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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병든 자에게 의원 (막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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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류의 환자가 있답니다.
첫째는 내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를 알고 의원을 찾아 헤매는 환자입니다. 눈이 아프니 안과를 찾아가고 이가      아프니 치과를 찾아가고 배가 아프니 내과를 찾아가는 환자입니다.
둘째는 아픈 것은 아는데 의원을 찾아갈 용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해결을 보려고 하지 않고 속수무책입니다.    아픔만이 있습니다.
셋째는 자기가 아픈 곳조차 모릅니다. 아픈 것을 모르는 병은 가장 치명적입니다.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으면    서 정작 자기가 죽어가고 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히려 건강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대개 정신병자들이 이러합니다. “나는 똑똑하다 온전하다. 그런데 저 사람이 나를 왜 괴롭히는가?”
정신병자가 한사람이 “나는 나폴레옹이다.” 그러면 다른 정신병자가 “네가 무슨 나폴레옹이냐? 내가 나폴레옹이다.” 그러면 또 다른 환자가 “야, 내가 언제 너를 나폴레옹으로 임명했어?” 정신병자들은 하나같이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이 병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러한 증상을 보게 됩니다.

▶ 어느 날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지나가시는데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탁월한 교수이십니다. 여러분들은 가르침을 받기위하여
예수님께 나오십니까?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천국의 진리를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까? 여러분이 겸손한 마음이 있다면 가르침을 받고자 하실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천국시민이라면 배우고자 나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그리고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 13절 예수님이 또 지나가시다 세관에 앉아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나를 좇으라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마태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세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바닷가에서 그물을 깁는 베드로의 형제와 요한의 형제를 제자로 부르신 것처럼 세관에 앉은  알패오의 아들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가 세관에 앉아있었으니 그의 직업이 세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당시 세리란 거의 도적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하겠습니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다를 바 없어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를 고약한 죄인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일종의 스캔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는 주님을 당장 좇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비롯하여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게 됩니다.

함께 식사를 하셨다는 것은 긴밀한 교제를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별다른 스캔들이 없겠지요. 그러나 제가 이번 주에는 권사님들을 안 마나고 창녀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스케줄을 잡았다면 다음주간에 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과연 들까요? 바리새인들이 이때를 놓질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찾아와 “너희 선생은 어찌 죄인들과 식사를 하느냐.”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정결 규례에 어긋나는 그릇된 행위였습니다.

▶ 주님은 제기된 이러한 문제를 매우 탁월한 격언으로 해답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왔노라.”
격언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병자는 세리들과 죄인들입니다. 강건한 사람들은 예수를 대적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의사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가능한 말씀대로 사는 바리새인들을 주님은 건강한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리나 죄인들처럼 범죄자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하신적도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마9:13절에 “너희는 가서 하나님께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고 호세아서6:6절을 인용하여 저들의 내면화 없는 외향적인 종교행위의 위험성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호세야 선지자가 그러했습니다. 고멜이 자꾸만 집을 비웁니다. 나갔다들어오면 임신을 하고 이제 아예 집을 나가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가서 돈을 주고 데려오라고 합니다. 선지가가 스타일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그 긍휼과 자비를 배우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메시아라고 하시는 예수님이 이러한 행동을 보이실 때 바리새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마11:19)
예수님은 자기 의로 자만하는 저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자기의가 없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요 마음이 가나난한 자들이요 애통하는 죄인들에게 주님은 필요하신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의원이십니다. 사랑의 의사입니다. 어떤 죄인도 사랑하시고 고쳐주시고 제자로 부르시는 자비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죄인이요 병든 자라고 할 때 주님은 우리를 치료하기위해 다가오시는 치료자이십니다.

▶결론

세 종류의 환자가 있다고 서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병든 자라고 알지도 못합니다. 또 다른 환자는 자기가 병든 자이라는 것을 알면서 의원에게 나올 용기가 없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환자입니까? 믿음은 용기입니다. 우리는 능력의 한계, 생명의 한계,  의의 한계를 깨닫고 있다면 이제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주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나를 치료하십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유병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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