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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 착각 (마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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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복잡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말다툼하고, 형제는 서로 싸우고, 가족끼리 늘 서로 욕하는 것이 예사인 집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집 안엔 불평만이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이웃집은 2대 가족이 함께 사는데도 언제나 온화했습니다. 다투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아주 감동이 되어 물어봤습니다.“댁은 어떻게 그리 평화스럽습니까?”대답은 이상했습니다.“선생님 댁은 선한 사람만 한 데 모였지만 우리 집은 악한 사람뿐이니까요.”놀라워하는 얼굴을 보고 그 이웃 사람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댁에서 가령 실수하여 항아리를 깼다고 합시다. 그 때는 어떻게 합니까?”“누구야? 이런 곳에 항아리를 놓아둔 놈이!”그러죠.“그러면 부인이 뭐라고 합니까?”“아니, 당신은 눈뜬 소경이요? 라고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바로 그겁니다. 당신의 집은 모두 저마다 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아, 내가 그런 곳에 놓아둔 것이 잘못 이었어요.’‘아뇨, 제가 부주의한 탓 이지요’하며 모두 자기 자신이 잘못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집안이 평화롭고 안정이 되지요.”하더랍니다. 평화란 남의 잘못 보다 내 잘못을 먼저 보고 인정하는데 그 출발이 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여섯 가지의 덕을 가르쳤습니다.
첫째가 공부하는 것으로 많이 배우고 많이 가르치는 것을 큰 덕행으로 여겼습니다.
둘째는 환자를 방문하는 것입니다. 앓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방문하고 같이 위로하며 기도하는 것을 중요한 덕행으로 여겼습니다.
셋째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잘 살면서 가족끼리만 잘 먹는 집은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집을 활짝 열어놓고 소찬이라도 이웃과 더불어 나누며 즐거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넷째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귀한 일로 여겼으며,
다섯째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모인 자신만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하루라도 결석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닦달하면서 교회에 결석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박힐 수 있도록 신앙교육에 힘썼습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가 다른 사람의 장점을 생각하는 덕행입니다. 사람이란 남의 단점부터 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평생가도 그 사람의 장점을 보는 눈이 생기지 않습니다. 반면에 그 사람의 장점을 먼저 보면 허물은 가려지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비판이 어디에서 납니까?<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본능적 자기 방어의 무기입니다. 비판이 언제 일어나느냐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비판은<자기 열등감(自己劣等感)>에서도 일어나고<자기 우월감(自己優越感)>에서도 일어납니다. 열등감이란 무엇입니까?“나는 왜 저 사람보다 못 할까?”하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패배주의(敗北主義)에 빠져있는 마음이 보상심리로 늘 다른 사람을 부정적인 말로 비판합니다. 그런가하면 우월감이란 무엇입니까?“저 사람보다는 내가 항상 뛰어나다”는 교만한 생각 자체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비판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두 가지는 모두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고서 내가 올라서야 하는 비인격적인 비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남을 깎아 내림으로 무의식적으로나마 자기가 높아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남을 비판하는 목적입니다. 내가 비판함으로 다른 사람이 어떤 피해를 입을까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또 하나는 자기보다 낮은 사람을 비판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대체로 자기와 사회적으로 같은 신분에 속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더 나은 사람들을 비판하게 됩니다. 이게 열등감(劣等感)에서 오는 비판의 심리입니다.

그리고 비판의 특징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그 내용이 대체로 비판하는 사람 본인이 지니고 있는 결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것을<투사작용(投射作俑)>이라고 부릅니다. 자기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비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정직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정직한 행위까지도 부정직하게 봅니다. 본인이 거짓말쟁이인 사람은 다른 사람도 거짓말쟁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정대로 다른 사람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 자기 같은 줄 아는 것, 이것이 불행입니다.

남을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대체로 몇 가지의 심리적 동기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기 일에 등한히 하는 사람이 남의 일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입니다.“남의 집에 가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사람들아, 너희 집에 돌아가서 바늘 쌈지를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특히 여자들 중에 남의 일에 참견하느라고 자기 집 바늘 쌈지가 제자리에 놓여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 일에 바쁜 사람은 남의 일에 참견할 여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자기 허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남의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가랑잎이 솔잎보고 바스락거린다고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랑잎과 솔잎 중 어느 쪽이 더 요란합니까? 자기 허물이 많은 사람이 남의 허물을 탓한다는 비유입니다. 이렇게 남의 허물을 말하는 사람의 심리적 동기는 마치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이 나의 허물을 없애는 것 같은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죄인이기보다 모두가 죄인이면 내 죄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요상한 심리입니다.

셋째 경우가 재밌는데요.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이는 것은 나에게 똑 같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골목 깊숙이 이상한 술집이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그 골목을 들어가는 것을 지나가는 몇 사람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곳이 무엇 하는 곳인지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다녀 온 사람은 그가 왜 그 골목에 들어가는지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행동이 허물로 보이는 것은 나도 그런 허물을 경험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허물이 특별히 잘 보이는 사람은 나에게 문제 있음을 먼저 생각하십시오. 옛날얘깁니다. 하루는[무학대사]가[이성계]를 찾아갔습니다.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한참 쳐다보더니“자네는 돼지상이네”하더랍니다. 이에 무학대사는 이성계에게“부처님 상이시군요.”라고 응수 하더랍니다. 무안한 이성계가“아니, 나는 자네더러 돼지 같다고 했는데 자네는 왜 나에게 부처 같다고 하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무학대사가 한 말이 유명합니다.“사람은 누구나 자기 얼굴 생긴 대로 남의 얼굴을 봅니다.”무슨 말입니까? 내 얼굴이 돼지 같으니 남도 돼지 같이 보이는 겁니다. 남의 허물이 자꾸 보이면 우선 나에게 문제가 없나를 생각해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신 말씀이 바로 우리들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이 모든 이야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칭찬보다는 흉보는 것을 좋아하는 심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을 칭찬하는 이야기보다는 남을 흉보는 말에 더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남을 칭찬하는 모임보다 남의 흉보는 모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폴란드의 피아노 연주가이며 작곡가이며 정치가로 유명한[파데레프스키]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보스톤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는데 열두 세 살 되어 보이는 구두닦이 소년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꾸벅하고는 구두를 닦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누추한 작업복을 입고 손에는 솔을 들고 있는 소년의 얼굴에는 구두약이 묻어 더러워져 있었지만 귀여웠습니다. 그래서[파데레프스키]는“내 구두는 지금 당장 닦지 않아도 좋은데 네 얼굴은 좀 닦아야 하겠다. 네가 얼굴을 닦고 오면 이 은전을 주겠다.”고 하고는 주머니에서 은전을 꺼내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소년은“네”하고 대답하고는 즉시 얼굴을 깨끗이 닦고 돌아왔습니다. [파데레프스키]는 웃으면서 소년을 한 번 안아 주고서는 약속대로 은전을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소년은 돈을 받았다가 잠시 후 다시 돌려주면서 하는 말이“이 번에는 제가 이 은전을 드릴 터이니 아저씨 머리 좀 깎고 오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긴 머리털을 예술가의 자랑으로만 생각하고 그 것이 다른 사람 보기에는 흉하게 여겨지고 있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자기 눈에 흉하게 보이는 것을 지적했다가 어린아이에게 망신을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직접 두는 사람보다 옆에서 훈수(訓手)를 두는 사람에게 수가 더 잘 보인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은 쉽게 보면서도 자신의 결점을 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가지는 또 하나의 결점이 아닌가합니다.

헬라 사람들의 이야기에“사람은 누구나 두 개의 자루를 메고 다닌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앞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뒤에 메고 다니는데 앞의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담고 뒤에는 내 허물을 담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앞주머니에 남의 허물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앞쪽으로 쏠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앞에 있는 주머니에 남의 허물을 담을 때마다 그만큼 뒤에도 내 허물이 함께 들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2절이죠.“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가 비행을 하다 보면 상당히 위험한 경우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가운데 자주<비행 착각>이라는 것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주로 타고 다니는 여객기는 주로 같은 방향으로 비행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드뭅니다만 전투기의 경우에는 공중에서 회전도 하고 급강하, 급상승 등을 반복하다 보면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기 때문에 어느 쪽이 하늘이고 어느 쪽이 바다인지 구분을 잘 못해서 당황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또 같은 고도에서도 비행기가 선회 비행(원을 그리며 비행)을 하면서 회전을 할 때 속력을 좀내면 비행기가 자꾸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속력을 좀 늦추면 비행기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같은 고도에서 날고 있어도 조종사는 종종 이와 같은<비행착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러데 여러분, 조종사가 비행기를 조종할 때 비행 착각을 일으키는 것처럼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범하는 위험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신앙 착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각과 분명히 달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정상적인 신앙입니까? 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자기 생각과는 다른데도 그 말씀보다는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더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게 뭡니까? 바로<신앙 착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착각은 대부분 자기중심적이어서 자신은 대단히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대단히 잘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착각이 나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 착각이 내 신앙의 좌표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신앙의 착각이 내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게 낭패입니다.

이렇게 나를 바로 볼 줄 알아야한다는 것과 함께 생각할 것은 우리가 남을 비판하지 않으려면 먼저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이해>라는 뜻의 영어 단어가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이 단어는“밑에”라는 뜻의와“서다”라는 의미인이 합쳐진 말로써 말 그대로 하자면“밑에 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생각해보자면“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나를 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해>라는 단어처럼 이렇게만 되면 남을 쉽사리 비판 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2장3-4에서 뭐라고 했습니까?“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먼저는 자기를 돌아보고 또한 다른 사람을 돌아 볼 때 기쁨이 충만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집을 헐기는 쉽지만 새 집을 짓기란 어렵고요, 비판을 해서 남을 망가뜨리기는 쉽지만 건설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래서“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그의 신발을 신고 한참 동안 걸어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 지혜의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먼저 보는 신앙의 지혜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자신의 신앙 착각 속에서 늘 다른 사람의 흉허물을 볼 것이 아니라 이제는 먼저 나를 볼 줄 알고 남을 이해할 줄 아는“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아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철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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