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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 (마 1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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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열심히 잘 보던 텔레비전 프로그램 하나가 있었습니다. 'Rescue 911'이라고 하는 외국 방송 프로그램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911 긴급구조대’와 같은 이름으로 방영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긴급구조대가 119이지만 미국이나 캐나다와 같은 곳에서는 긴급구조대가 911인데 그 긴급구조대의 실제 상황을 다큐멘터리처럼 만들어 방송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방송을 보면서 사람이 언제 가장 행복한지 그리고 언제 가장 아름다워지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도 훌륭하고 아름답지만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정말 성스러우리만큼 훌륭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살려낸 생명 때문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하며 펄쩍 펄쩍 뛰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것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하나님께 그 방송을 보면서 나도 한번이라도 그렇게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도 했었습니다.

그와 같은 기도를 한 후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 즉 오병이어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말씀을 읽은 후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오천 명분을 혼자 먹는 사람’ 또 다른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조건 오천 명분을 벌어들이는 능력 있는 사람을 잘 산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능력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을 잘 산다하지 않으시고 그 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쓸 줄 아는 사람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천 명분을 혼자 먹는 사람이 아닌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을 잘 산다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 중에 하나였습니다.

사업을 하시는 집사님 한분이 제 방에 들어와 힘들다는 듯 털썩 소파에 앉으셨습니다.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더니 ‘이번 달에 헛장사 했어요’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세금내고 직원들 월급 주고 났더니 한 푼도 안 남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푸념하듯 하시는 그 집사님에게 ‘헛장사 아니네?’라며 말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집사님 재산 다 팔아서 은행에 집어넣으면 이자만 받아도 평생 골프치고 살 수 있지요?’ 당시는 은행 이자가 높은 때 이어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집사님에게 누가 왜 사업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한번 대답해 보라고 말을 했습니다. ‘ 이 힘든 사업 걷어치우고 은행에 집어넣으면 평생 골프 치며 편하게 살 수 있어. 그런데 이 힘든 사업 왜 하는지 아냐? 돈 벌어서 나라 세금 내려고 그런다. 그리고 돈 벌어서 직원들 월급 주려고 그런다.’ 돈 벌어서 나라 세금 내려고 그런다는 말과 직원들 월급 주려고 사업한다는 평범한 말에 집사님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일이 없었는데 듣고 보니 그럴 듯 했던 모양입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양극화로 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국정의 제일가는 목표로 삼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대통령께서 매우 정확하게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나라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로 본 것에 대하여 동의합니다.

노 대통령께서는 그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증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정치적으로는 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고 옳은 이야기라고 하여도 그 말이 그리고 ‘그와 같은 정책을 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그리고 그와 같은 반응이 어떤 결과를 도출해 낼 것이냐?’까지 생각하고 말을 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면에서 양극화의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여 증세라는 방편으로만 풀어나가는 것에는 실제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면이 고려되지 않은 이상주의적인 정책이 도리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더 복잡하게 하는 면이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우리나라의 문제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좀 다른 면에서 세금 내는 문제를 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물론 아니지만 사람들은 ‘세금 제대로 내면 바보’라는 생각을 대체로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세금을 제대로 낼 수밖에 없는 직장인들은 자기들만 바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그것에 대하여 억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기들 보다 수입이 많은 자영업자들이 수입을 속이고 신고하는 것에 대하여 속상해 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 나름대로 세금 내는 것에 대하여 억울해 하고 힘들어하는 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월급쟁이든 자영업자이든 상관없이 할 수만 있다면 세금을 덜 내고 싶고, 숨기고 싶다는 것이 우리의 본능인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본능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들이 본능대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말씀대로 생각한다고 한다면 세금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여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세금을 정직하게 제대로 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라 세금 떼어 먹으면 안 된다는 설교를 삼일절에 ‘신앙과 애국’이라는 제목으로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설교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느 장로님 댁엘 심방 가게 되었습니다. 장로님 댁에 가보니 세무서장으로부터 받은 상패 하나가 있었습니다. 제가 유심히 그 상패를 보고 있으니 장로님께서 ‘목사님 말씀대로 했더니 하나 줍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친구들이 자꾸 놀린다는 것입니다. ‘야 임마. 세상에 받을 패가 없어서 세무서장패를 받아 오냐?’ 저는 세상 친구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아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집에 세무서장패 하나 정도씩은 있어야 우리나라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아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아직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세금을 매기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합법적으로 면세특권자(?)입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목사도 세금을 내야 한다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진해서 세금을 내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영락교회 부목사 시무를 할 때부터 세금을 내게 되었습니다. 영락교회를 사임하고 동안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계속해서 세금을 내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모든 교직원들이 다 세금을 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을 청량리 세무서에 신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청량리 세무서에서 동안교회에 사업자 등록증을 떼어 주었습니다. 그 등록증에는 제가 동안교회의 사장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모든 교직원들은 다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내야만 하는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내지 않아도 되는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월급 명세서에 찍혀 나오는 갑근세 액을 보면서 가끔씩은 아깝다는 생각을 아직도 합니다. 돈이 좀 쪼들릴 때는 그와 같은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래도 저는 목회자도 세금을 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제가 경제적으로 넉넉하기 때문에 하는 배부른 소리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회자 중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세금은 본시 낼만한 사람들에게만 징수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요즘 목회자들 중에는 세금 내고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월급을 받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노대통령께서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자원을 증세를 통하여 마련하려고 하시는 모양인데, 그러기 위하여 세수 자원을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보이는데 아마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갑근세를 내게 한다면 적지 않은 세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바램은 국가가 법으로 그것을 결정하기 이전에 우리 목회자들이 자진해서 갑근세 납부를 결정한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금 정직하게 납부하기 운동이라도 전개해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켜 금 모으기 운동도 하였는데 요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라를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오직 자기 교회 하나 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소심하고 이기적인 교회가 된 것이 아닌가를 스스로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큰 아이가 고3때 성적이 좀 떨어지는 것 같아 공부를 좀 열심히 하여야 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이에게 해 준 이야기가 ‘공부해서 남 주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아이에게 해 준 이야기가 오천 명분을 혼자 먹는 사람이 아닌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기 위하여서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 능력을 얻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이 책상 바람벽에 다음과 같이 써져 있었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자!’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자!’ 그날부터 아마 저희 큰 아이는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길을 열어 주셔야 하겠지만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아마 그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한 것 같습니다.

저는 지지난 주일 기독교와 사회주의에 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사회주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아는 한 기독교는 전혀 사회주의와 비슷하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공동경작에 공동분배라는 개념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스스로 내어 주는 일은 종종 있었으나 그와 같은 일을 공동경작과 공동분배라는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는 언제나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몫과 기회에 대하여 끊임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일조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구제였으며, 성경은 십일조 외에도 밭의 네 귀퉁이를 남기는 것과 떨어진 나락과 볏단을 줍지 말고 버려두어 가난한 사람들이 주워 가게 하는 것 등을 말씀함으로 구체적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에 대한 배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지난 주 설교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게 대한 최고와 최대의 배려는 희년의 법이었습니다. 50년 마다 한 번 씩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한 법 말 입니다.

기독교는 개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보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철저히 개인의 인격을 존중합니다. 인간을 ‘공동’이나 ‘단체’의 개념으로 묶지 않습니다. 철저히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합니다.

개인의 승리와 개인의 성공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기서 끝을 내지 않습니다. 정당한 승리와 성공을 인정하면서도 이유는 어쨌든 그와 같은 승리와 성공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한 교만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들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깔보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승리와 성공의 목적을 누림에 둔다면, 하나님은 정당한 누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시지만 그것을 승리와 성공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가르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정당한 승리와 성공의 궁극적인 목적을 섬김에 둡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누림과 섬김의 균형에 대하여 민감합니다. 무조건 개인적인 누림을 죄악시하고 부정시하는 극단적인 청빈론자들과 영지주의자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써서 청부론과 청빈론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한 사람이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것을 누리며 사는 일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보는 것은 건강한 사회를 위하여 좋지 않은 생각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청빈론자들에게 비판을 받을만한 삶의 여유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누림이 너무 지나칠까봐 조심합니다. 그 누림에 빠져 살게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누림 자체를 무조건 죄악시 하거나 부정하지 않지만 누림에 너무 빠지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룰을 세워 놓고 노력합니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가난한 자를 위한 몫을 계산해 보곤 합니다. 밭의 네 귀퉁이를 가난한 자를 위하여 남겨 두라는 말씀을 초등학교에서 배운 산수 실력으로 계산해 보았습니다. 21.5%였습니다.

가로와 세로가 10인 밭의 면적은 100이 됩니다. 그 밭의 네 귀퉁이를 계산하려면 그 밭에 내접한 원의 면적을 계산하면 됩니다. 밭의 내접한 원의 면적을 제하면 네 귀퉁이 몫이 나오게 됩니다. 가로와 세로가 10인 밭에 내접한 원의 면적은 5 제곱 파이입니다. 그것을 계산하면 78.5가 됩니다. 결국 가난한 자를 위하여 남겨야 하는 네 귀퉁이는 소득의 21.5%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 밭이 있어서 어느 정도 소출을 걷어 들이는 소위 부자라면 그 정도는 떼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십니다. 저는 그 정도 부자는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소득의 21.5%는 가난한 자를 위하여 떼어 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보다는 조금 높은 퍼센테이지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십일조와 교회에 하는 헌금까지 합하면 제가 절반을 쓰고 절반을 하나님과 어려운 이웃들의 몫으로 쓰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밭의 네 귀퉁이가 기준이 되지 않고 삼년 마다 한 번 씩 더 했던 십일조가 기준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니 삼년 마다 십일조를 더 내어서 특별히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도왔습니다. 삼년에 한 번 더 하는 십일조를 매달의 몫으로 계산해 보니 한 달 수입의 하루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떼는 몫의 기준을 한 달 수입의 하루 몫으로 생각하고 실천했습니다.

그것도 사실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익숙해지기 시작하였고 더 놀라운 일은 점점 힘이 더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힘은 마음의 힘과 물질의 힘을 다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네 귀퉁이를 떼는데 도전하게 되었고 지금은 네 귀퉁이 보다는 조금 더 뗄 수 있는데 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아이들이 공부 중에 있습니다. 유학을 준비하는 아이도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아마 지금처럼 몫을 떼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여 십일조와 헌금 그리고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네 귀퉁이를 떼는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지난 주 희년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최소한 재산의 1/3은 희년 정신을 실천하는 마음으로 사회에 환원하고 싶습니다. 자꾸 제가 이와 같은 말씀을 설교 중에 하는 까닭은 첫째, 바보 같은 자랑(?)을 통하여 스스로를 묶기 위함입니다. 둘째, 여러분들과 함께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많은 구제 헌금이 있습니다. 밑천 나눔 헌금, 이삭줍기 헌금, 쪽방 헌금등등. 그것을 희년 헌금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지지난 주 설교 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희년 헌금을 모으고 그것을 사용하는 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희년의 정신을 실천해 나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하되 누구나 다 자기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작은 몫이라도 약속하고 떼는 것을 생활화하고, 세상을 떠날 때 작은 재산이라도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분배할 때 그 몫의 한 부분을 희년의 몫으로 떼고 죽는 것을 실천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교회가 정말 잘 활용하여 운영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살리는 일에 사용한다면, 그리고 이와 같은 정신과 운동이 우리 한국 교회 전체에 퍼져 나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와 같은 우리의 작은 마음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처럼 예수님께서 받아 주시고 축사해 주신다면 굶주린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오늘날에도 재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양극화의 문제는 우리 한국의 문제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입니다. 많은 정치가들과 경제인들과 NGO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만 아직까지 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틀림없이 앞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정치가나 경제인 그리고 NGO들이 아닌 우리 크리스천들이 믿음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이가 아이와 여자를 뺀 오천 명이 굶주린 상황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힘도 되지 않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다 드린 그 마음과 그 아름다운 마음에 대한 예수님의 축사로 말미암아 굶주린 군중 다시 말해서 백성을 먹인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 때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오병이어 기적을 다시 일으키는 일에 기폭제가 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는 우리들이지만 굶주린 오천 명에 대한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점심을 기꺼이 하나님께 내어 놓을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축복과 축사로 말미암아 결국 오천 명을 먹인 사람이 된 오늘 본문의 아이 같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도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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