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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눅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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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 누가복음 13:31-35

요  절 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함 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산을 좋아하는 젊은 말콤은 여자 친구 사라와 함께 등산을 갔습니다. 그런데 해발 4000미터가 넘는 록키산맥을 내려오다가 폭설을 만났습니다. 산장에서 밤을 새우고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가 새끼 곰을 지키고 있는 어미 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은빛 털을 가진 굉장히 큰 곰이 사라를 덮쳤습니다. 말콤은 순간적으로 사라를 밀쳐 내고 곰과 격투를 벌였습니다. 말콤은 곰의 앞발 공격 한 대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 보니 곰이 엎어져 있는 사라를 물려는 찰나였습니다. 말콤은 등산용 칼을 빼들고 곰의 등에 매달려 목을 찔렀습니다. 뜨거운 피가 하늘에 솟구쳤습니다. 곰은 귀청이 터질 듯 소리를 지르더니 말콤을 땅에 떨어뜨리고 얼굴을 마구 핧겼습니다. 얼굴이 찢겨 피가 낭자하고, 머리가죽이 가발처럼 벗겨졌습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곰의 눈을 찌르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사라는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잠시후 구조대가 도착하여 말콤은 병원으로 옮겨져 간신히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일 천 바늘 이상을 꿰매었고, 성형수술을 스무 번도 넘게 했습니다. 말콤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사라가 계속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퇴원한 말콤은 사라를 찾아갔습니다. 흉터투성이인 얼굴에 팔은 기브스를 했고 몸은 말랐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말콤을 맞아주며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말콤은 사라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했습니다. 말콤에 관한 기사가 카나다 전역에 퍼졌나가자 사람들이 의무감 때문에 결혼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사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사고 전부터 그를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 것입니다. 외모보다는 성품이 중요하잖아요? 흉터가 사람 됨됨이까지 바꿀 수 없잖아요." 진실로 사랑은 인생의 꽃이요, 사랑은 인생의 소금이며,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는 당신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추한 것까지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이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곳곳에 들리셔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메시야를 거절하는 헤롯과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자기를 죽일 예루살렘 백성들이 받을 심판을 생각하시면서 슬퍼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크신 사랑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31-33)

31절을 보십시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말했습니다.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헤롯은 예수님을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죽이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9:7). 그러나 누가복음 23:8에 보면 헤롯이 예수님 보고 심히 기뻐하였고, 오래 전부터 그를 보고 싶어 한 것을 보면 죽이려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들이 와서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고 말했을까요? 헤롯이 그런 정보를 흘려서 예수님을 자기의 통치 영역 밖으로 몰아내기 위함이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자기 통치 영역 내에서 어떤 소요사태가 발생하면 전적으로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문을 전한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유대 땅으로 보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죽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이들은 마음으로부터 메시야를 거부하는 자들임을 암시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앞의 비유의 말씀들에 비추어보면 천국 문을 스스로 닫아 버리는 자들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는 자들이요, 천국 잔치에 늦게 도착하여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자들이요,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 이를 갈게 될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32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제시한 위협적인 정보와 권고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단호한 의지를 표명하시는 계기만 만들어 주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가리켜 저 여우라고 칭했습니다. 본문에 사용된 여우는 여성형으로 암 여우를 가리킵니다. 이는 헤롯의 본성을 잘 드러내 주는 표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우를 동물들 중에 가장 간교하고, 가장 해로운 동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가치하고 아무 쓸모없는 인간을 빗대어 말할 때 여우라고 했습니다. 헤롯은 술책과 배신, 교활함과 비열함이 암여우와 같았습니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 죄를 책망하자 투옥시켰습니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에 매료되어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 선물로 줄만큼 잔인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저 암 여우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에게 무엇을 말하라고 하셨습니까?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구원 사역을 완성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헤롯과 바리새인들의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메시야 사역을 계속하실 것을 선포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쳐 낫게 하시는 일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메시야의 사역입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면서 각 성 각 촌을 방문하시며 어디서든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13:22). 오늘과 내일, 예루살렘에 가기까지 그 일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일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삼일에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메시야 사역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 메시야 사역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예비하신 일이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절정을 향하여 한 발자국씩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이 일을 저 암 여우 같은 헤롯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는 헤롯이 자기를 해칠 수 없다는 또 다른 한 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은 법이 없느니라.“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갈 길을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헬라어 dei(데이)라는 동사는 must라는 뜻인데 의무적으로 반드시 ....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그 길을 반드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인간의 타락을 아시고 예비해 놓으신 메시야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한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셔야 합니다. 이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이는 변화산에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대표였던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논의된 일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눅 9:31). 그후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9:51).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 밖에서 헤롯 같은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서 끝까지 자기의 갈 길을 가야하고, 그 길의 끝은 예루살렘이며, 거기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인식하고 계셨을 뿐 아니라 그 일을 향해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다가가고 계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이 과정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인류 구속 역사를 완성해 가시는 과정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은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승리의 길이요,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는 말씀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큰 용기와 힘을 주었던 말씀이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야 할 길을 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를 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의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고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손해와 희생이 오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참으로 승리자입니다.

학생들은 크리스천 학생으로서 받아야 할 고난이 있습니다. 교사는 크리스천 교사로서, 의사는 크리스천 의사로서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회사원은 크리스천 회사원으로서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주부는 크리스천 주부로서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특히 회사원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신입사원 초기에 적응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작업을 해야 하는 그 일 자체만 해도 파김치가 됩니다. 그런 중에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더욱 더 마음의 짐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믿음을 지키며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영향력을 끼쳐 가는 목자님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분들을 통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실 것을 믿습니다.

II. 예루살렘을 사랑하시는 예수님(34-35)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신 후에 메시야를 배척하는 예루살렘을 향한 안타까움과 비통함을 토로하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함 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시민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동시에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이 문구는 마치 다윗이 자기를 반역하고 죽은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부짖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고도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예루살렘을 생각할 때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탄식하며 슬퍼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어떤 도시였습니까? 이름 그대로 평화의 도시오,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친 산이요,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거룩한 도성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이후부터 예루살렘은 배도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이 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에 성전을 세우고 우상숭배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유다도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왕들과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들에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셨습니다. 제일 마지막으로 보낸 선지자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까지도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까지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함 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닭은 3주간 동안 금식하며 알을 품고 새끼를 깝니다. 그후 항상 병아리들을 데리고 다닙니다. 개나 고양이가 가까이 오면 날개를 벌리고 “꼭!꼭!”합니다. 그러면 그 많은 병아리들이 날개 아래로 다 기어들어갑니다. 암탉은 깃털을 곤두세우고 적을 위협하여 제 새끼를 보호하며 안전한 곳으로 데려갑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그 품속에 모으려고 여러 번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예루살렘을 여러 차례 방문하셨습니다(2:14;5:14;7:14, 28, 37;10:22, 23). 그들의 죄를 책망하시고 하고 많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을 가슴에 품고자 하셨습니다(15장; 마 9:36; 11:25-30; 15:32). 예수님은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택한 백성들을 주님의 사랑의 날개 아래 모으고자 온 이스라엘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께 나오는 자는 어떤 죄인이라도 다 영접해 주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악령에 시달리는 자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도 보호해 주셨습니다. 세리 마태도 제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자기를 배반할 가룟 유다도 품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죄인들의 구원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지금은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온 세상을 품고 그 날개 아래로 들어와 보호받기를 원하십니다.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 있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 들어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두 팔을 벌리고 그 날개 아래로 들어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318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간절히 오라고 부르실 때에 우리는 지체하랴,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 들은 체 하려나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사랑의 품에 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가기만 하면 주님께서 다 품어주시고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품으로 들어오기를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돌로 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 했습니다. 이런 양떼들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지자들을 거역하였던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도 거부하였습니다(13절; 11:15). 마음의 완악하여 불신앙을 고집하며 그리스도를 죽이려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들을 구원코자 하셨지만 그들 스스로 구원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품어주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거부하기 때문에 멸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함 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를 거부하는 이들의 운명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암탉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히틀러 시대에 어떤 사람이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다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고문을 견디어 내고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살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석방되었는데 왜 자살했는가에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를 나치에게 밀고한 사람이 바로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살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고문의 고통은 이겼지만 아들의 배신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만큼 배신의 상처와 아픔은 큰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사랑을 쏟는 자식이 부모를 배신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살 소망이 끊어진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양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간이라도 빼줄 만큼 온갖 좋은 것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양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너무 상처를 받아서 ‘다시는 양을 위해서 간을 빼주지 않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만큼 은혜를 배반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배반해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 종들을 보내어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거절한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 번 스무 번 전도를 받고서야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도 많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고도 또 배반하여 세상으로 간 사람까지도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인 그 사람들까지도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호세아가 집나간 아내 탕녀 고멜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수없이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49:15). 하나님은 마침내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스펄젼 목사님이 시골 농가를 방문했습니다. 마당 한쪽 편에는 큰 풍향계 있었습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화살촉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풍향을 가리키는 화살촉 밑에 꼬리표가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그 표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설마 하나님의 사랑이 바람 부는 대로 바뀐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러자 농부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목사님, 정반대이지요. 바람이야 어떠한 방향으로 불던지 간에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변함이 많습니다. 인간은 항상 변합니다. 얼굴도 변하고 사상도 변하고 풍속도 변하고 유행도 변합니다. 현대를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아니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치 아니합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주이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영원한 만세반석이십니다. 우리 모두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러한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보라. 너희 집에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집'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성전을 ‘너희 집’이라고 하시고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이 떠나시면 남은 것은 건물뿐입니다. 결국 그 집은 황폐하여질 뿐입니다. 아가페적인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내에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렇지만 인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인내의 한계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인내의 한계를 읽고 하나님의 심판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접하는 자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지만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주님을 만날 수 있지만 잠시 후에는 만날 수 없습니다. 이제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주님을 뵐 수 없습니다. 오직 다시 만날 때는 주님을 찬송하는 사람들만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경주를 다 하고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예루살렘처럼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죄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함 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하시며 탄식하시며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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