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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말씀을 내 집에 (삼하 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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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법궤. 엘리 제사장 시절에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빼앗겼습니다.
블레셋 군은 그 법궤를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으로 옮겨다가, 그들의 신 다곤 바로 곁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아스돗 백성이 일어나 보니 다곤이 땅에 얼굴을 박은 채 법궤 앞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곤을 일으켜 세워 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다곤이 또 땅에 얼굴을 박은 채 법궤 앞에 넘어져 있는데, 다곤은 몸통만 성했고, 부러진 목과 동강 난 두 손은 문지방 께에 구르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은 아스돗 백성을 호되게 치셨는데, 아스돗에 종기(독종)가 돌고 온 지경에 쥐가 들끓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법궤를 갓으로 옮겼고, 거기서도 큰 소동이 일어나자 법궤를 에크론으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에크론에서도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이들은 법궤를 이스라엘에 돌려주기로 작정하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돌려 보냈습니다. 젖먹이 송아지가 있는 암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법궤를 실어서 보냈는데,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곧장 벧세메스로 향했고, 벧세메스에 있는 여호수아의 밭에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 법궤를 보았다고(구경) 해서 그들 중 70명이나 죽이셨습니다. 그래서 이 법궤는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가져다가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두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성별하여 그 법궤를 모시게 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헤브론에서 왕이 된 다윗을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그는 시온산성을 빼앗고 그 성을 다윗 성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곤 블레셋을 쳐서 이기고, 주변에 평화가 임하자 언약궤 곧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하였습니다.

다윗은 정병 3만 명을 소집하여 아비나답의 집에 가서 새 수레로 법궤를 싣고 나왔습니다. 그때 아비나답의 아들 우짜가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질 것 같기에 그 법궤를 붙잡았는데, 그만 하나님의 진노를 입어 법궤 옆에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두려웠던 다윗은 그 법궤를 갓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 모시게 하였습니다.

3달 동안 그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이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궤를 모셔 두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집 식구들과 모든 재산에 복을 주신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너무나도 기뻐, 하나님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자기의 도성으로 모시고 옮기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긴 다음 다윗은 살진 황소를 잡아 바쳤고, 모시 에봇을 입은 뒤 하나님 앞에서 덩실거리며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은 미리 만들어 놓은 성막에 하나님의 궤를 모신 다음 백성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식구들에게 복을 빌어주려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사울의 딸 미갈, 바로 다윗의 아내가 그 남편을 책망하였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체통이 참 볼만하더군요. 건달처럼 신하들의 여편네들이 보는 앞에서 온 몸을 드러내시다니”(공동번역)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대답했습니다. “야훼께서는 그대 아버지와 그대 집안을 다 제쳐놓으시고, 나를 택하여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나는 그 야훼 앞에서 춤을 추었소. 나는 앞으로도 야훼 앞에서 춤을 출 것이며, 이번보다 더 경망히 굴 것이요. 그대는 천하게 보겠지만, 지금 말한 그 여편네들은 나를 더욱 우러를 것이요.”

법궤는 언약궤라고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궤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 속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 두 돌 판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법궤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기도 하고, 능력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이 하나님의 궤를 앞세웠던 것도, 여리고성을 함락할 때도 이 궤를 메고 성을 돌은 것도, 그 궤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궤를 그들의 신이 있는 다곤 신전에 두었을 때, 그 다곤 신상이 이 궤 앞에서 땅에 얼굴을 박은 채 쓰러져 있었던 것도 그 궤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다윗이 이 하나님의 궤를 자기의 성, 곧 자기의 집으로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순이 만들어진 법궤를 모셔 오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셔오는 사건인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우선 왕으로서 다윗의 입장으로 보면, 기쁨이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 전, 엘리 제사장 시절에 빼앗겼던 하나님의 궤를 어떻게 돌려받기는 했지만, 한 번 옮기려 하다가 실패했습니다. 물론 다윗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다윗의 거리감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다윗 왕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보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하나님의 궤를 모셔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시거나 싫어하시지 않으신다는 확증을 보여 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왕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였다는 의미로서 다윗의 기쁨은 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또한 다윗 개인적으로 보아도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갓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 집 식구들과 모든 재산에 복을 주셨습니다. 불과 3개월 동안 모시고 있었는데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하나님의 궤가 내 집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내 집에 오면 3개월이 아니라, 3년, 30년, 300년, 3000년이라도 모시겠다는 결심 속에 그 법궤를 모시고 오는 겁니다. 그러니 기뻤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내 집에 복을 주신다는 생각만 해도 기뻤습니다. 그 복이 어떤 것인지는 모릅니다. 아직 받아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충만히, 풍성히 받은 것과 다를 바 없는 큰 기쁨을 다윗은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내 가정에 들어온다는 이 기쁨을 알지 못하거나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잔소리(훈계)라도 하게 되면, 아이들은(어른도 마찬가지지만) “또 설교 하시네.” 그럽니다. 그래서 설교가 잔소리나 훈계와 동일하게 되었습니다. 들어서 기쁜 소리가 아니라, 들어서 지겨운 소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설교가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설교 안에는 교훈도 있습니다. 책망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르게 살고,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때문에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음식을 차려놓은 상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 커지면서 “와! 잘 차렸네!”하고 입맛을 다시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도살장에 끌려온 소 같은 표정들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 제 표현이 과장되었을까요?
기정예배나 심방예배나 속회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모였다가 흩어지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을 내 가정에 모셔 들이는 사건입니다. 내 집에서 속회예배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궤를 내 집으로 모셔 들이는 사건으로 여긴다면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내 가정에 있을 때에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내 가정에 없다면 당연히 이루어지는 것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이 기뻐하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집에 있을 때 내 집은 복을 받습니다.
그것을 안 다윗은 기뻐했고, 또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집에 들어온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내 집에 들어오므로 해서 내 집이 복을 받게 되었다.” 이런 믿음이라면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벧에돔에 복을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 다윗의 집에 복을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이 이제 내 집에 복을 주기 위해 내 집에 모시게 되었는데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빌립보서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는 기도의 응답이 있은 후보다는 기도하기 시작할 때 드려지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느껴지는 그 후가 아니라, 그 전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감사할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인 법궤를 자기 성으로 모셔 들일 때,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소와 살진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집에 들어와서 얼마나 복을 주셨는지를 계산한 후가 아니라, 그 이전에 감사드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춤을 추었습니다.
사실 고대의 제사는 하나의 축제였습니다.
출애굽기 15장, 홍해를 건넌 뒤 애굽에서 나왔다는 데 대한 승리와 감사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을 추니”(20절)

오늘 우리들은 춤을 잃어버렸습니다. 말하자면 감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할지니라.” 공동번역은 “하나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여기서 ‘참되게’라는 말은 ‘거짓 없이 솔직하게’, ‘진심으로’ 그런 뜻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라는 겁니다.

다윗은 왕이라고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감추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나무라는 그의 아내 미갈에게 “나는 앞으로도 야훼 앞에서 계속 춤을 출 것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 기쁨과 감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었습니다.
춤은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춤은 기쁠 때뿐만 아니라 슬플 때도 추어졌고, 허탈할 때도 추어졌습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희로애락이 있을 때마다 춤으로 표현하며 분노와 슬픔을 춤으로 극복했습니다.
‘니코스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 혹은 <희랍인 조르바>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 희랍인 조르바는 춤을 춥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춤을 출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폐허 위였습니다.

많은 시간과 정력과 돈을 투자해서 ‘이제야 한 몫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하는 순간, 산에서 나무를 내리는 시설이 눈앞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한순간에 그의 사업이 몽땅 망해버렸습니다. 그때 그는 이 폐허 위에서 야릇한 웃음을 지은 채, 그 특유의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넋을 잃고 서 있는 그의 젊은 동료에게 함께 춤을 추기를 권합니다.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늙은 조르바에 끌려 그 젊은이도 춤을 춥니다. 그들은 마침내 신명나게 춤을 춥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그 폐허 위에서 춤을 춥니다. 그들은 춤으로 그 슬픔과 고통과 절망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폐허를 창조로 바꾸어 나가는 몸짓인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참 좋구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참 좋았습니다. 이 말을 근거해서 철학자 ‘플라톤’은 “존재는 곧 선이다.” 다시 말해 “있는 것은 모두 좋다.”고 말했습니다.
“있는 것은 모두 좋다.” 이 말은 우리의 세계와 역사가 비록 슬픔과 비참과 고통과 악의 세력에 시달린다고 해도 결국 처음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좋았듯이, 결국 좋을 수밖에 없다는 최종적 승리에 대한 강한 신념과 신앙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참 좋다.” “너무 좋다.”
더구나 복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집에 모셔 들이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나님께서 나와 내 집에 함께 하시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다윗은 야훼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그 춤은 다윗 혼자 추는 춤이 아닙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겁니다. 그 춤에서 다윗은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비록 당장의 모습은 흡족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슬프고, 고통스럽고, 비참하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기쁨의 춤을 출 때, 우리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고, 폐허 위에 새로움을 창조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는 큰 예배든 작은 예배든 축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고, 폐허 위에서 새로움을 창조하게 합니다.

언젠가 서점에 갔더니, 가까운 교회의 장로님이 자루로 된 헌금바구니를 사러 나오셨습니다. 속회 때, 그냥 접시 같은 걸 사용하니까 헌금 액수가 보이게 되고 그것이 부담이 되어 속회에 안 나오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미리 헤아려서 준비하는 것이 좋겠지요.

또 어떤 사람은 예배드리는 건 좋은데, 예배 후에 대접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속회 모이는 거를 피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아예 속회 하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집에 오는 것이 싫어서 안 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갑니까? 수다 떨러 갑니까? 간식 먹으러 가요? 하나님께 함께 예배하자고 가는 거 아닙니까?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새번역에는,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들은 내 집에서 예배한다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순전한 마음.’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 집에 모인다는 것, 내 집에서 예배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기뻐했다는 겁니다.

보세요.
다윗은 왕이 되었습니다. 일개 목동이 한 나라의 왕이 된 겁니다. 그는 가진 것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궤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은 압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만 된다는 것을 다윗은 압니다.
골리앗과 싸워서 승리한 거. 다윗의 실력입니까? 돌멩이의 위력입니까? 아닙니다.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다윗을 승리하게 한 것입니다.
시편 23:1-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내 집에 들어오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전,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가정에 이런 기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가정예배 드릴 때, 
심방예배 드릴 때,
속회예배 드릴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집에 들어온다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게 되었다는, 이 감격과 기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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