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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어 있는 삶 (막 13:2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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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14-23절의 말씀을 성전파괴에 이르는 전조로 국한시키는 입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본문에 관해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신앙생활에 덕이 될 수 있으므로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의 백성들이 더욱 성숙해져서 가능하면 통일된 해석에 도달했으면 합니다만, 다양한 해석을 허락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저는 성전파괴를 대비하는 전조를 살피는 삶을 가르치는 24-32절에 관해서는 제가 이해하는 데로 간단하게 그 맥락만 짚어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깨어 있는 삶을 강조하는 33-37절을 보다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깨어 있는 삶을 살고자하는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전조를 살피는 삶(24-31)

예수님은 성전파괴 전에 있을 환난에 대하여 묘사한 다음 '그 환난이 지난 뒤에'라고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다음에 묘사되는 상황은(24-27) 성전파괴와 그 이후부터 일어날 일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그럼에도 24-27절의 말씀을 예수님 재림직전의 우주적 변화와 우주여행을 통해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이유는, 현대인들에겐 구약으로부터 이어지는 성경적 언어가 익숙하지 때문입니다.

24-27절을 구약배경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면 성전파괴와 그 직후에 있게 될 역사를 묘사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인 이사야 13:10과 34:4를 보면 각각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무너지는 바빌론과 모든 민족의 모습을 마치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이 그 빛을 잃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런 상징적 언어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하나님 백성의 멸망을 묘사하는데 매우 적절하다 할 것입니다.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는 것도 단 7:13-14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인자가 우주여행을 통해 땅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가서 영광과 권세와 나라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성전파괴를 통해 예수님의 영광과 권위가 회복될 것을 내다보신 것입니다. 또한 그와 함께 예수님께선 천사, 즉 예수님의 사자들 혹은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적 존재들을 보내어 온 세상에서 선택된 사람들을 모으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밖인 이방세계에서의 교회의 성장을 예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예를 들어 성전파괴의 전조를 잘 분별하여 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28-29). 그런데 '인자가 문 앞에 가까이 온 줄로 알아라'(29)고 되어 있어서 마치 예수님의 재림을 대비하라는 말씀처럼 들려 혼란스러운데 논쟁의 여지가 있는 번역입니다. 원어를 보면 주어가 없이 단순히 estin으로 되어 있는 데 이는 eimi(be 동사)의 3인칭 단수 현재형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문 앞에 가까이 온 줄로 알아라'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해석해야 문맥상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29절의 '이런 일들' 30절의 '이 모든 일'이란 표현은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전파괴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이런 일'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날 일과 연관시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도 이를 뒷받침 해줍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날 것이다(31)'. 만일 이런 일이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한다면 본문해석에 있어서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잘못 예언했든지 아니면 통상적인 이해와는 달리 '세대'라는 단어를 억지스럽게 '유대 자손' 혹은 '안 믿는 유대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전자를 택하면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과 바로 충돌해 예수님은 참 실없으신 분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후자를 택한다면 문법적 억지를 부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24-31절은 곧 있게 될 성전파괴의 전조를 잘 분별해서 미리 대비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세대의 제자들에겐 전조를 잘 살피는 삶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제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2. 깨어 있는 삶(32-37)

32절의 첫 단어인 '그러나'는 매우 중요합니다. 앞의 문장과의 대조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성전파괴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자신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날과 그 때'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특히 '그 날'이란 표현은 여호와께서 나타나시는 날을 선포하는 구약의 예언적 말씀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서 여기엔 분명히 종말론적 울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다시 오심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전파괴에는 전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신을 가다듬고 준비할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재림은 다릅니다. 전조를 미리 살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32-37절이 강조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을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깨어 있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깨어 있어라'는 말씀을 원어는 다릅니다만 직접 세 번, 비유에서 한 번 해서 도합 네 번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전조가 있고 그 전조를 우리가 알아 볼 수 있다면 항상 깨어있을 필요는 없지요. 좀 여유도 부리고 막말로 해서 농땡이도 좀 피다가 전조가 보이기 시작하면 그 때 정신을 차려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런 전조가 없기 때문에 항상 깨어서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 재림 전 아무런 전조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다시 오실 '그 날과 그 때'를 아무도 모른다는 점을 정말 강조하십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른다고 한 것까지는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들도 모른다고 못을 박습니다. 오직 아버지만 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말씀이지요. 지금까지 예수님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시해 오셨습니다. 이제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심으로써 그 동안의 주장에 질문을 던지게 할 수 있는 선언을 하신 셈입니다. 물론 이 고백을 잘 이해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 되심, 예수님의 신성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구속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데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역할이 일정 정도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선언엔 제자들에게 혼돈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모험까지 감행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절대로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추측하고 싶어하는 함정에 빠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재림시기에 대하여 질문조차 하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차단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교회는 종종 오류를 범해왔습니다. 한국교회의 경우에도 예수님의 재림시기를 예언하는 이들과 이들의 열정적인 추종자들이 종종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바른 자세는 재림시기에 대한 모든 궁금증과 호기심을 완전히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알 수 있는 길이 근원적으로 차단되어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깁시다. 그럼에도 그 날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멀리해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언제 오신다고 해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도록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벌써 거의 2000년을 기다렸는데도 예수님이 안 오셨습니다. 그래도 내일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갖고 살라는 겁니다. 솔직히 좀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듭니까? 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더라도 주님이 곧 오실 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산 날이 몇 일이나 될까 생각할 때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느슨해진 우리의 삶을 다시 추수를 수 있는 좋은 길이 주님의 시간 계산법을 익혀나가는 데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하루를 천년처럼 길게 사용하시는가 하면 천년을 하루처럼 짧게 넘기기도 하십니다(벧후 3:8).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시길 2000여 년이나 기다리다 지쳐 버렸습니다. 기대가 가물가물해지려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틀밖엔 안 기다린 셈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길 기다리는 사랑 때문입니다. 약속시간이 훨씬 지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을 안다면 주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겠죠. 주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시간계산법을 우리의 것으로 삼읍시다. 매순간 지나가고 있는 시간에 대하여는 천년을 하루 같이 짧게 생각하고, 매순간 다가오는 시간에 대하여는 하루를 천년처럼 소중히 여깁시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오래 기다리면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고 깨어 있는 살 수 있을 겁니다.

만일 예수님이 언제 올 것을 미리 안다면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갖기 어려운 것은 불 본 듯 뻔한 일입니다. 그 시간에 맞춰 우리 삶을 계획하게 될 것이고 그 시간이 가깝게 다가올 때 까진 자연히 나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 다시 오실 날과 때를 안 가르쳐 주신 것은 지적호기심 측면에선 답답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의 실천적 삶을 위해선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면 깨어 있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34-36절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집주인과 종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그는 집을 비우면서 종들을 불러 관리권한을 주고 각 사람에게 임무를 맡겼습니다. 권한과 책임을 적절히 배정한 것입니다. 특히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며 여행길을 떠납니다. 그러므로 문지기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종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돌아올 시간이 저녁 녘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무렵일지, 이른 아침녘일지, 그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인이 갑자기 나타나 종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 주인에겐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이며 종에겐 얼마나 당혹스러운 상황이 되겠습니까?

깨어 있는 삶이란 주인이 돌아 올 때까지 주인이 맡긴 권한을 잘 활용하여 주어진 임무를 열심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언뜻 읽으면 잠도 자지 말고 일만 하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로마의 시간표기법에 근거한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밤 12시를 말하는 한 밤중부터 닭이 우는 새벽 시간 까진 잠을 자도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꼭 잠을 대략 5시간 이상 자면 안된다는 뜻은 아니겠죠. 그 만큼 성실하게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라는 뜻일 겁니다.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을 보면 그 뜻을 좀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마 24: 45-51). 종의 임무는 동료인 집 하인들을 맡아 그들에게 제 때에 양식을 내주는 일입니다. 주인이 돌아와 그가 그 일을 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 기뻐 자신의 모든 재산을 맡길 것입니다. 그런데 종이 나쁘면 생각을 달리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동료들을 때립니다. 술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십니다. 그런데 그만 생각지도 않던 날에 그것도 뜻밖의 시각에 주인이 돌아 왔습니다. 방자한 종의 모습을 보고 분노한 주인은 종을 몹시 때리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입니다. 능히 있을 법한 이야기죠.

재림을 열망하는 사람 중엔 이 땅에서의 삶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종종 있습니다. 어차피 무너져 버릴 세상인데 세상일을 잘 돌볼 이유가 뭐 있겠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의 영적인 일, 즉 주님과의 신비로운 수직적 관계 혹은 교회와 직결된 종교활동에만 몰두하려고 합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관념입니다. 예수님은 주인과 종의 비유를 통해서 동료들에게 양식을 때를 잘 맞춰 공급해주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넌지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는 일처럼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 없습니다.

물론 깨어 있어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죠.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것에 집착해야 합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어려운 것을 극복해야 자신의 고유함을 지닐 수 있습니다. 고독한 것은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알기에 그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고 다른 모든 행위는 그 준비과정에 불과합니다... 사랑은 우선 홀로 성숙해지고 나서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가장 탁월한 여류 시인인 에밀리 디킨슨은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이 아니리/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주고/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이렇게 깨어 있는 삶을 살려면 이웃을 절대로 내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삼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종이 맘에 안 드는 동료에게 분풀이하며 폭력을 가하는 행위에 대하여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요즘 다른 사람을 내 감정 폭발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정인을 공적으로 겨냥하여 '수구꼴통', '치매 걸린 노인'이라고 폄하하는 가하면 '똥물만도 못한 아무개', '황빠'. '노빠'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이런 세상에서 깨어 있는 삶을 살려면 우리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귀하게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간절히 바라봅시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또한 세상향락에 조심해야 합니다. 물질적 풍요는 좋은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각종 고급보석이 있었고 마지막 날 우리가 거하게 될 예루살렘 성도 각종 화려한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면 인간은 짐승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노아시대 많은 사람들이 심판을 갑자기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향락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마태 병행구절에 나오는 비유에도 나쁜 종은 술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다 주인을 엉겁결에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 삶의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의 함정을 조심합시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기쁜 일임을 잊지 맙시다. 주님과 함께 할 때만이 물질적 풍요는 비로소 의미가 있음을 기억합시다. 이 세상에서 즐거운 파티를 가질 때도 언제나 주님을 중심에 모시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처럼 사회적 양극화가 극심한 시대엔 나누는 삶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생산활동을 중지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부를 생산하되 골고루 나눌 수 있을 때까지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즐길 수 있길 바랍니다. 얼마 전 중국의 총리가 십 수년 전 한 시장을 방문할 때 입었던 허름한 겨울 점퍼를 다시 입고 나타난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할 삶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깨끗한 삶은 누가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는 명령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특별한 사명을 받은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이 마음에 새겨 실천해야할 말씀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항상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분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수의 헌신된 수도자 계급과 적당히 살아도 되는 평신도 그룹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의 이분화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든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갑시다. 어느 철학교수의 말처럼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오늘 하루가 내 인생의 첫날인 것처럼 여기고, 동시에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갑시다. 하여 우리 모두 기쁨으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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