만날 때 결과만 쳐다보면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결과가 있기 전에 원인이 먼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나]의 풍랑만 쳐다보면 해결책이 없습니다.
풍랑의 원인이 되었던 [요나]를 찾으면 문제는 해결되데 되어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내면적인 세계가 변화되기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근본이 변화되면 생활도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확실한 내적 변화를 통해 외적인 생활까지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겸손과 눈물이 있는 사도였습니다.
19절에 “겸손과 눈물이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은 겸손한 사도였습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은혜 받은 증거입니다.
변화받기 전에 그토록 살기등등하고 자기 지식과 가문과 권력을 자랑하며 교만하던 사람이 주님을 만난 이후 이런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며 세상적인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노라”고 영광을 하나님께 만 돌렸습니다.

곡식은 익어갈 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익어갈 수록 예수님을 높이게 되고 자신은 낮아지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성도가 스펄젼 목사님을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은혜 안에 사는 것입니까?”
목사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그것도 겸손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그 다음도 겸손입니다.”

그렇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이 버리십니다.
사울 왕을 40년간 쓰셨는데 왜 버리셨습니까?
52년 동안 왕 노릇하던 웃시야 왕이 왜 문둥병자로 비참하게 죽었습니까?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겸손할 때 쓰임을 받았는데 교만하니까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며 겸손히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낮추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바울이 자신을 겸손히 낮췄다고 해서 무시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신앙과 훌륭한 인격은 후대에 많은 그리스도인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눈물의 사도였습니다.
바울의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습니까?
은혜의 증표입니다.

사람에게는 2종류의 눈물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인들이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환경을 바라보고 슬퍼서 괴로워서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 어느 분이 “목사님! 어제 너무 많이 울었어요.” 하길래 ‘은혜를 많이 받았나보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TV 드라마를 보다가 어찌나 슬픈지 한없이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눈물은 아무리 많이 흘려도 기쁨이나 평안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슴이 허전하고 공허할 뿐입니다.
또 하나는 성도의 눈물이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흘리는 신앙의 눈물을 말합니다.
죄를 회개하며 흘리는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이런 신앙이 눈물은 값진 보배와 같습니다.
이 눈물 후에는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기쁨이 생기고 평안이 넘칩니다.
기도의 응답이 나타납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곤고할 때가 언제입니까?
은혜 받은 성도는 심령에서 은혜의 눈물이 마를 때입니다.
“주여!”만 불러도 가슴이 찡해올 때가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기도를 드리다가,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한 없이 흘리던 눈물이 그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찬송만 불러도 가슴이 벅차 올라와서 흘리던 그때의 눈물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행복했던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은혜 받은 성도의 눈에 눈물이 마를 때 그 삶은 곤고한 것입니다.
신앙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까?
심령이 사막같이 메말라 있지 않습니까?
다시 은혜의 눈물을, 기도의 눈물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이요 축복입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을 선고받고 눈물로 통곡하며 기도할 때에 15년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연장해 주셨습니다.
[한나]는 아이 얻기를 소원하여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사무엘] 선지자를 아들로 주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말할 때 3년 동안 눈물로 세운 교회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눈물이 있는, 하나님께서 함께 한 은혜의 사도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바울의 신앙을 본받는 신앙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로 바울은 물욕을 다스린 신앙이었습니다.

본문 33절을 보십시오.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33절)라고 고백합니다.
빌 4:12절에도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고 고백합니다.
풍부할 때도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고 가난하여 궁핍할 때도 절망하며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고백입니다.

성경에 보면 물욕 때문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황상 21장에 나오는 [아합]왕이 그렇습니다.
그는 [나봇]의 포도원을 탐했습니다.
탈취했다가 훗날에 비참하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수 7장에 나오는 아간은 전쟁에서 탈취한 물건 중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금덩이 50세겔을 탐내서 장막 안에 감춰두었다가 써보지도 못하고 자신과 처자와 모든 죄 물을 돌 더미 속에서 불태워 버리고 결국은 인생마저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가롯 유다]는 3년이나 따라다녔던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 넘겼지만 양심이 너무 괴로워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해 죽고 말았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엘리야] 몰래 거짓말을 하여 [나아만]에게서 은 2달란트와 옷 2벌을 취하여 감추었다가 돌이킬 수 없는 문둥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 가지 가운데서도 성도는 물질 관계를 잘 맺고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물질은 악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 다스리면 일만 악의 뿌리가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이 잘 되어 바빠서 하나님을 멀리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사업을 축복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좋은 직장에 들어간 후 신앙이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역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좋은 직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애타게 기다리다가 자식을 얻었습니다.
자식 때문에 예배를 못 드린다고 합니다. 어리석습니다.
그 자식을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저는 항상 사람과 물질의 관계를 배와 무로 생각하면서 삽니다.
배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움직입니다.
물질은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물질적인 많은 복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는 배안에 물이 들어가면 침몰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양심 안을 뚫고 들어가면 신앙 안에 물질이 들어가서 신앙을 침몰시키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양심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물욕을 잘 다스렸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세상을 따라가고 물질을 따라가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정복하고 물질을 다스리는 권세 있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바울은 사명에 사로잡힌 신앙인이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절)고 고백합니다.

사람에게는 각각 사명이 있습니다.
학생에게는 공부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주부에게는 가정을 잘 돌봐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선생님에게는 가르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상의 만물에도 각각 사명이 있습니다.
꽃피는 사명이 있고, 열매 맺는 사명이 있습니다.
성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사명이란 무엇입니까?

3가지입니다.
첫째, 기도가 사명입니다.
신앙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 속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해결하는 능력의 열쇠가 여러분의 기도 속에 들어 있습니다.

둘째, 충성이 사명입니다.
각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능대로 충성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재능으로, 어떤 이는 주신 건강으로, 어떤 이는 물질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충성하는 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셋째, 영혼구원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눈을 감고 지옥불로 떨어지면서 슬피 울고 있을 내 부모 형제, 내 이웃을 생각해보십시오.
가난하고 못생기고 못 배운 것은 부끄럽다고 말하면서 어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영혼들이 내 가정 안에, 내 주변에 있음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아갑니까?

어서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생명줄을 던져야 합니다.
전도는 생명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명이 있는 한 죽지 않습니다.
리빙스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가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하다가 야수에게 물려 쓰러지고 피를 흘리며 거의 다 죽게 되었을 때 그를 따르던 종이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여기서 이렇게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리빙스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울지 마라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내게 향하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다 하기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내가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실 일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나를 살려주고 계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행 27장에 보면 바울이 탄 배가 유라굴로 광풍으로 파선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도 바울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로마로 보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살아남은 것은 바울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바울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지금 나를 살려주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건강이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엇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라고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혜가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시간이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시간의 축복을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물질이 많기 때문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바치도록 물질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명이 있는 한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한 사람, 겸손과 눈물이 있는 사도, 물욕을 다스린 신앙의 사람 바울을 본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영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