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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혼을 소생시키는 은혜의 샘 (마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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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에게 “당신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특별히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어보면 놀랍게도 많은 분들이 기도가 어렵다고 대답을 합니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 위급할 때 하나님을 찾는다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막상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하면 생각보다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면에는 솔직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영의 눈은 어둡고 오감을 가진 육체를 입고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보아야 알 수 있고, 들어야 깨닫고, 손으로 만져야 느낍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손을 휘둘러 봐도 잡히는 것도 없고, 들리는 음성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기도가 이렇게 어렵기 때문에 우리들도 잘못된 기도를 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나라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잘못하고 있는 기도를 지적하시고, 무엇이 참된 기도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1)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 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여러분, 한번 이렇게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예루살렘 거리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이어오는 정해진 기도 시간이 있습니다.
9시 12시 3시가 기도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때 일반으로 사람들은 한 1-2분, 그저 규격화된 기도문을 외우고 눈을 뜨고, 또 평상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경건하다고 소문이 나있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일부러 손을 높이 들고 계속 같은 기도를 반복하면서 오래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저 사람은 정말 기도 많이 하시는구나. 참 경건하신 분이다. 참 존경이 간다”하는 소리로 수근거립니다.
그러자 어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일부러 기도시간이 가까워 오면 더욱 많은 칭찬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 바닥이나 회당거리, 아니면 큰 도시 모퉁이에 서서 기다리다가 기도시간이 되면 손을 들고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5절 끝에 그들을 향하여 “저희는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디 남의 이야기입니까?
문제는 우리들도 그렇게 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의식하여 경건하게 보이거나, 기도를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이런 것은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2)중언부언하는 기도였습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또 기도 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느니라”
여러분, 중언부언이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바톨로 게오”라는 말인데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는 것” 혹은 “의미가 있는 말이라도 생각을 담지 않고 계속 지껄이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반복하는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 앞에 힘을 다하여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반복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기도를 반복하실 때마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피가 섞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기의 전인격, 모든 힘을 전부 다 그 말 한마디에 담아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드린 기도는 아무리 반복해도 중언부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가만히 보면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너무 많습니다.
무슨 말이든지 끝없이 이어가야 기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그래야 들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러므로 한마디를 해도 왜 내가 이 말을 하는가를 알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해놓고는 사람을 의식하며 기도하고, 인격자 되신 하나님 앞에 중언부언하며 기도하는 잘못을 범했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셨습니까?

1)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만나시기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에서 말씀하는 골방이라는 것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이나, 작은 밀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든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내가 그분과 상대할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골방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요란한 곳을 피하여 산이나 들판에 가셔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산이 골방이었고, 들판이 골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우리를 골방에서 기다리시고 계실까요?
여기에 기도의 심오한 차원이 담겨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루 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자주 만나는 그 사람들 가운데 “나하고 아무도 없는 조용한데 가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하면서 끌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아무나 붙들고 “나하고 조용한데 가서 단 둘이 이야기 좀 합시다”라고 말하면 “이 친구가 안 좋은 생각하고 있나?”하고 의심을 받을 확률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방에서 만나자는 것은 아무에게나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골방이 가장 자연스러운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입니다.
그 연인들은 일부러 사람이 없는 데만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단둘이 앉아서 아무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과 마음을 열고, 사랑을 주고받기 원하는 이것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방해받지 아니하는 곳에서,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곳에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골방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도 골방이라야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영이신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고, 주님은 우리가 온전히 마음을 바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기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하고 부르면 벌써 하나님은 우리 앞에 계시고,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래서 스바냐 선지자는 3:17절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자시라. 그 하나님이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면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며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골방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기도입니다.

여러분, 자기에게 골방이 있고 그 골방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을 가만히 주목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여유가 있고, 평안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가 골방을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 잠잠히 바라보시며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서 사랑을 받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웃지 못하는 환경에도 그 사람은 평안하고 기뻐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바울처럼 확신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낙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문제는 산더미처럼 높아 보이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오면 문제도 작아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골방에 들어갈 땐 마귀 얼굴을 하고 들어가던 사람이 나올 땐 천사의 얼굴을 하고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골방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그 이유를 오늘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시작하면서 부른 찬송이 있습니다.
그 찬송작가는 맹인이었던 월 포드 목사님입니다.
그 사람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지만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정말 지겹다”라고 말하지 않고 가장 즐겁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찬송하기를 “이 세상 근심 걱정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 내 진정 소원 주 앞에 낱낱이 바로 아뢰어 큰 불행 당해 슬플 때 나 위로 받게 하시니 기도하는 그 시간이 정말 즐겁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통해서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는 사람은 이 말이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람만 보고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하나님은 다 아시면서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리고 시139:4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 혀에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전지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모르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내가 알게 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무슨 슬픔이 있는지 아십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있는 상처가 무엇인지도 아십니다.
내가 그에게 지금 말하고 싶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분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무엇입니까?
“내가 말을 많이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면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 안에 기도의 중요한 본질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골방을 자주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골방기도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골방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은혜의 샘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골방기도는 우리의 공허함을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우고,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대신하며,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공급받는 축복의 채널이 된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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