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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날 앞에서 (암 5: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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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채나라로 가다가 양식이 떨어져 채소만 먹으며 일주일을 걸었기 때문에 어느 마을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공자가 깜박 잠이 든 사이에, 공자의 총애를 받는 제자 <안회>는 마을에 나가 쌀을 구해서 밥을 짓고 있었다. 마침 공자가 잠에서 깨어 밖을 내다보는데, 안회가 밥솥의 뚜껑을 열고 밥을 한 움큼 집어먹고 있었다.

평소에 공자가 먼저 먹지 않은 음식에는 수저도 대지 않던 안회가 몰래 밥을 먹는 것을 보고 공자는 깜짝 놀랐다.

공자는 안회를 불렀다. "안회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 지내라고 하더구나." 라고 말했다. 먼저 밥을 몰래 먹은 안회를 뉘우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자 안회는 "스승님, 이 밥으로 제사를 지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뚜껑을 연 순간 천장에서 흙덩이가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더럽고, 버리자니 아까워 제가 그 부분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는 잠시 안회를 의심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구나. 예전에 나는 나의 머리를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구나. 너희들은 알아두거라.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남을 판단하고, 신앙생활을 하기도 한다. 내가 본 것은 확실하고, 내가 말하는 것은 거짓이 없고, 내가 행하는 것은 정의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나의 정당성은 큰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님 판단의 기준은, 내 생각과 내 말과 내 판단과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모스는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지 결단하게 한다.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여로보암 2세 때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 같이 안정과 번영이 극에 달한 제2의 번영시대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여호와의 날도 복된 날이요, 승리와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모스 선지자는 그 날이 멸망의 날이라고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선포한다.

5: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화 있을진저”라고 경고하는 그 대상은 누구인가? 바로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이다.

여호와의 날이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들 사이에서 지나가시는 날이다. 이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빛의 날, 곧 구원과 승리의 날이라고 생각하게 했던 날이다.
그러나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정 반대였다.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의 날, 어둠의 날, 흉한 날이라고 외쳤다.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와 구원>의 날로 생각한 반면에, 아모스 선지자는 <심판과 멸망>의 날이라는 것이다.

19절에서는 이를 더욱 선명하게 예를 들었다.
“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그 상황을 연상해 보면 알 수 있다. 사자를 만나 죽을 힘을 다하여 피하였지만, 곧 더 힘센 곰이 나타고, 곰을 피하여 집에 돌아와 이제 살았다 안심하며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벽을 의지하려고 손을 대자 죽음의 독을 품은 뱀에게 물린 것 같이 <여호와의 날>이 이를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과 같다”고 한다. 즉 여호와의 날은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고 곰을 피하지만 뱀을 만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즉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여호와의 날에 우리가 당할 것을 암시해 주시며 지금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결단하게 하시는 말씀이다.

20절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여호와의 날은 캄캄한 날이라고 했다. 여기서 빛이란 발광체를 말한다면 빛남은 반사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빛 되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니까, 그 빛을 반사할 수 없어 아주 캄캄한 상태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믿음을 지킨다고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우리의 믿음 생활은 이와 같다는 것을 교훈해 주신다.

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그 이유가 있다.

21절 이하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인간이 착각하고 있다. 절기도 성회도 찬양도 드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흠향하지 않으셨고, 보지 않으셨고, 듣지 않으셨다고 한다.

<너희 절기>와 <너희 성회>라고 했다. 이는 인간이 나름대로 하나님을 찾아 절기와 성회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미워하였고, 멸시하였고,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다르냐 하는 것이다.

21절에서는 흠향하지 않으셨고, 22절에서는 <돌아보지>않으셨고, 23절에서는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인간은 제물을 태워 향기로운 냄새를 드렸으나 하나님께서 코 막으셨고, 눈을 감으셨고, 찬양을 드려도 귀를 막으셨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절기와 성회에 찾았고, 제물을 들였고, 노래를 드렸으나, 하나님은 코를 막으시고, 눈을 감으시고, 귀를 막으시므로 인간의 모든 행위는 헛수고한 것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에 구원과 승리를 얻을 것을 기대하고 그 날을 소망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얼마나 우수운 모습이냐? 하는 것이다.

이런 착각 속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5:2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번제, 소제, 화목제에 대해서 언급했다.
여기서 번제는 일부가 아닌 전부를 태워서 드리는 것이며, 완전한 헌신을 의미 한다.

그리고 소제는 곡식을 빻아 흰 가루로 만들어 드리는 피 없는 제사이다. 전부를 태워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위해서 드리는 제사로서, 특별한 것은 제물을 바친 자가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22절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5: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 전부를 드리는 번제나 소제에 없는 <살진>이라는 표현이 <화목제>에만 붙어 있다.

자기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살지고 좋은 것으로 잡고, 하나님께 전부 드리는 것은 대충 드렸다는 것이 나닐까? 형식적으로 드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와 성회로 모였다. 그리고 각종 제물을 드렸다. 그리고 23절에 보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 노래도 듣지 않으셨다.

오늘날 교회의 모임이 얼마나 많은가? 빈손이 아닌 몸과 물질을 드린다. 그러나 형식적이고 남들이 하니까 하는 식으로 신앙과 믿음생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님 재림하시는 여호와의 날 우리가 기대하는 빛된 모습이 아니라 어둡고 캄캄한 형벌의 날이 되지 않겠는가? 왜? 우리가 형식적으로 흉내만 내었던 신앙적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은 코를 막으시고, 눈을 감으로시,귀를 막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여호와의 날 앞에서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24절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5:24.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오직 공법과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참된 예배는 예배자의 마음속에 공법과 정의가 자리 잡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여기서 하수라고 하는 것은 1년 사시사철 메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가는 강을 말한다.

그러나 우기에 비가 오면 물이 흘러내리다가 비가 그치면 곧 말라버리는 강을 와디 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공법과 정의가 하수 같이 라는 말은 1년 내내 끝임 없이 물이 계속해서 흘러넘침 같이 한 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살아야 한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법과 정의는 한두 번 실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일년 내내 마르지 않도록 계속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르게 사는 삶이 바탕이 된 사람들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절기 때 한두 번 형식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자체가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산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 때 여호와의 날은 생명과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날마다 순간 마다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산다는 신앙고백을 가지고 몸으로 산제사 드리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즉 거짓 없는 최고의 가치를 돌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을 바르게 준비하며 사는 모습이다.

우리는 항상 <여호와의 날을 앞에 놓고> 여호와의 면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거짓이 없는 모습, 공법과 정의가 하수 같이 항상 흘러가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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