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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벨의 예배를 받으신 이유 (창 4:3-4, 히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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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열린 수련회를 마치고 바로 이집트의 카이로로 날아가서 우리 교회 성지 순례 비젼트립 팀과 합류했습니다.  저는 이번 성지 순례를 선교 여행이라고 했습니다. 굳이 성지 순례를 비젼트립이라고 한 것은 성지 순례가 단지 관광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교인들 17명과 나머지 이리 선교교회 목사님 내외를 포함하여 삼례 동부교회 성도들 포함하여 모두 36명이 함께 한 이번 성지 순례 팀은 말 그대로 선교 비젼 트립이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복음이 시작된 땅, 그곳에서 바라본 땅 끝은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650 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지만 0.2%밖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는 땅, 그러기에 그 땅이 바로 예수님이 바라본 땅 끝이었습니다.

  지금 까지 복음은 서진(西進)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소아시아 지역으로 로마로 유럽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그리고 극동 아시아 한국으로 이제 한국에서 피어오른 복음의 꽃은 계속해서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  그렇게 해서 계속 서진하여 지구를 한 바퀴 돌면 그 끝, 바로 거기가 복음의 출발지인 예루살렘입니다. 선교는 결국 유대 민족에게 전파되는 것으로 끝이 날 것입니다.
  주님은 마24:14절에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라고 했습니다. 복음 전파와 예수님의 재림과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주님께서 이일을 위해 교회를 세우셨고 또 그의 제자 된 우리들에게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행은 성지를 관광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주님의 눈으로 성지를 바라보기를 바랬습니다. 하루하루 피곤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저녁시간마다 뜨겁게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는 선교 집회를 가졌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그 땅을 관광지가 아닌 선교지로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일정을 마치는 날 밤 우리는 함께 모여 자신의 심정들을 말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함께 참여한 분들을 비롯하여 모두 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았고 깨달았다는 고백과 간증을 했습니다. 보내는 선교사로서의 선교에 헌신하겠다는 새로운 다짐과 결단을 가졌습니다.

  성지 순례가 단순한 관광이 아니요. 또는 이슬람 사람들처럼 숭배를 위한 여행이 아니라 선교지로서.. 그리고 예수님과 성경의 기록들에 대한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체험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면 일생에 몇 번이라도 아니 꼭 한번이라도 다녀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교는 빌 2:10-11절에 있는 것처럼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선교의 목적이 결국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이고 무릎을 꿇는 것은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 선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 있어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배는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예배가 있고 하나님이 만족하지 못하는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족하지 못하는 예배는 실패한 예배요 죽은 예배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나누었던 가인의 예배가 그렇습니다. 가인은 실패한 예배자였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바로 본문에 언급된 아벨의 예배입니다. 아벨의 예배는 어떤 예배였을까요? 
 
  아벨의 예배에 대하여 창4:4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첫 새끼와 기름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아벨 그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그의 예물을 받으셨을까요?

  ①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믿음의 제사 즉 믿으로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아벨의 제사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아주 명쾌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가 나은 제사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아벨이 가진 믿음에 대하여는 어떤 믿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제사드린 아벨의 제물 이야기를 4-5절까지 언급하고 바로 이어서 6절에서 아벨이 어떤 믿음을 소유하였었나 하는 것을 추측하게 하는 설명을 곁들리고 있습니다. 
  히 11:6절의 말씀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아벨은 자기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드렸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상 주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심입니다. 우리가 예배 드릴 때 하나님이 받으심으로 우리는 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자신의 예배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벨은 예배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확신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과 같은 죄악입니다. 오늘 나의 기도 나의 찬송 나의 예배를 하나님이 지켜보실 뿐 아니라 받으시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그 예배에 정성이 드러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형식에 습관에 치우쳐서 하나님을 경멸하는 예배의 태도에 젖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예배입니다.

  ② 전체적인 삶을 드린 예배로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로 드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는 말씀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첫 새끼는 전체를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전체를 의미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와 첫 것입니다. 십일조는 문자적으로는 무엇의 십분의 일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안 됩니다. 내가 얻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고백으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일조를 드리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첫 것도 그러한 개념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농사하여 거둔 것의 첫 열매나 가축이나 짐승이 낳은 첫 새끼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앞으로 거두고 번식되어진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이 주신 것들이라는 신앙 고백이 담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의 첫 새끼를 드림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구별하여 주님의 것으로 드린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 시대의 예배자들의 태도는 어떠 해야하는 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위해 여러분의 삶을 구별하고 또한 그 표현으로 예배의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짐승 제사가 폐지된 이 시대에는 한 주간의 첫날인 주일을 하나님께 예배로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주간의 첫날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은 한 주간 전체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와 삶이 따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③ 신실과 성실의 사람입니다.
  그의 예배를 살펴보면 성실과 신실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에 대한 성실성은 그의 제물에 담겨져 있습니다. 아벨이 드린 제물이 무엇입니까?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라고 말했습니다.

  제물의 가치는 무엇으로 결정됩니까?

  ㉠ 제물의 질에 의해 결정됩니다.
  가인이 드린 제물을 설명할 때는 아무런 형용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단순히 땅의 소산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첫 열매인지 잘 익은 것인지 덜 익은 것이지에 어떤 형용적인 수식어도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인 제물을 선택함에 있어서 그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물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라고 했습니다.
  아벨은 더 좋은 제물, 하나님이 보실 때 합당한 제물을 드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성경은 그냥 양 새끼가 아닌 첫 암양 새끼라고 말하고 그 기름이라고 형용적인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벨이 더 좋은 제물을 드리기 위해 애쓴 것을 표현하는 설명인 것입니다.

  ㉡ 제물의 양에 의해서도 결정됩니다.
  제물의 가치란 질에 의해서도 결정되지만 제물의 양에 의해서도 결정될 수 있습니다. 즉 인색하지 않은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제물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제물의 풍성함 보다 드리는 그 마음의 풍성함을 기뻐하신다고 해야 나을 것 같습니다. 아벨이 드린 제단의 풍요로움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에 앞서 백성들과 함게 풍성한 물건을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하였습니다. 대상 29:16-17절에 보면 그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대상 29:16-17)
  이 기쁨은 다윗만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이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 제단의 일천 번제를 하나님이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라고 표현 되어 마치 아벨이 양의 첫 새끼 한 마리를 드린 것처럼 되어있지만 원문을 직역하면 “그의 양떼의 첫 암양 새끼들과 그것들의 기름으로 ....” 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성실성에 있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시기 원하시면 여러분 마음의 인색함부터 제거하고 시작하십시오.
  시간 드림의 인색함, 여유롭지 못한 마음의 인색함, 물질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함으로 드리는 헌금의 인색함 이런 것에서 벗어나서 풍요로운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물은 제물의 질에 있어서나 양에 있어서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러한 제물은 아벨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성실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실한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려면 예배에 대한 성실성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에 대한 성실성은 삶의 성실성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에서의 성실한 삶은 예배의 성실성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예배의 성실성 회복은 시간을 지키는 데서부터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함으로 그 성실성은 증명될 것입니다. 함께 찬송하고 춤추고 뛸 수 있다면 그런 열린 마음들을 모아서 하나님 찬양을 드릴 수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벨의 예배는 하나님과 교제하고자하는 영적 열망과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만나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에 찬 영적 갈증이 있는 예배였습니다. 그는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신본주의적인 제물을 성실하게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박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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