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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뜻을 정하여(Ⅱ) -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Ⅷ) (단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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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적 개념으로 마음은 사람의 전인격의 좌소라고 하는 것을 감안할 때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는 말은 마음을 결정했다는 말입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결단을 했다는 말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즉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에 대해 이방의 학문과 방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들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는 우상 제물이었기 때문에 먹기를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금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 것은 자신들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결코 먹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들과 우상제물을 용납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이 침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도의 몸은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병기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부정과 불법을 용납하므로 죄악의 도구로 악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적국 깊숙한 곳에서 더욱이 적국의 심장인 왕궁에서 포로의 신분으로 자신의 입지를 내세운다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저들의 결단은 이미 죽기를 각오한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 양심이 허락하는 것을 몸으로 행할 수 있는 결단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도가 양심의 명령을 받았을 때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양심의 명령을 자신이 스스로 타협하고 간과해 버리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양심의 명령자는 자기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입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에도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다니엘의 뜻을 전해 받은 환관장 아스부나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왕의 명령이 곧 절대자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의 명령이 절대자의 명령이었습니다. 절대자가 있는 자는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절대자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 외에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환관장은 궁중에서 소년들을 관리하는 자입니다. 히브리 소년들에게 음식을 공급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들 보다 허약해지면 그 책임이 자기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1장 10-11절에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동무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로 보시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까닭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하게 되리라 하니라 환관장이 세워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라고 했습니다.
이때 다니엘은 본문 1장 12-13절에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환관장의 말에 만용을 부리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고 부질없는 모험도 아닙니다. 또한 저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히브리 소년들은 당돌하게 금식을 원하지 아니했습니다. 저들은 겸손하게 채식과 물을 왕의 진미의 대용품으로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저들의 신앙 행위입니다.
다니엘과 세 소년들의 이와 같은 결단은 선민의 자긍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저들에게 있었던 결단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능력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저들에게 승리가 왔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이 온 것입니다.

Ⅰ. 물질의 절대화를 상대화시키는데 승리 했습니다.

본문 1장 15절에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고 했습니다.
먼저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마를예헴 토브, ) {살이 더욱 윤택하여}(베리예 바사르, )라고 하여, 이들의 상태가 다른 사람들 보다 월등하게 좋은 상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이 왕의 진미를 먹었다고 해도 지금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다른 소년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히려 건강하고 안색이 좋았습니다. 이제는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더 이상 왕의 진미를 강요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본문 1장 16절에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자에게는 육신의 건강까지도 하나님께서 간섭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서 건강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마저도 신앙파수를 위한 도구일 때 값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살진 소를 먹는 것보다 채소를 먹는 자에게 주어졌습니다(잠 15:17).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채소와 물도 극상의 양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장 9절에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소년들의 결심하는 삶에 호응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에게는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제하고 저들의 요구대로 채식만을 공급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이러한 채식주의적 삶이 바벨론 궁실에서 3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고 마침내 행동으로 실천하여 축복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신행일치의 삶입니다.

Ⅱ. 학문의 절대화를 상대화 시키는데 승리 했습니다.

본문 1장 17절에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그곳에 있는 다른 소년들보다 영육 간에 더욱 강건한 것은 결코 바벨론의 교육이나 왕궁으로부터의 넘치는 부양 때문이 아닙니다.
저들이 강건하게 된 원인이 외적인 환경적 요인이 아니라 외적인 신앙적 요인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중대한 것입니다. 이 소년들의 강건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 때문입니다.
시편 37편 39-40절에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라고 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갈대아 학문을 배우기는 했지만 결코 거기에 빠져들지 아니했습니다. 다니엘의 이와 같은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깨달아 알더라}(혜빈, )는 말은 다니엘이 받은 은사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충성된 자에게 보답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 환상과 꿈을 해석하는 재능은 고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시 되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마치 모세가 애굽의 지혜에 능통했던 것과 병행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22절에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받은 것은 단순히 꿈을 해석하는데 있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의 영을 받았다는 사실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은 초등학문입니다. 히브리 소년들은 초등학문의 경지를 넘었습니다. 그들의 지혜는 초등학문에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 초등학문은 이 세상 과학적 지식과 문화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3절에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에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8절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20절에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학문으로는 진리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7절에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깨닫고 해석하고 전하여 주는 지혜야말로 모든 지식의 근본입니다. 다니엘은 결국 이 신령한 영의 지혜로 세상 제국을 진찰하고 처방까지 했습니다. 또 이 신령한 영의 지혜를 받아서 영원한 메시야 왕국을 예언했습니다. 이 신령한 지혜를 받은 다니엘을 그 누구도 해할 수 없었습니다.
신령한 지혜 곧 이상과 몽조를 받은 지혜는 하나님이 자녀들만이 받은 특별한 축복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 {지식과 학문과 모든 재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 이지(理知)작용의 모든 분야를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갈대아인의 중요학문은 법률학, 수학, 천문학, 점성술을 포함해서 다양했습니다. 히브리 소년들은 이 모든 지식 위에 뛰어난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이론적인 학문에서 끝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것을 응용하고 산지식으로 활용함에 있어서 탁월한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이 받은 지혜와 지식과 총명은 전 바벨론에서 다른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더 나았다고 했습니다.

본문 1장 20절에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고 했습니다.
학문 자체는 결코 악이거나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학문을 악용하고 오용하는 인간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지는데 무게를 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정당하게 학문을 하고 사용할 때 그것은 역사와 인간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것이 악인들에 의해서 악용될 때 말할 수 없이 위험한 불행의 기구가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학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지성인들 보다 10배나 더하게 갖도록 하나님이 축복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저들이 세상제국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예언하는 데 축복의 도구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입니다.

Ⅲ. 정치적인 절대화를 상대화 시키는 데 승리했습니다.

본문 1장 19-20절에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 없으므로 그들로 왕 앞에 모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고 했습니다.
3년간의 교육기간이 끝이 났습니다. 고대 페르시아에 있어서 궁중에 들어간 소년들은 14-17세까지 보통 3년간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에도 이와 유사한 관습이 시행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포로인 소년들임을 감안할 때 바벨론의 하위 직급인 박수나 점성가 정도에 임용되기 위하여 왕 앞에 섰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왕 앞에 나온 자들에게 왕이 친히 구두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지혜가 바벨론 제국의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더했다고 하는 느부갓네살 왕의 평가였습니다. 여기 『십 배』는 네 소년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 지혜가 완벽하고 탁월하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 소년들에게 적국의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도록 섭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제국에서 히브리 노예들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히브리 소년들을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부양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대아 학문과 방언으로 교육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계획한 것은 이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바벨론화 하겠다는 점령국의 정치적 계획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명분 없는 무용지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히브리 소년들을 다른 소년들 보다 탁월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뛰어나게 하셨을 뿐 아니라 포로민의 백성이 점령국의 왕을 섬기도록 섭리하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히브리 소년들을 향해 그들의 실력을 공인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동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가 더 한 줄을 공적으로 확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와 축복은 정치적 함수관계를 무색화 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느부갓네살의 정치적 의도는 찾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섭리만이 뚜렷하게 부각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고자 하는 자가 사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진리 안에서 죽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삽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가 모든 것을 책임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고 했습니다(단 1:21). 다니엘은 육신적으로 장수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장수 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의 삶은 늙도록 부하고 존귀한 삶입니다(대상 29:28).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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