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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3)-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사람의 설레임과 기쁨(요 4: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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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하늘에서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삶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마음에 기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고 해도 우리는 기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현상과 상황이 우리의 평가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주시는 축복의 의미와 그리고 앞으로 베풀어주실 그 나라와 영원한 영광을 생각하면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기쁠 수 있는 은혜의 백성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하나님이 주시는 기대로 인한 삶의 힘으로 참된 기쁨이 있다 하면 우리는 결국 행복한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행복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지난 2주간 동안 자신을 부인하는 삶의 평안과 기쁨 그리고 진실된 헌신을 이루는 삶의 평안과 기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자신을 부인할 때 그리고 하나님께 진실한 헌신을 이루게 될 때 우리는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결국 참된 진리를 발견했을 때 이루어지는 설레임과 기쁨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우리들이 많이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 수가성에 우물가에서 머무시게 됩니다. 그때 물 길러 나오는 한 여인이 있어 예수님께서는 물을 한 그릇 달라고 요청하십니다. 아주 땡볕인 한낮에 햇볕이 쨍쨍 내리 쬐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기 원치 않아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을 때 한낮에 햇볕이 쨍쨍 내리 쬘 때 물을 길러 왔던 그 여인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이런 요청을 듣고 날카롭게 대꾸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당신들이 사람처럼 여기지도 않던 나 사마리아인, 특별히 여자한테 어떻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느냐? 당신은 참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것만 요구하는 뻔뻔한 사람이다.’ 이와 같은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물을 매개로 하여서 이 여인에게 천국의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원한 생명의 구주이심을 그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진리를 소원하여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이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이 여인은 자기가 물을 길러 왔던 그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내려가서 이제까지는 만나기도 꺼려했던 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개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게 하는 장면이 기술되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을 피해서 사람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 한 낮에 물을 길러 왔던 이와 같은 피곤한 여인, 그 여인이 어떻게 해서 자기가 목적했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기가 기피했던 사람들에게 내려가서 그들을 또 데리고 올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된 진리를 깨달은 자의 설레임과 기쁨 그것으로 이루어진 행복을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가 이런 문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참된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들에게는 삶의 우선권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의 목적은 물을 길러 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물을 먹어야 살겠기에 그는 사람들을 피해 한낮에 쨍쨍이는 팔레스타인의 햇볕가운데서 물동이를 가지고 물을 기르러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순간 그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내려갔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라는 말씀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여인이 추구하던 삶의 관심, 이 여인이 지금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삶의 우선권의 변화가 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이제까지 추구하던 삶의 관심과 우선권이 달라지게 됩니다. 전에는 우리가 영적인 깨달음과 은혜가 없었을 때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추구하는 관심사는 오직 세상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가 추구하는 관심사항이 변해졌다 이 말입니다. 내가 추구했던 삶의 우선권이 달라졌다라는 것입니다. 주일이 되면 어디 갈까? 누구를 만날까? 무엇을 하고 놀까? 하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생명의 소원을 가지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었을 때 이제 주일이 되면 당연히 주님을 만나야지 주의 말씀을 들어야지 주님께 예배를 드려야지 라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당으로 오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삶에 어디를 갈까? 누구하고 놀까? 무엇을 하고 놀까? 하는 이와 같은 삶의 관심사가 이제 내가 예배드리러 가야지. 하나님을 만나야지. 하나님께 내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예배를 드려야지라는 마음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즉 그가 가지고 있는 삶의 관심사가 바뀌게 되고, 삶의 우선권이 바뀌게 됩니다. 물을 기르러 왔던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의 삶의 관심사, 초점 모든 우선권이 바뀌어지게 된 것을 봅니다. 어떻게 하면 내 삶의 이익을 얻을까 하던 사람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는 여인처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 기쁨과 안전과 보장이 최고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관심과 복음을 위해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가 추구하던 삶의 물동이를 점시 버려두고 달려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근심과 고통과 아픔과 그리고 우리가 추구했던 삶의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에 내려놓고 그 더 중요한 것을 찾아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말할 때 상위가치를 발견했을 때 하위 가치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시편 39편 6-7절을 보면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지는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자 따라서 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삶이 이렇게 되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고통과 눈물과 아픔과 저급한 가치를 추구하던 것이 이제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발견한 것의 영향을 받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죠.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한 손에 성경을 들었을 때 우리가 어디에 영향을 받을까요? 손에 무엇을 들었느냐에 영향을 받지 않고 우리는 무엇을 읽었느냐에 영향을 받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성경의 영향을 받고 신문을 읽으면 신문에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무엇인가 우리는 깨닫고 발견한 것 우리가 인식하고 취득한 것에 대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서는 영향을 받지도 않고 또 추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호세아 선지자가 호세아 4장 6절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으니 하나님께 대한 앎이 없으니 하나님께 대한 바른 인식의 구조가 형성되지 않으니 내 백성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광고 드렸듯이 내일 청년들이 88명이나 필리핀 기마라스 섬으로 선교를 갑니다. 학생 1인당 84만원의 회비를 냈습니다. 선교에 필요한 모든 것들은 지원하지만 본인들의 개인비용이나 먹고 지내는 것에 대해서는 본인이 부담합니다. 84만원의 회비를 가지고 가는데 청년들 대부분, 시간을 내서 가니까 대부분이 학생들이죠. 직장 다니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휴가를 낸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학생인데요, 왜 84만원의 회비를 내고 학생들이 88명이나 여기에 참석 할까를 생각합니다. 환경이 아주 열악합니다. 가면 볼 것도 없고 구경 다닐 때도 없고 경치도 좋지 않습니다. 아직 다 허물어지는 집 몇 채 주변이 있을 뿐이고 가도 아주 열악한 동네의 환경이 열려질 뿐이지, 동남아의 아름답고 수려한 광경이 있는 곳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거기를 갈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학생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큰 돈이고 또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한 학생들도 꽤 있고, 또 부모님이 보조해주신 분들도 계시고 또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시간도 들여서 가게 되고 그 돈이면 아주 좋은 곳으로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여행도 할 수 있고 자기가 원하는 모든 일들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그 학생들이 갈까하는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환경이 아주 열악하니까 아마 이 청년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돌아올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의 삶이 이제까지 얼마나 윤택한 혜택을 받고 은혜를 받았던 삶이라는 것을 깨닫기 될 것입니다. 성령의 원색적인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살았던 삶의 불평과 불만이 일거에 싹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직 감사함만 마음에 남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와 같은 것을 몰랐다면 앞으로도 그들의 삶에 있어서 그들이 누리고자 했던 모든 삶의 가치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보고 알았으니 그들은 이제 마음속에 또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살았는지. 내가 불평했던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웠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별 의미가 없었던 것인지 하는 것들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한번 은혜를 받았으니 그 이후의 삶에도 여러 가지 은혜를 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선교관광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지요. 이제 여름만 되면 각 교회마나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할 것 없이 선교지에 많이 갑니다. 가서 돈도 뿌리고 오고 그러죠. 한국에서 사용하는 돈이 열배정도 가치가 있으니까 여기 10만이라면 거기에서 100만원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큰 가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현지 선교사님들이 아주 머리를 아파하는 이러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복음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뒷처리를 선교사님들이 하셔야 하는데 아주 선교하는데 굉장히 어려움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같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될 때 거기서 본질의 가치에 접근하게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전에 우리가 해외여행이 처음 시작될 때 사람들 해외에 가면 너무 물건을 많이 사와서 국가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나쁘게 보지 않았습니다. 가엾은 백성이잖아요. 처음 가니까 많이 사잖아요. 두 번, 세 번, 다섯 번, 열 번 나가도 물건 사옵니까? 안 사오잖아요. 가엾게 살다가 처음 가서 눈에 많이 뜨이니까 이상하니까 많이 사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그쳐지리라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처음에 가서 그와 같이 이런 이러저러한 모습을 모인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본질에 접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처음에는 일회성 동정이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값을 치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복하는 가운데 진실한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청년들 이번에 선교를 가서 벌써 여러분 반복하다 보니까 센터도 짓게 되고 교회도 개척하게 되고 한 개의 교회로 10개의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모든 준비를 하고 오게 되고 또 주변의 관공서 지도자라든지, 또 여러 주변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이번에 10개의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옵니다. 여기 이와 같은 모든 초반기의 이러저러한 과정이 있어도 그것을 값을 치르고 넘어가야 될 또 다른 부분들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쉽게 판단해 버리면 안됩니다. 쉽게 판단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저렇다 쉽게 판단하면 안 되고 우리는 결국 이루어야 될 본질적인 가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마음속에 새로운 것을 깨달을 때 그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그 삶에 새로운 헌신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사람은 결국 인식의 변화를 인해서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 다음부터 달라지는 것이 무엇이 있죠? 그 다음부터 달라지는 것은 우리들의 삶 가운데 새로운 기쁨과 설레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달라지니 우리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우리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진리를 깨닫게 되면 우리의 고민과 근심은 어느새 작은 것이 되고 그 진리로 인해 우리는 기쁘고 가슴 설레이고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요한복음 8장 32절은 말씀합니다. 죄로부터 자유롭고 죄책으로 자유롭고 죄의 올무로부터 자유롭고 죄로 인해 옭아매진 우리 삶의 고통과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리를 깨닫게 되면 이전에 그렇게 괴롭고 고민하던 문제들이 내게 있어서 매우 작은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내가 더 좋은 것을 발견하고 달려가기에 이전의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장면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사람에게 행복하기 위해서 장면의 전환이라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기분이 좋지 않거나 혹은 컨디션이 나쁠 때 여러분은 어떻게 삽니까? 저는 기분이 좀 좋지 않다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일단 잡니다. 자고 나면 세상이 또 달라 보입니다. 아니면 또 땀을 흠뻑 쏟을 만큼 운동을 합니다. 그러면 샤워하고 나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운동하는데도 숨차는 것 참고, 움직이기 어려운 것 억지로 끌어올려 억지로 하다보면 그 다음에 어려운 것 참으면 되지 라는 마음이 들고 새로워지는 것을 봅니다. 정신적인 고통은 육체적 운동으로 풀죠. 또 육체적으로 피곤한 것은 정신적인 통쾌한 깨들음으로 말미암아 극복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임을 봅니다. 말하자면 삶의 장면을 전환시켜줌으로 말미암아 이전의 문제를 작게 보고 새로운 것에 대해여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영적인 깨달음이 있게 될 때 세상에서 그렇게 괴로워하던 것이 별 것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우리는 영적인 사실을 추구하게 됩니다. 영적인 사실을 추구하다 보면 내가 이전에 별것 아닌 것에 집착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곤고나 슬픔이나 삶의 지루함을 우리 주님이 주신 영적인 깨달음으로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급함이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기쁨을 체험하면, 구원을 감격을 체험하면, 우리 삶이 다시 새로운 출발을 이룰 수 있게 됨을 봅니다. 특별히 주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삶의 우선권이 달라지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이 아니라 기쁨과 설레임과 행복입니다. 애써서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한 기초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삶의 우선권이 달라지는 것은 정말 기쁨과 설레임입니다. 내가 전에는 이것을 추구했는데 내가 이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추구하게 되었어요. 내가 이전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더 큰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하위 가치를 버리고 상위가치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과 설레임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기 위한 기초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매우 고통스럽지만 정서적 설득을 넘어선 반복적 훈련을 통한 실제적인 능력의 배양입니다. 우리 오해하면 안 될 분명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하다가 성령충만을 받았어요.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 나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외칠 때 3000명이 회개하고 5000명이 회개하고 곳곳마다 주의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며 그들은 마침내 순교의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들이 오순절 성령충만을 받았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그 일을 이루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오순절 성령충만을 받기 전에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3여년 기간동안에 이들은 수많은 훈련과 교육을 받았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불꽃을 붙이면 타들어갈 양초를 준비해놓았다는 것입니다. 불꽃을 붙이면 타들어갈 양초를 준비해 놨기 때문에 불꽃을 붙였을 때 양초가 타들어가는 것이지 그저 심지만 있고 아무런 양초의 몸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불만 붙이면 불은 붙지만 곧 꺼지게 되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헌신을 한다, 하나님 앞에 주의 뜻을 이룬다라는 것은 어느 날 화끈하게 성령충만을 받아서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무슨 큰 일을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게 성령충만의 불을 붙여주실 때 그 불붙는 것을 붙여서 가지고와 하나님의 진정한 준비된 사실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붙기만 기다리지 말고 불이 붙었을 때 타들어 갈 수 있는 양초를 준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준비한 후에 우리는 우리의 준비와 우리 자신까지 부인해야 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언제든지 수고하고 무대 뒤로 사라져질 수 있는 마음의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수고와 애씀, 우리의 준비가 우리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우리를 주장하게 하는 올무가 되고 맙니다. 때로는 많은 수고와 많은 여유와 지식과 힘이 주님으로부터 우리를 더 멀리 만드는 우상이 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준비한 모든 것도 물동이처럼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 헌신하게 되는 길로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만 이제까지 수고한 것이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유용하게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기쁨과 소망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삶의 태도에 대한 변화입니다. 오늘 이 사람은 대단히 두려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서 피해 다녔습니다. 안 만났으면 좋겠다. 얼굴마주치기 싫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동네에 내려가서 사람을 찾아서 만나고 그들을 변화시켜 주님 앞에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사실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자신의 존귀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자신의 존귀성을 깨닫게 됩니다. 구원의 복음은 사람의 가치관을 변화시켜 자신을 값지게 보는 자신감을 허락해줍니다. 왜 우리가 귀합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주실 만큼 우리는 존귀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수여한 우리는 결코 하찮거나 비하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입니다. 자 우리 따라서 합시다. ‘나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매우 존귀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비밀을 깨닫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매우 귀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존감 속에서 회복되는 것이 자신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 누구죠? 자존감이 없어요. 내가 아주 중요하고 내가 아주 소중한 사람, 내가 아주 귀중한 사람이라는 이런 자존감이 없을 때 우리는 자신감도 갖지 못합니다. 복음으로 인해서 자존감을 회복하게 될 때 우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회복하게 됩니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게 됐을 때 동네 사람을 피해서 한낮에 물을 기르러 왔던 이 여인이 이제는 동네사람을 찾아가서 만났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도 두렵지 않아요. 사람 피해 다니던 사람이 누구를 만나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그늘 속에 다니기 원했고 그 앞을 가리고 살기를 원했지만 이제는 숨어살지 않고 오히려 드러나 사람들에게 가서 무엇인가 그들에게 전할 것이 생기게 됐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인 위치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새로운 가치에 대한 깨달음은 그의 삶의 위치에 변화까지 이룹니다. 이제까지 두려워했던 모든 사람들, 이제는 자신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줄 수 있는 것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생겼어요. 여러분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지난 주간에 다큐멘터리 한편을 봤습니다. 희야라는 소녀에 대한 얘기입니다. 손가락이 양손에 두개밖에 없습니다. 잘생긴 손가락이 아니라 이렇게 문드러져서 생긴 손가락 두개밖에 없는 소녀였는데 한 열아홉 살 정도 되었습니다. 또 거기에 무릎아래 이하는 또 없어요. 무릎 윗부분까지밖에 없는 이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소녀였습니다. 네 손가락밖에 없는, 그것도 잘 생긴 손가락이 아닌 문드러진 네 손가락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가 그 아이에게 이제 선생님을 돕도록 해서 피아노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네 손가락을 가지고 피아노를 배울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손을 상실해서 한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서 작곡도 하고 이런 경우는 있지만 이 네 손가락을 가지고 어떻게 피아노를 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엄마가 아이를 피아노를 치도록 가르쳤습니다. 물론 선생님을 통해서 가르쳤죠. 그런데 아이가 지능도 낮아요. 그러니까 다른 아이들 한번 가르칠 때 열 번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실행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피아노를 정말 잘 쳐요. 열손가락으로 치는 것을 어떻게 네 손가락으로 치는지 정말 굉장히 피아노를 잘 쳐요. 그래서 국내에서도 연주홀에서 연주하고, 그냥 애들 치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 연주를 하는 수준이죠. 그래서 연주홀에서 연주도 하고 또 해외에서 초청을 받아서 연주홀에서 연주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연주가 끝나고 사인도 해주고, 이렇게 인사도 하는데 사람들이 다 와서 감격하는 거예요. 아, 내 삶이 얼마나 부끄러웠는가? 너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에게는 얼마든지 또 이와 같이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고, 또 뿐만 아니라 나는 가진 것이 참 많다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이렇게 삶을 살아가는지 참, 그 소녀에게 그렇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요 우리 삶에는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때가 있을 것 같아요.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무릎이하로는 없어요. 걸어다니는데 무릎으로 걸어다녀서 그 부분이 다 헐었어요.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네 손가락가지고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한거죠. 이 아이가 쉽게 피아노를 쳤겠어요? 엄마가 억지로 피아노에 끌어다 앉혀놓고 또 반복해서 시키고 얼마나 어려운 과정이 있었겠습니까? 대단한 거죠. 그 어머니의 의지도 대단하고, 아이의 노력도 대단하지만 어머니의 의지가 더욱더 대단하죠. 그럼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줍니다. 전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을 것 같아요. 도대체 저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뭘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줄 수 있는 게 많은 거예요. 소망을 주고, 희망을 주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부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삶의 용기와 소망과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이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사람을 두려워해서 피했습니다. 사람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사람에게 줄 것이 있어서 찾아가서 사람들에게 뭔가를 주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왔습니다.

안 해도 될 고민을 왜 할까? 여러분 생각하지요. 봉사 안하면 되는데 왜 고민하면서 봉사할까? 마음 안 상하면 그만인데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다 관둔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왜 내가 고민하고 사람과의 갈등을 겪고 어려움을 겪을까? 왜 그러죠? 그것 안하면 마음이 더 불편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봉사하는 것 아닙니까? 고민을 같을지 모르나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을 때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있었던 더 컸던 세상의 모든 고민들을 우리는 잊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받은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로 올라가고 또 그것이 결국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는 위치로 위치의 변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은 위치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위치에서 많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위치로 바뀌어지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을 깨달음은 이 설레임과 기쁨, 이 행복이 우리들에게 찾아오게 되는 거죠. 복음을 품은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그 어떤 것보다 존귀한 복음을 줄 수 있고, 새로운 생명의 소망을 줄 수 있고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본인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변화시키는 참된 행복의 전파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30절을 보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변화는 자신만 바뀐 것이 아니에요. 자신만 용기있게 바뀐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데리고 와서 그 사람까지도 바뀔 수 있도록 변화를 시킨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행복은 나누어집니다. 자 우리 따라서 합시다. 절대 진리의 전파 사명성, 자 절대진리의 전파 사명성. 상당히 어려운 말 같은데 우리는 잘 알고 있죠. 절대 진리는 전파의 대한 사명성을 부여해요.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에요. 그러면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필연적으로 내가 이 진리를 전파해야 된다라는 마음의 사명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절대진리인가 아닌가하는 것은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내가 이것을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가 있는가, 그것을 보면 됩니다. 절대진리는 자기 혼자 가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꼭 전해줘야 합니다. 이것이 절대진리의 전파사명성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가지고 있는 행복을 혼자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줘야 편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까지도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나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나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모든 사람이 변화되어 내가 살고 있는 삶과 역사를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진정한 진리의 깨달음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까지 부여합니다. 진리의 힘의 특징은 확산입니다. 한 군데 고여 있지 않고 흘러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나 자신의 생각에서 행동으로 삶의 전 분야로 나를 넘어서 또 다른 곳으로 또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진리를 깨달으면 결국 다른 사람까지 구원하는 역사로 나아가게 됩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 아주 통쾌한 장면이 하나 나오는데요. 요한복음 1장 45-46절을 보면 빌립이 예수님 앞에 불림을 받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이야기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랬더니 뭐라고 조롱하죠? 나사렛 같은 촌 동네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빌립이 뭐라고 하죠? 간단하게 한 마디로 제압해버립니다. “와보라” 이 한마디로 나다나엘을 간단하게 제압해버려요. 결국 예수님 앞에 왔을 때 나다나엘은 예수님 앞에 순복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이 여인,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이 여인을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이 여인은 다른 사람 눈에 띄기 싫었던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여인이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 사람을 설득해서 데리고 올만한 능력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이 여인에게 설득돼서 예수님 앞에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이 여인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있을 뿐 아니라 능력도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자신을 경멸하고 질시하던 동네사람들을 데려다가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올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진리는 우리를 바꿉니다. 마음에 설레는 기쁨, 마음의 감동이 우리는 자신있게 만들고 그 자신감이 다른 사람을 위축시키고 오히려 우리에게 따라올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있는데 누가 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런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진리를 깨달음으로 변화되고 행복을 느끼고 기쁘고 설레인다는 자체가 큰 능력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능력이 있을까를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 6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이 앉아 있는 걸인을 보고 뭐라고 얘기합니까? 은과 금 내게 없어도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이름으로 일어나라. 체험해보지 못한 능력이지만 그는 그 순간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로 변화되면 그 진리로 변화된 우리들에게는 위치의 변화와 능력의 변화와 그리고 우리 마음에 기쁘고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여건들을 주님께서 부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은 맺습니다. 지난 3주간을 돌아보며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나 자신을 부인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기쁨과 평안 속에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나 자신하나 부인하지 못하고 내 욕심에 끌려 다니면 우리는 결국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을 부인할 때 행복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진실 된 헌신을 이룰 때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많은 것을 움키고 많은 것을 내가 쌓아 두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 앞에 진실로 헌신함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때 우리는 새로운 행복과 설리임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진실한 헌신을 이루며 새로운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 앞에 행복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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