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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 (눅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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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유다는 예수님을 3년 반이나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을 은30에 팔아먹고 배반한, 구원받지 못한 제자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마26:24)고 하셨다. 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예수님을 배반하여, 지옥에 가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다의 뜻은 찬양으로, 아주 좋은 이름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던 천사가 타락하여, 사단이 됨과 같이,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최악의 이름이 되었다. 지금도 주님의 제자가 되어, 크게 쓰임 받기 원한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배반하여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다.

  다대오유다와 가룟유다는, 대조적인 삶을 이루었다고 한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늘 불평하고 원망했고, 다대오유다는 늘 찬송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우리는 찬송하며 살든지 원망하며 살든지, 둘 중의 하나다.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물러가듯이, 찬송을 하면, 원망과 미움은 물러간다.

  가룟이 무엇인지, 가룟에 대하여 사람들은 3가지로 말을 한다.

(1) 가룟은 아람어 ‘쉐케르’에서 온 말로 “가짜, 거짓말쟁이, 위선자”를 뜻하는 말로, 그 당시 아람어를 사용하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배반자를 부를 때 사용한 별명이다.

(2) 헬라어 시카리오스(σικάριος, 단도를 쓰는 사람, 자객, 비적)와 관계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가룟유다를 칼을 썼던, 열심당 출신이었다고 말한다.

(3) 유다 지방의 ‘크리욧’(תוֹיּ󰙞󰙓, 마을, 성을 세우는 사람)이라고 한다. 어쨌든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버림받은 제자가 되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지만, 어째든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었다. 왜 예수님을 팔았을까? 성경은 3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 그는 물질에 마음을 빼앗겼다(요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더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물욕에 노예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중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옥합을 깨뜨리고 있는 여인을 보고, 이를 팔아 다른 사람을 도우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했다? 대단히 정의파 사람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 그의 생각은 다른데 있다. 그는 도둑이었다.

  그는 돈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돈을 계속 훔쳐갔다. 돈 앞에는 스승도 의리도 없는 사람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돈을 사랑하다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성경의 경고를 잊지 마라.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마귀가 역사하기에 가장 좋은 옥토는, 바로 탐욕스러운 마음이다. 탐욕은 마귀의 옥토다. 마귀의 열매를 맺는 기름진 땅이, 바로 탐심이다. 이 시대의 우상이다. 사람들은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에 열광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돈을 좋아한다.

  말로는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고 하지만, 한 꺼풀 벗기면, 모든 사람의 마음에 탐심이 가득하다.

기독교는 “물질이 없어도 괜찮다”고 억지를 부리는 비현실적인 종교가 아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오히려 물질을 잘 다스리고, 바르게 쓰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물질의 욕심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의 종이 되지 않고, 돈이 우리의 종이 되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를 하나 마련해 주셨다. 그것이 바로 십일조다. 우리의 모든 물질은, 모두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 맡기시고, 그 증거로 10%는 손대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십일조는 에덴 동산의 선악과와 똑같은 의미가 있다. 에덴 동산에 많은 생명실과를 만들어 놓고 난 뒤에, 그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실과를 다 먹되 선악과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다. 손대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을 보여주는 테스트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그 순종의 계율을 깨 버렸다. 하나님께 범죄 했다. 십일조 제도는 대표성의 원리와 같다. 한국 대표 축구가 일본 대표를 이기면, 우리가 일본을 이겼다고 말한다. 실제로 11명의 선수들이 뛰어서 이겼는데, 우리가 이겼다고 말한다. 이를 대표성의 원리라고 한다.

  우리가 왜 7일 중에 하루인 주일을 성수하나? 하루만 주의 날이고, 월-토요일까지는 우리 날이기 때문인가? 아니다. 모두가 주의 날이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떼어 지킴으로써, 나머지 모든 날도 주의 날임을 인정하는 행위가 곧 대표 행위다.

  그렇기에 십일조는 헌금이 아니다. 십일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 것을 손대지 않는 것이다. 내가 도둑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다보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님을 생각하며, 물질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면, 절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십일조 생활하는 사람 치고, 돈, 돈, 돈 하면서, 돈에 끌려 다니는 사람은 없다. 십일조생활 제대로 하는 사람 가운데, 돈의 유혹에 넘어지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십일조생활을 하면, 물질에 대한 탐욕을 이길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90%의 돈을 아름답게 써야 한다. 나눠주고 섬기는데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쓰지 않고 남은 재물이 너무 많다면, 심판 받게 된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주인에게 책망을 들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 돈을 안 쓰고 땅에 묻어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것을, 아름답게 사용해야 한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탐욕을 버리지 못해서 망했다. 우리도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잘 쓰고, 활용하여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바란다.

2. 자기 뜻을 계속 고집하였다.

여호수아 15장을 보면, 유다 지파가 스스로 쟁취해서 헤브론 남방지역을 얻었는데, 그때 기럇성읍을 자기의 성읍으로 만들었다. 크리욧은 기럇의 복수형이다(수15:9, 15). 그만큼 좋은 가문출신이다.

  또한 그가 3년 반 동안, 회계를 맡았다는 사실을 통해, 외적으로는 믿을만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어느 누구도 회계를 맡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외적으로 믿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의심받지 않았다.

  광야에서 5병2어의 이적이 있기 전, 얼른 200 데나리온의 돈을 가지고도 부족하겠다고 계산하던 빌립을 제치고 회개를 맡아보았다. 아니 회계 일이 본업인 마태를 제치고 돈궤를 맡았으니 얼마나 능력이 있었나?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나를 팔리라 할 때, 모든 제자들이 즉각적으로 가룟유다를 생각지 않았다. 저마다 내니까 하면서, 자기 자신을 주목했다. 그만큼 유다는 사람들에게 의심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능력이 있었기에, 돈궤를 맡았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셈을 잘하는 빌립이 있다. 

  그는 열심당 출신이었다. 열심당원은 조국의 광복을 위한, 비밀 결사대였다. 열심당원은 언제든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해방자로 알고 따랐는데, 점점 자신이 생각하던 메시아와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유다는 세속의 왕국을 갈망하였다. 메시아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고 통치하기를 기대했다. 새로운 왕국에서 영광과 권세를 누릴 생각에 부풀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의 생각과 자기 생각이 너무도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수를 사랑하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하시면서, 군중들이 왕으로 삼으려고 하면 피하신다.  내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니, 유다의 뜻과는 상반되는 말씀이었다. 이런 말씀을 하시자, 가룟유다는 불안해하고, 기도에 게으르며, 탐욕하며, 분노하는 얼굴을 보셨다.

  이렇게 하면 좋은 기회를 다 놓치고 말텐데, 그래서 안타깝고 크게 실망한 가룟유다는 극단적인 결단을 한다. 예수님의 능력을 잘 알고 있기에, 위급한 상황에 예수님을 끌어넣으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신적 능력으로 행동하리라 생각하고, 예수님을 팔았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2:17)고 했는데, 가룟 유다의 잘못된 열심은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했다. 그러나 유다는 어디서부터인가 서서히 악의 길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여러 번 경고하셨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마귀는 인간의 지혜와 경험으로, 스스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도록 만든다. 믿음에는 신념과 신앙이 있다. 신념을 버려라.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몸을 가리고자 하였다. 신념이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몸을 숨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그들이 고안해 낸 방법이다. 세상의 지혜요, 마귀의 지혜다. 가인의 제사도, 자신의 생각대로 예배를 하였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는, 창의력이 필요 없다. 하나님의 방법,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 또한 홍수 이후에도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다시 의지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하늘까지 닿는 성과 탑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한다. 성경대로 하지 않으면 잘못된 믿음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잘 믿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들은 가룟유다처럼 되기 쉽다. 스스로 보기에 멋있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고고하게 살겠다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혼자 수행하지만, 구원받는 길은 예수님 앞에 나와야만 한다.

  십자가 복음 대신 긍정적 사고방식 복음을, 피묻은 설교 대신, 재미있고 즐거운 이야기를, 가슴을 찢는 회개 대신 세상 성공 법칙을, 하나님의 뜻을 듣는 말씀 대신, 자기 뜻을 합리화하는 명상으로,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예배 대신 감흥과 열기만 있는 쇼프로그램으로, 우리의 영성을 바꾸지 말라.

3. 회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망했다.

요13장을 읽어보면, 유다가 사단의 포로가 되는 과정을,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마귀는 유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팔리라는 생각을 집어넣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우리의 생각을 확인해야 한다. 사단이 그 마음 속에 예수를 팔라는 생각을 집어넣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유다의 마음을 아셨기에, 회개할 기회들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가 자신의 발을 절대 씻으실 수 없다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10)고 하셨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다.

  (21)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였다. 제자들 각자가 “주여, 내니이까?”라고 여쭈었다. 유다도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26:25)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하셨다. 유다에게 너라고 말했지만, 다른 사람은 알아듣지 못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요13:26) “내가 한 떡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이니라”고 하시며, 유다에게 주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기회를 주셨다. 처음에는 은근히 말씀하시다가, 깨닫지 못하자 ‘바로 너’라고 직접 가르쳐 주셨고,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자, 이번에는 아예 음식을 잎에 넣어주셨다.

  그때 자신의 죄를 애통해 하고, 엎드려서 회개해야 했다. 그러나 회개를 거절한 유다에게 27절에 보면,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그래서 (눅22:4)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책을 의논했다.

  처음에 사단이 예수님을 팔 생각을 집어넣었다가, 나중에 결정적으로 그 속에 들어가서, 유다를 사로잡고 말았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유다는 많은 군인과 대제사장의 하속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왔다. 유다가 예수님께 키스를 할 때, 주님은 유다에게 정면으로 말씀하셨다.

  “네가 오늘 내게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 네가 그렇게 한다고,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신과 상관없이 여기고, 돌아서 버렸다. 마지막 회개를 촉구할 때에도, 그는 귀를 닫았다. 끝까지 그는 회개하기를 거부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30에 팔아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때라도 회개했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베드로도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다. 그렇지만 그는 다시 돌아와 회개하여 훌륭한 사도가 되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돌아와서 후회했어도, 회개하지 않았다.

  대제사장한테 간 그는, 비로소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았다. (마27: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그 말을 듣고 유다는 나가서, 목을 매고 죽었다.

  악의 꽃은 하루밤 사이에 피어나지 않는다. 가룟유다의 사악한 행동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모두 버렸을 때, 유다는 자신이 배신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수 차례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회계할 기회를 많이 주시는데도, 회개하지 않기에 망한다. 우리 육체가 끝나기 전에, 우리는 얼마든지 회개할 수 있다. 언제 끝이 올지 모르니, 나중에 회개하겠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우리 인간의 더러움은, 우리 마음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기에,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숨겨질 수 있다. 죄는 공개되기 전에 오랫동안 보이지 않고 가리워 질 수 있다. 따라서 말씀이 들을 때 찔림이 있다면, 축복인줄 아시기 바란다. 내 생사가 달린 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가룟유다가 죽은 다음에, 유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혹시 유다라는 서양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없다.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이 가장 치욕스런 이름으로 변했다.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 그러면 왜 망하는가?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망한다. 가룟유다는 회개할 기회를 주셨을 때, 그때마다 거부하여 망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수없이 주신다. 그렇지만 다 거절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죄악을 오래 품지 말고 빨리 버려라. 지금은 회개의 때, 구원의 때이다(고후6:2). 그러므로 회개할 기회를 주셨을 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이건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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