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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행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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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오늘은 제목, 본문, 내용 다 따로따로입니다.

사도들의 전도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 그 가운데 19장에 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묘사되어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1세기의 어느 날, 지금도 유명한 유적으로 남아있는 에베소 극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열광의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날 그들의 장면을 한 마디로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행19:32>

“극장 안에서는 더러는 이렇게 외치고, 더러는 저렇게 외치는 바람에, 모임은 혼란에 빠지고, 무엇 때문에 자기들이 모여들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여러분, 이 극장 안에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핏대를 올리며 소리를 지르고 질세라 뒤를 이어서 어떤 사람은 이전에 소리를 질렀던 사람보다 더 큰 소리를 내고 상상이 되시죠?

문제는 자기들이 왜 이 극장 안에 들어와 있는지 조차 모르고 그냥 소리만 냅다 질러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이 무엇을 하기 위하여 이 극장 안에 들어와 있는지 모를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이 극장 안에 들어와 있는지를 알려고 하지도 않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행19:32>은 단적으로 지적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이 결여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 우매함을 보란듯이 드러내고 있었고 성경은 그 핵심을 여지없이 꼬집었습니다.

어느 시인이 인생을 극장, 무대에 비유하였지요? 그것에 비춰보면, 에베소 극장에 모였던 이 무리들의 모습은 인간 군상(群像)들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이제는 왜 살아야 하냐고 묻는 것조차도 두려워서 “웃지요”하며 미소 띤 허무로 도피해 버리고 맙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도피하면 쉬 잊어버릴 것같지만, 사실 도피는 더욱 진한 두려움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는 것임을 사람들이 못느끼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느 때에 소리를 지릅니까? 캄캄한 골목길에서 불쑥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두려움이 엄습하면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까?

개인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현상에 비춰보면, 오늘날 우리 문화가 비명에 가까운 광란, 엽기의 문둥이꽃을 피우는 인간 군상들의 정서가 바로 두려움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인생극장의 배우들이 영혼이 곤고하고 허무하고 무기력한 것은, 그래서 자신의 내면의 허무함을 느끼게 하는 고요함을 견디지 못하고 광란의 문화를 낳는 주요한 한 이유는, 자기 정체성의 상실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이 단순하고도 쉬운 질문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질문이 되어서 터부시되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은 자기정체성의 상실은 인생극장에서뿐만이 아니라, 교회극장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너는 왜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교회에 가냐?”라고 물으면 명쾌하게 대답을 해 줄 수 있습니까?

일요일마다 예배당에 가긴 가는데, 말하자면 그냥 왔다갔다 한다면, 신앙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이 확실하지 않으면, 허무와 두려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허무와 두려움이 진할수록 나타나는 현상이 자기연민이 강한 모습입니다. 타인을 향한 공격적 분노로 나타나든지, 자기 자신에 대한 슬픔으로 나타나든지, 속에서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느낄수록, 내 초라한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연민의 욕망은 강하게 나타납니다.

종종 교회극장은 이런 연민의 욕망을 시위하기 좋은 장으로 여겨집니다.
교회는 사랑과 정의를 그 이상으로 표명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으면, 사랑과 정의의 좋은 이름은 부르짖지만 이상한 현상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정의, 정당성의 이름으로 타인을 향한 공격적 성향을 마구 분출하는 죄악을 쏟아내며 또 사랑을 갈망하고 노래하나 실상은 자신의 슬픈 정서의 타령에 불과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하염없이 불쌍한 모습으로 자신을 비춰지게 하든지, 요란한 왕뚜껑의 모습으로 자신을 비춰지게 하든지 하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이 교회는 정의가 없다고 혹은 사랑이 없다는판단과 비난을 서슴지 않습니다.

문제는 교회극장에 꼬박꼬박 출연을 하지만, 그 마음이 여전히 허무와 두려움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극장에서도 그 심령이 허무와 두려움이 지배하는 것은 단언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정체성의 결여는, 종교의식의 습관이 반복되면 될수록 더 진한 허무와 두려움의 그늘을 드리웁니다. 허무와 두려움이 강렬하게 느끼지면 느껴질수록 더 쉽게 뚜껑열리고 더 사소한 일에도 삐지고 시험들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더 더 속좁고 삐지기 잘하고 용서 잘 못하고 억울한 감정 안풀고 더 꽁하고 그런 모습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건강한 사람으로 치유하시는 은혜를 베푸시고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직접적이고 대표적인 초청이 <눅5:31,32>에 나와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눅5:31,32>

여러분, 이 말씀에서 의사로서의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건강하지 못한, 병든 죄인들을 어떻게 치유하시겠다고 하십니까? “회개시켜서” 그게 정답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진정한 치유의 관건은 회개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의 병이 깊은 사람일수록, 그래서 내 심령이 허무와 두려움, 자학과 공격적 성향이 많은 사람일수록 회개가 많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병이 깊은 사람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자신의 연민을 지지해 주는 모습으로 잘못 해석합니다. 진정한 치유, 건강한 인간다움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회개”가 관건임을 선명하게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병든 마음에는 그 단어가 쉬 보이지 않습니다.

회개는 마음의 돌이킴, 생각의 돌이킴입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자기 정체성의 확립은 오직 회개의 열매입니다. 세속사상의 역사에서 인간들이 그 똑똑한 머리로 별별 추구, 시도 다 해봤지만, 여전히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여 포기하고 절망하고 허무하고 자폭하고... 엽기의 발광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직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별별 짓은 다해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만큼은 안하겠다고 뻐팅기고 있기 때문에 그 난리들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아니 건강한 인간으로서의 치유, 진정한 인간다움은 회개의 열매라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회개의 복음이 귀머거리같은 인간들에게 들려지도록,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간의 정체성,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손에 못박혀 죽으신 역설입니다. 세상에, 역사에 이보다 더 극한 모순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 손에 죽는다 이보다 더 연민을 깊이 느끼기에 강렬한 시츄에이션이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분노를 자아내기에 합당한 상황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겪는 억울함, 원통함, 슬픔, 상실감, 거절감 모두를 다 합하여도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하겠습니까?

그냥은 듣지 못하는 바보같은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바보같이 자기를 부인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 이럴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습니까? 왜 나만...” 하나님께 따지며 나는 내 처지가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하여 하염없이 울고 미치도록 발광을 하던 때에,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당신의 손바닥을 보이십니다. 당신의 피흘리시는 머리를, 옆구리의 창자욱을 보이십니다.

발이 없는 사람을 보기 전에는 우리는 신발에 대한 불평을 끊이지 않았습니다. 손가락이 문드러진 한센씨 환우를 보기 전에는 우리는 짧은 손가락에 대한 불평을 끊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전에는 나의 아픔에 대한 분노와 연민을 그치지 않았었습니다.

예수님의 못박히신 손, 가시면류관 쓰셔서 피흘리신 머리를 볼 때에, 연민과 분노에 파도치는 내 마음에 비로소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마치 10억원을 탕감받은 주제에 500만원 갚지 않는다고 핏대를 올리는 종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임을 알았습니다.

그 때엔 자살하러 도망간 유다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창피하고 부끄러워 유다처럼 자살하러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예수님은 부르십니다. “베드로야!” 우리의 손을 붙드십니다. 그리고 가만히 끌어 안아 주십니다. 그 때에 비로소,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셔도 우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십자가의 흔적이 있듯이, 너도 고난, 아픔의 흔적이 있으니 이제는 나를 따라 오너라”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단순 명료한 초청에서 확립되어집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일요일마다 예배당에 모이는 이유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의 흔적을 지닌, 그리스도를 따르는 추종자 아닙니까?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처음부터 없었거나 놓치면, 에베소극장의 허다한 무리들처럼, 당신의 교회극장, 인생극장에서 당신도 어리석음의 고함만 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카멜레온인 양 온갖 색깔의 변화를 다 보여도, 십자가의 흔적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임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사막처럼 온갖 돌발상황이 부딪혀와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하십시오.

그 때에, 허무와 두려움, 모방과 답습의 숨막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창조적 생명, 인간다움의 삶의 환희를 경험합니다. 율법과 전통에 얽매인 꽉막힌 답답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이 함께하는 자유의 삶을 누려갑니다. 그것이 영생이고 그것이 구원입니다.

<기도>

좋으신 하나님,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써
저희를 예수님을 좇아 살도록 그리스도의 제자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어느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허무와 두려움으로 살며
스스로의 우울과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원망과 탓, 공격적 태도로 사는,
허망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었는데
성령님께서 저희를 찾아 내시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 심령을 치유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고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깨우쳐 주셔서
저희들에게 순간의 위로를 넘어서
이전에는 회개하면 죽는 줄로 느끼곤 하였었는데,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회개케 하시고
비로소 자유와 생명을, 치유하시는 은혜를 경험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의 감격을 심어 주시고
저희 인생의 고통스러운 때에
십자가의 사랑을 더욱 선명히 새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으신 하나님,
이전 날에 부초처럼 육체의 정욕에 따라, 세상의 풍속에 떠밀리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게 휘둘려 살던 삶이
몹시도 싫고 후회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삶에서도
개가 그 토하였던 것을 도로 먹는 것처럼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향수하듯이
저희 마음이 죄악의 유혹 앞에 허무하게 무너짐을,
그게 죄악인지도 모르고 즐기려하는 모습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들의 어리석고 오만한 실체를 발견할 때마다
가룟 유다처럼 도망가고 싶고, 아담과 하와처럼 숨고 싶은 게 저희들 모습이나
그러나 그런 저희들을 정죄치 아니하시고
붙들어주시고 품어주시는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하루만 지나도 금방 발에 먼지가 가득하듯이,
저희 마음도 하루만 지나도 쉬 연약해짐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하나님,
저희 삶에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은 것을 주님께서도 아십니다.
앞으로의 날들에 더 많은 일들, 더 다양한 경험들을 겪으리라는 것,
저희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희의 인생길에서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 만나고, 수많은 일들 겪겠지만,
바라옵기는,
사랑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정신과 사랑만큼은
늘 변색되지 않고 한결같으며
날마다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침마다, 바쁜 일과 중에 잠시 숨을 돌릴 때에도
예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되시며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임을
늘 확인하며 살 수 있는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그 은혜를 인하여
우리 평생에 한결같은 걸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저희 안에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이 식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삶의 환경이 몹시고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때일수록,
천박하게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정신을 강건케 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을 정금같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바라는 소망이 간절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배려임을 바라보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정신이 더욱 강건하고 사랑이 더욱 아름답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 믿음과 사랑이 우리의 변함없는 정체가 되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이덕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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