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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창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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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 창세기 13 : 1-13절 )

제가 새벽에 받는 은혜가 크다고 언젠가 말씀드렸더니 새벽을 깨우는 성도들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습니다.
참 반가운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지난 한 주간 저는 월요일 새벽에 묵상한 말씀을 죽- 묵상하면서 지냈습니다.

우리는 요즘 새벽 열왕기하를 묵상하고 있는데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일어났던 일들에 관한 말씀이 등장 합니다.
특히 아랍 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울 때마다 이스라엘왕은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사의 지시를 받아서
아랍군대가 공격할 곳을 미리 알고 그곳을방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아랍왕은
'우리가 은밀히 세운 작전을 이스라엘이 다 알고 있으니 분명 우리 중에 간첩이 있다, 그게 누군지 잡아내라"고 합니다.
이에 아랍왕의 신복중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 중에 간첩이 있을게 아니고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 엘리사가 있는데
그가 우리의 계획하는 바를 다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아랍왕은 엘리사를 제거대상으로 삶고 그가 머무는 도산 성으로 군사를 보내어 밤새 그성을 포위합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아침에 일어나 자기들이 지금 완전히 포위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도단 성을 에워싼 아랍군사와 말과 병거들이었습니다.
그가 주인 엘리사에게 가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합니다.
이때 엘리사가 뭐라고 대답을 하는가 하면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자가 저와 함께한 자 보다 많으니라(왕하)"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만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한사람은 눈이 열린 사람 한 사람은 아직 눈이 안 열린 사람 이였습니다.

눈이 열린 사람은 영적으로 봅니다.
더 넓게 보고 더 깊게 봅니다.
눈이 열지지 않은 사람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것을 믿습니다.
그것으로 낙심하고 교만하기도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눈을 열어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나 나타나게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두려움의 원인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는 불병거와 불만은 보이지 아니하고 열악한 현실만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열리면 하나님이 예비하고 계시는 열린 길이 보입니다.
눈이 열리지 아니하면 자기누에 보이는 것에만 의존하여 판단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내가 그때 무엇을 보고 결정하였느냐 하는가에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간혹 잘못된 결정에 후회막심인 사람의 입에서 우리 이런 말을 듣습니다.
"내가 미쳤지 내가 그때 눈에 뭐가 씌었나봐" 그렇습니다.
영적안목은 열리지 아니하고 육적안목만 가지고 선뜻 결정했다가 낭패를 당하는 일이 우리 속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눈을 믿지 말자 이 눈을 열어 보게 하시는 영적인 눈을 소유하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무작정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 것이 있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만 보고 순종합니다.
한편 아브라함에게 롯 이라고 하는 조카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삼촌인 아브라함만 바로 보았습니다.
삼촌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 갖습니다.
누군가 롯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아마도 그는 삼촌이 가는 곳으로 간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라는 곳으로 갔고 롯은 아브라함이 가는 곳을 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고보 따라간 게 아니라 삼촌하나 의지하고 따라 붙은 것입니다.
어찌했든 곳은 삼촌 따라 가다가 복도 받습니다.
삼촌 아브라함이 부자가 되니깐 롯도 덩달아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와서 삼촌과 조카는 부자가 되어 뜻밖의 고민을 하게 됩니다.
둘이 다 늘어난 가축과 재산 때문에 함께 거하기에 땅이 비좁게 된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분가 시키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왜 아브라함인지가 다시 등장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만 바라볼 줄 아는 순종의 사람임과 동시에 우선순위가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더 그는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고 산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삶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사십니까?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누가 뭐라든지 돈을 벌고 돈을 모아서 기어이 큰 부자가 됩니다.
헌데 부자 된 다음 중한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고생해서 번 돈을 이 땅에 두고 다 써보지도 못하고 가게 된 것을 생각하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내가 다는 못 가져가도 내 재산의 일부는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내 재산을 믿고 맡길 사람이 누가 있겠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다시금 생각했는데 한사람은 자기교회 목사님이고,
하나는 자기 진료한 의사선생님이고 하나는 자기 개인변호사 이었습니다.
그는 죽으면서 유언하길 "내가 죽으면 가가 10억원씩을 드릴 테니 장례치를 때 제 관속에 꼭 넣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고
세 사람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장례때 관속에 봉투를 하나씩 넣었습니다.

장례 마치고 오면서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데 먼저 목사님이 괴로운 심정으로
"사실 저는 거기서 십일조를 떼고 넣었거든요"라고 하자 이어서 의사선생님이
"사실 저는 거기서 우리 병원증축비용으로 절반을 떼었습니다.
죽으면서 좋은 일 좀하고 가라구요"라고 말하더니 변호사가 펄쩍 뛰면서
"이리 두 분은 어찌 죽은 사람의 유언을 듣고 한 약속을 지키질 않으셨습니까? 저는 제게 맡긴 돈 10억을 다 넣었습니다.
다만 현금을 제가 가지고 있고요 거기 제 이름으로 가계수표를 써서 넣었지만요"
사람이 돈을 위해 살고 명예권세, 쾌락을 위해 살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 줄 알지만
결국 아무것도 가지고 갈수 없는 것들이기에 거기 온 정성을 쏟고 삽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이 어떤 인생관을 갖고 살다다느냐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볼수 있습니다.
그는 화목을 가중 중요시 하였습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여러분께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하신 주님의 교훈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믿는 이들이 서로를 형제로 알고 하나 되어 주길 얼마나 바라고 계시는가를 말씀드리며
'소금으로 숨죽이는 야채'의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조카를 분가시키면서 가장 중시하는 바는 화목입니다.
"우리 다투지 말자, 너나 나나 네 목자나 내 목자나 우리가 거느리는 종들이라도 서로 다투게 말자"라고 합니다.
사실 조카와 분가를 생각하게 된 것도 두 사람의 목자들이 다투었지 때문이라고 본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화목함이 째어지길 진정 원치 않았습니다.
화평을 지키길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자기희생을 결심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윗사람이고 선택권이 있지만 과감히 자기 권리를 포기 합니다.

여러분 가정이든 교회든 국가든 화평을 유지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만 합니다.
큰 양보, 큰 희생이 있어야 유지되는 게 화평입니다.
내 계산과 잇속은 다 챙기겠다고 하면서 '싸우지는 말자'하는 예기는 공허한 소리일 뿐입니다.
"하나 되자"하면서 그것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손해 볼 생각들이 없이 상대방의 큰 의생, 큰 양보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큰 양보입니다.
말을 이렇게 하면서도 은근히 좌든지 우든지 욕심이 생겨서
조카 녀석이 우했으면 좋겠다거나 좌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을게 아닙니다.
정말 아무 욕심 없이 모든 권리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난 아무래도 괜찮다'고 하는 것 입니다. '너 가지고 남는 것 내가 가지마.'하는 것입니다.

서울에도 아이 11명 낳아 키우는 40살 동갑부부가 있다고 합니다.
식당꾸려가며 근근이 살아가지만 아이들을 예쁘게 잘 키웠습니다.
옛날 산아제한 시절에는 역적노릇이지만 지금 출산율이 너무 떨어져 아이를 하나 낳던가 아예 낳지 않겠다는 세상이 되니
그 부부가 서울시로부터 무슨 모범상을 받았고, 임대주택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이 가족들이 가족사진 촬영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사진관이 북새통이 되고
어린아이들이 서로 자기가 더 좋은 장난감을 들고 사진 찍겠다고
두세 명이 장난감 하나 붙들고 울고불고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서로 갖겠다'고 매달리면 부모도 못 말리고, 사진사도 못 말리고 모두 다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이 셋인데도 수준이 비슷하다 보니 간혹 '서로 자기가 찜했으니', '이번엔 내가 먼저라느니'하고 다투는 일이 있습니다.
"양보해라 나중에 더 좋은거 줄께, 양보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해도 아이들은 물러서질 않습니다.
먹을 것을 두고도 입에 물고 양손에 들고 그리고도 접시에 있는 것 누가 손댈까봐 눈에서 불이 납니다.
그 아이들 욕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 아빠도 그렇게 컸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때 큰 아이가 '아우들아 너희들이 먼저 먹고 남으면 내가 먹을 게'라고 하거나
'아이들아 세개중 너희가 먼저 두개 골라 난 남은 것이면 무엇이든 괜찮아'하면 얼마나 예쁘겠습니까.

아마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고 싶은 모습이 좀 더 너그럽게
'그렇게 싸우지 말고(투쟁적으로 살지 말고) 네가 먼저 양보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복 받은 마음이 화목을 중시하는 마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럴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부자 되는데 있지 않고 어디서나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고 다투지 않고 화목하게 하시는데 있었습니다.
그는 양을 잘 키울 수 있는 목초지(조건이 더 나은 곳)보다는 어디서든지(그곳이 산지든, 벌판이든)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자기경건 잘 지킬 수만 있으면 더 이상 아무욕심도 없었습니다.

조카와 달리 그는 현재보다는 미래, 생활보다는 신앙을 더 중요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조카 롯은 삼촌의 양보를 받고 '그러면 난 어느 땅을 택하지?'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눈에 보이기에 물이 많고 비옥하여 에덴동산 같고 먹을 것 많았던 애굽땅이 연상되는 쪽을 덥석 선택합니다.
이 선택기준이 다분히 자기안목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본문 10절에 "이에 롯을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로 본즉"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앞에서 엘리사가 보는 것과 사환 게하시가 보는 것이 판이하게 달랐다는 사실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저의 눈을 열어 주소서 그래서 보게 하소서'라고 하였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사람이 '무얼 바라보고 살아가느냐'의 문제는 얼마나 이 세상을 제대로 잘 살다가 가느냐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시길 바라고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는지'를 다시 점검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바라본 것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며 갈다 가는 것 이였습니다.

내가 어디 살든 무얼 하든 어떤 수준의 생활을 하든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화목을 이루며 살다가는 것 보다 중요할 수가 없다는 것 입니다.
하 지만 롯이 바라본 것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부자 되는 것', '남들에게 보란 듯이 성공하는 것', '내가 보고 판단하기에 풍요롭고 그럴 듯 한것'이 전부였습니다.
본문말씀 11절, 12절을 보면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고
이어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는데 롯은 그 장막을 옮겨 소돌 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가 본 것이 물질적인 것 이었고 영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그가 점점 다가간 곳이 '불행한 곳',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였습니다.
자기가 다가서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었건만 롯은 계속 그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롯은 그저 멀리서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쪽은 들여다 볼수가 그 죄악도 볼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가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는 돌이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얼 바라보고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 청주여자교도소에 가서 그곳 재소자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왔습니다.
사람이 다 똑같이 살다가 가는것 같으나 무엇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지
나는 무얼 바라보고 살고 있는 사람인지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결국 '돈'에 노예가 되고 '돈'에 눈이 멀고 쾌락에 감정(순간적인)에 끌려가면서 자기가 지금 어디로 가까이 가고 있는지
분별을 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환경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을 행복으로 알았던 아브라함의 선택을 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엘리사의 기도한 "내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하고 영적안목이 열려지게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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