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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녹의 믿음 (히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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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전7:2,4,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여러분의 관심이 무엇에 집중되어 있는가?
오늘 이 시간 만큼은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죽음에 대한 일반적 의미 - 죽음에 대한 자연적 계시(박윤선목사)
1)무상 2)비애 3)공포 4)심판

창5:5-31, 반복되는 문구 - “낳았고 ~ 죽었더라.” 이것이 인생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나 오늘 본문의 주인공 “에녹”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다음과 같다.
히11:5,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창5:5-31 말씀 중에 단 한 사람 에녹에 대하여만 “죽었더라”는 문구가 없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면 어떻게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올라가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히11:5에 나와 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믿음”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기에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

본문은 또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히11:5하,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이 죽지 않고 산 채로 들림 받기 전에 -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주석가 이상근 박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어떤 위대한 행위가 아니라 중심에 간직하고 보이지 않는 믿음이었다.”

에녹의 믿음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1)그가 계신 것을 믿음 - 존재에 대한 확신. 예)계시종교와 행위종교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예)김영길박사, 나사의 과학자. 요한복음 2장 6장.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증거를 찾는 것보다 계시다는 증거를 찾는 것이 훨씬 쉬웠다.”

요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했다.
-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현대어성경
-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2)상주시는 이심을 믿음 - 상주시는 이심을 바라봄.
간혹 어떤 사람들은 “상 받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받은 것과 천국을 보장받았으면 됐다는 것이다. 다른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 천국을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고차원적이지 않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상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또한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상 주실 분이심을 믿고 열심을 낼 때 주님 앞에 기쁨이 되는 것이다.
빌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에녹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상 주시는 자이심을 믿었던 것이다. 우리의 실패는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소홀해지고 떠나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히브리서 기자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어 에녹의 믿음을 살펴 보았는데 구약 창세기에서 언급된 에녹의 믿음은 무엇인가?.
창5:22-24,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의 믿음에 대한 중요한 증거가 되는 단어 등장하고 있다. “동행”이란 단어이다.
“동행”이란 말은 - 길을 같이 가는 것. 얼마동안 같이 길을 갔는가? - 300년이다.

그렇다면 그 동행이란 표현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현대어성경 -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현대인의 성경 -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공동번역 -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
영어번역본 - 함께 걸었다.

수지 지구촌교회 이동원목사, 동행의 의미를 부부관계에 적용하여 3가지로 설명했다.
1)뜻의 일치, 조화
오늘날 이혼율 증가의 원인 - 성격차이가 주 원인.부부간의 조화가 이뤄지지 않음. 일방적 강요. 대부분 아내 쪽이 포기하면서 산다. 그것은 동행이 아니다.
암3:3, 두 사람이 의합하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춰야 한다. 만약 내 뜻에 맞추려고 한다면 실패하게 될 것이다.

2)도덕적 성질의 일치
부부간에 뜻이 일치되지 않아도 웬만큼 맞춰가면서 참고 산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문제는 배우자의 부정이다. 남편의 부정을 용납할 아내가 거의 없을 것이고, 아내의 불륜을 용납할 남편도 거의 없을 것이다. 도적적인 부조화는 두 사람의 관계를 회복하기가 어렵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도덕성이 있다. 거룩함이다.
벧전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죄가 있는 곳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된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하고 동행을 원한다면 죄를 포기해야 한다.

3)교통 - 대화, 커뮤니케이션
부부간의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이미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대화의 상대 - 자녀, 이웃 사람.
왜 대화를 않습니까? - 할 말이 없어요. 부부간에 함께 차를 타고 가지만 동행이라 할 수 없다. 예)부산까지 가는 열차에 맘에 없는 사람과 동행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상호 의사교환이 잘 이뤄지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에녹은 항상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들었고, 그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였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잘 유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있다.
에녹이 우연한 기회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분명한 동기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창5:22-23,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므드셀라를 낳은 후”라고 그 시작점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에녹이 65세 되던 해 므드셀라를 낳았는데, 그를 낳고 난 후 분명한 하나님의 부름이 있었다는 것이다.

에녹은 아들의 이름은 “므드셀라”라고 지었다.
“므두셀라”- “무기의 사람”, “창을 던지는 사람.” 이름은 이렇게 지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유1:14-15,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의 예언자적 사역은 두 가지의 멧세지로 요약할 수 있다.
1)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 - 경건치 않은 행동
2)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 - 경건치 않은 언어.

그 시대의 타락한 시대상 - 부패한 행동과 말의 범람.
그 후 300년 동안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예언자로 활동하게 하셨다. 에녹의 선지자 사역은 아들 므드셀라에게 영향을 미쳤다. 므드셀라는 라멕을 낳고 라멕은 노아를 낳았는데 므드셀라가 죽던 해(969세) 노아의 나이가 600세 였고, 바로 그 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는 일이 있었다.

에녹이 65세 때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의 삶이 확실하게 변화되었 던 것이다. 극도로 타락한 현실 세계에 눈이 열렸고,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다.
라인홀드 니버, 미국의 신학자.
“현대인들의 부패한 생활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조롱의 말들을 쏟아 붓고 있다.
마24:38-39,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에녹은 방탕하고 혼란한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300년 동안 한결같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드리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그는 성실히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고, 선지자적인 삶을 살았다. 그리고 죽음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승천함으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노아시대 홍수가 나기 전의 모습과 흡사하다.
혼란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에녹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분명히 배울 수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늘 혼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 사람이 예수님에게 항의를 했다.
-"나의 고통스러운 시간에 당신은 왜 나를 위로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나의 눈물을 보고도 왜 모른척하셨습니까? 왜 이 모래사장을 혼자 걷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 "친구여, 난 너와 항상 함께 하며 너를 보듬어주고 너의 그 고통들을
같이 아파했단다. 너의 발자욱이 하나인 것은 내가 너를 업고 걸었기 때문이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필요하면 찾아가고, 불필요하면 떠나버리지 않았는가?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자. 주님과 함께 동행해 왔는가? 일시적으로만 동행, 들쑥날쑥하진 않았는가?

하나님의 자녀됨은 특별한 은총이다.
자녀된 입장에서 적극적인 응답이 요구된다. 도망 도피하지 말자. 이제는 적극적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어드리는 삶,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 앞에 부름 받는 그날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 바란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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