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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3.1절]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사람들 (행 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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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의 기도와 염려 가운데 저는 지난 한 주간 중국 선교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속해있는 21세기 동북아선교회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중국의 처소 교회의 지도자들을 모아서 교육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 곳의 이름을 장춘 신학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장춘 신학원이 1기부터 4기까지 졸업을 했고, 또 그 분들이 대부분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졸업하신 분들 중 목회를 하고 있는 분들을 다시 불러 모아서 재교육하는 기회에 제가 가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과 저녁은 집회로 하고, 낮 시간은 제가 성경공부를 인도했습니다. 점심 먹고 오후시간에는 동행한 저희 아내가 찬양, 율동을 가르치고 사영리를 전달하는 일도 했습니다.

  중국에 갈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중국의 국가 경제는 세계적으로 발전해가지만 개인, 개인은 참 어렵고 힘듭니다. 국가 경제로 보면 세계 5위이지만, 개인의 삶의 질로 보면 세계 100위를 넘습니다. 참 비참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민족이 바로 중국민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에 갈 때 마다 하나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장춘 시내에서 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외곽 시골 교회에서 집회를 가졌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먹고, 자면서 공부하고 말씀을 나누었는데 시골이다 보니 그렇게 시설이 좋지가 않았습니다. 교회 옆의 어느 집사님 집에서 거하는데, 옛날 우리 70년대 시골집처럼 화장실은 저 밖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고, 아직도 수수깡을 땝니다. 중국 화장실은 재미있어서, 남녀는 구분이 되어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칸막이가 되어 있어서 마주 앉아 볼일을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교회에 가도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여자 두 분이 들어가면 같이 마주보고 일을 봅니다. 그런 것이 익숙하지 않으니 좀 불편하구요, 또 남의 집에 가니 샤워를 하고 머리 감을 수가 없어서 냄새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갈급해 하고 사모하는지, 그 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유익하고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특별히 중국에서는 외국인이 와서 복음 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불안합니다. 시골 한적한 곳에서 하지만 저도 좀 불안했습니다. 이거 또 경찰이나, 공안이 오면 어떡하나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거기 참여하는 분들 보면 전혀 그런 불안기가 없습니다. 기쁨으로 참석하고 말씀 듣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특별히 교회를 제공하는 집사님은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참 대단하십니다. 교회를 제공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4박 5일 동안 먹고 생활하는 것을 다 제공하고, 또 만약 발각이라도 되면 교회가 굉장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고, 벌금도 많이 내기도 하고, 잘못하면 문을 닫을 수도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기쁨으로 대접하는 모습을 볼 때 참 감사했습니다. 대개 중국교회는 목회자가 부족하기에,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같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교회를 목회하고 설교하십니다. 그러니 평신도 중심의 교회가 바로 중국 교회입니다. 그 분들이 얼마나 설교도 열심히 잘 하는지 모릅니다. 바로 그 분들이 와서 재충전을 받고 또 돌아가서 열심히 목회를 하게 됩니다. 

  연변에서 오신 한 여자 목사님의 간증을 들어보니, 그 분은 원래 대학을 나오고 일어 교사를 했답니다. 중국은 교사가 되어도 한국 돈으로 10만원, 의사가 되어도 15만원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관광 가이드를 겸해서 했답니다. 한국에서 관광 온 분들을 안내하고, 주일에 교회 가자고 하면 모셔다 드리곤 했답니다. 보통은 자기는 안내를 하고 늘 밖에서 기다렸는데, 그 날 따라 자꾸 같이 들어가자고 해서 따라 들어갔다가 설교를 듣고 자기가 더 큰 은혜를 받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분이 관광가이드 하다가 예수를 영접하고 복음을 만나서 사역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 남편은 더 재미있습니다. 그 남편의 직업은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어떤 설교를 하나 감시하는 공안이었답니다. 감시하러 교회 가서 설교를 듣다가 자기가 은혜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부부가 광주에 있는 호남신대에 와서 신학을 공부하고, 부인은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곤 중국으로 들어가서 연변에 교회를 개척하여 한 100여명 되는 교회를 사역하고 있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도 역사하실까하는 생각을 중국에 있는 동안에 늘 했습니다. 전혀 두려운 빛이 없이 강하고 담대하게 목회에 임하고 있는 그 분들을 볼 때마다 저는 참 많은 감동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삼일절 기념주일입니다. 87년 전, 1919년 3월 1일, 우리는 한국의 독립을 전세계에 선포하고 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엄청난 힘이 바로 기독교의 힘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입니다.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고 서명을 하는데, 많은 사람이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죽는 순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33인 중에 16인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이 먼저 서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15인이 천도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2명이 한용운씨를 비롯한 불교인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역사 속에서 동족의 아픔이나 그 불의한 현실을 묵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죽음의 정신으로 역사에 참여했던, 그리고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했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3.1운동 당시, 남북한을 합쳐서 우리나라 인구는 총 2천만이 안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기독교인의 인구가 전 인구의 1.2%인 25만명에 불과했고, 천도교는 200만명에 육박했고, 불교나 유교는 300만을 웃도는 상당한 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1 운동 당시 체포된 종교인의 수를 조사해 보니,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기독교인 중에 체포된 사람이 2039명, 천도교인 중에 체포된 사람이 1063명, 유교인 중에 55명, 불교인 중에 체포된 사람이 41명이었습니다. 체포된 종교인의 60%는 바로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25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3.1 운동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표적인 유관순 누나는 그 분은 선교사의 인도로 예수를 영접하고 이화여고에 재학중인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3.1 운동을 주도하고 감옥에서 순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3.1운동의 중심에는 바로 교회가 있었고,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두려움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의 정신을 가지고 그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도 두려움을 모르는 한 무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사도행전 3장 초반에 보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한 앉은뱅이를 보았습니다. 그가 돈을 구했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때, 그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걸으며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좋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베드로와 요한을 둘러싸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왜 우리를 주목합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행한 일이 아닙니다.”하고 증언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변화 받고 회개한 무리가 남자만 5천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남녀 모두를 합치면 만 명이 넘는 무리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일대에 폭풍이 몰아친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놀란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입니다. 이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잡아다 재판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 재판정이 산헤드린입니다. 우린 공회라고 부릅니다. 유대의 지도자 70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거기는 대제사장과 율법 교사들, 그리고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막강한 권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오늘날의 국회와 같은 곳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 외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그 공회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압력을 넣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권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법정 앞에 베드로와 요한이 섰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하는 질문 앞에 그들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나사렛 예수가 이런 일을 하신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은 이 사람들에 의해 고침 받은 이 앉은뱅이가 옆에 있기에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다시는 너희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면서 그들을 위협하며 내보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과 하나님 말씀 듣는 것 중 어느 것이 옳겠느냐?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조금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들 안에 복음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함을 입었고 진리 안에 있기에 두려운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25만명의 크리스챤들이 3.1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면, 오늘 천만의 기독교인은 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역할, 어둠을 방지하는 빛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베드로와 요한의 용기와 담대함이 어디서부터 출발되었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베드로와 요한은 진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얼마나 잘 사느냐’입니다.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느냐, 몇 cc의 차를 운전하고 다니느냐, 얼마짜리의 메이커 있는 옷을 입고 다니느냐가 사람들의 성공의 척도이고 관심사입니다.
  그러나 정말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르게 사는 것이고, 의롭게 사는 것이고, 옳게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리 안에서 사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합니다. 세상에도 많은 진리가 있습니다. 도덕적인 진리도 있고, 자연과학적인 진리도 있고 사회적인 진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최고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진리 되신 그 분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고 그 분만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 6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였습니다. 그 분을 소유하고 그 분의 말씀 안에 거할 때 그들은 가장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말씀 안에 그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질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보다 더 좋은 아름다운 진리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은, 우리의 진리 보배되신 그리스도를 질그릇된 우리 안에 모시고 있는 사람의 삶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이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이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당하여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보배요 진리되신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진리 안에 서 있습니까? 오늘 이 불의한 세상 가운데 진리 편에 서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앞에 서서 백성들을 향해 선포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택하라, 아니면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택하라”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15절에 여호수아는 백성을 향해서 오늘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불의와 진리가 있습니다. 선과 악이 있습니다. 거짓과 진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진리 안에 있을 때 가장 강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19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아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너희 스스로 판단해 봐라! 우리가 당연히 불의가 아니라 진리 편에 서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 성경 13절에 보니,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어부 출신이요,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있는 그들은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배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많이 가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진리 안에 있는 자가 가장 강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그들이 위험 앞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마음이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합력했습니다. 오늘 성경 20절에 보니,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한 가지 생각,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중에 만약 한 사람이라도 흔들렸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당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당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마음과 뜻이 모아질 때, 우리는 강한 하나님의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 위에서 사랑으로 교제할 때 우리 교회는 가장 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법칙은 다릅니다. 세상의 수학은 1더하기 1은 2지만, 교회의 계산은 다릅니다. 1더하기 1은 3이 되고, 4가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명 세 명만이 아니라 무한하신 능력을 가지신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천만 크리스챤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를 통해서 이 사회가 변화되고 있습니까? 이 사회가 개혁되고 있습니까? 사회가 정의로워지고 있습니까? 변화되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천만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위에서 사랑으로 하나 될 때, 우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영신교회의 교우들이 사랑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다면, 영신교회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봉사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3.1 운동이 세계적인 큰 풍랑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계급이나 신분, 종교를 초월해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가 될 때 그들은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 가운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둘기와 개미가 살았는데 하루는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났습니다. 개미가 홍수에 떠내려가는 것을 비둘기가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잎사귀를 하나 물어다가 개미 앞에 떨궈 주었더니 개미가 그 잎사귀에 올라가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개미는 너무 고마워서 내가 언젠가 이 은혜를 갚아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사냥꾼이 비둘기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기어가 사냥꾼의 발을 물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허공에 총을 쏘았고 비둘기는 멀리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작은 미물일지라도 힘을 합칠 때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 영신가족들이 뜻을 합하고 마음을 합하고 힘을 합할 때 하나님의 큰 용사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33편에 보니,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는, 너희가 서로 물고 뜯으면 피차 멸망할까 두려워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 될 때, 성령으로 하나 될 때, 가장 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에 나와서 무리들에게 돌아가서 그들은 일심으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합해서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했다고 오늘 성경 31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신교회가 마음과 뜻을 합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함으로 정말 이 신길동 지역에 영등포 이 서울 지역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축복하는 놀라운 공동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위협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복음 전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살려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서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굽신거리며 공회를 빠져나오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달랐습니다. 우리는 너희가 아무리 위협해도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모신 예수님, 내가 체험한 이 복음의 능력을 어찌 부인하고 벙어리가 될 수 있느냐, 너희가 아무리 위협해도 내 생명을 빼앗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소리칩니다.
  그들이 이리 말할 수 있는 용기는 복음에 대한 확신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의 확신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복음만이 우리 영혼을 살릴 수 있다는 이 확신이 그들을 강하고 담대한 전도자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같이 공부하던 한 집사님은 북한과 중국의 접경지역에 살고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늘 탈북자들이 오고 가는 것을 경험하고 만나고 대접하곤 한답니다. 이 분은 탈북자 사역을 하시던 분인데, 탈북해 오는 분이 있으면 자기 집에 숨겨주고, 입을 것 주고 먹을 것을 주고 갈 곳으로 보내주는 일을 합니다. 많은 이들이 탈북을 하면 한국에 가기를 1차 소망한답니다. 또 탈북 외에도 친지방문을 목적으로 중국에 건너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같은 사회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통행증만 받으면 왕래할 수 있는데, 그 분들 가운데에도 한국으로 건너가기를 희망하는 분들도 있답니다. 이 분들 가운데에는 같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같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얼마나 귀한지를 깨달은 분들은 한국에 가기를 소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나이에 한국에 가서 뭘 하겠냐고, 어찌 적응할 수 있겠냐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겠습니다고 고백하며, 제자훈련 받고 다시 들어가는 분들이 수도 없이 많다고 합니다.

  그 비참한 어둠 속에서도 복음의 능력은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복음은 역사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 전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전도할 때 두려워하지 맙시다. 생명의 복음이 여기 있는데 부활의 복음이 여기 있는데, 왜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합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복음의 확신을 가지고 이 복음의 보화를 가지고 아직도 이 민족 가운데 예수 믿지 않는 80%, 몇 천만의 영혼을 향해서 담대히 나아가고 진리 안에서 승리하고 자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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