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010.07.02 11:55

심판은 있다 (막 13: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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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매료되고 압도당한 제자들에게 정신이 버쩍 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전이 무너져 폐허가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 놀란 제자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으며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어떤 전조가 있을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곧 일어날 사건들이지만 성전파괴의 전조는 아닌 것들, 즉 거짓된 사람들의 미혹, 전쟁과 자연재해, 그리고 제자들에 대한 핍박에 대하여 먼저 언급하십니다. 이런 상황들은 재난의 시작일 뿐이기 때문에 성전파괴 이후에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바입니다. 하여 지난 주일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황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비로소 성전파괴의 전조를 언급하십니다. 배교행위의 발생과 함께 전무후무한 환난이 다가오고 그 와중에 거짓 그리스도들이 등장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와 관련해서 신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습니다. 쟁점은 이 전조들을 예수님 재림의 전조로 확대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저는 신학자들의 글을 읽고 본문을 묵상하면서 성전파괴의 전조로만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하여 그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잠정적 결론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꼭 동의하셔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 모두 더 겸손하게 학자들의 연구와 성령님의 인도에 귀를 기울이며 성경을 묵상할 때 보다 깊은 확신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성경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불완전하다고 해서 오늘 설교가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지 우리에게 신앙적 유익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령께서 이렇게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글을 우리에게 남겨 놓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혹 다른 입장에 서 계신 분이라도 오늘 말씀을 통해 신앙의 유익을 얻으실 수 있길 바라 마지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고된 상황들을 성전파괴의 전조로 국한시켜 보면, 오늘 우리에겐 과거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모든 역사공부가 그러하듯 중대한 과거의 사건을 곰곰이 살펴보노라면 현재를 좀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성전파괴의 전조를 살펴봅시다. 단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예고는 지난 주일에 다룬 부분과 유사하기 때문에 오늘은 생략하겠습니다.

1.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성전은 죄에 의해 장악되고 말 것입니다(14-16)
 
먼저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서지 못할 곳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니엘의 언어(단 11:31; 12:11)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집필 당시의 위험한 정치적 상황을 감안하여 성전이란 말 대신 '서지 못할 곳'이라고 다소 막연하게 표현합니다. 하여 독자에게 곰곰이 생각해서 무슨 뜻인지 이해하도록 권유를 합니다. 황폐하게 한다는 것은 성전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를 더럽힘으로 성전을 실제로 무너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니엘은 이방 군대가 성전 요새에 진입하여 유대인의 제사를 폐기하고 흉측한 파괴자의 우상을 세울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알렉산더 대왕 후 분리된 제국의 헬라권에 속한 시리아 셀류코스 왕조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는 주전 167년 유다 예배 금지령을 내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 신에게 헌정하고 그 신상을 세웁니다. 유대인에게 불결한 짐승인 돼지로 제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그와 유사한 사건이 성전파괴 전에 다시 발생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것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는지에 대하여 주석가들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주후 67년 11월부터 68년 봄에 이르는 기간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성취되었다고 봅니다. 그의 저서 『유대인의 전쟁』을 보면 열심당이 성전을 장악하여 죄수들로 하여금 지성소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만듭니다. 성전 안에서 살인을 자행하고 광대 파니(Phanni)를 우스꽝스럽게 대제사장으로 임명합니다. 이에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아나누스(Ananus)는 눈물을 흘리며 한탄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이렇게 가증스러운 것이 들어서고 거룩한 장소가 살인자들의 발에 사정없이 짓밟히는 것을 보기 전에 죽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그런가 하면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독수리가 새겨진 로마군대의 깃발이 성전 안에 세워짐으로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느 사건이 예수님 말씀의 진정한 성취인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두 사건 다 가장 성스러워야할 장소가 죄악된 세력에 의하여 장악되어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음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왜 이런 비극적 사건이 벌어졌을까?' 유대 성전예배의 타락에 그 기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청결사건을 통해 이미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귀를 틀어막고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어 닫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말은 죄악이 성전을 완전히 장악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그 겉모양만 댕그라니 남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영국성공회에 관한 서글픈 소식을 접했습니다. 영국성공회의 유력한 주교가 교회건물 보수를 위한 정부예산이 최근 삭감된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면서 좀더 많은 예산을 책정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하였습니다. 그 이유인즉 성공회 교회건물은 국가예산으로 보호할 만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건물을 성도들 스스로 보수할 힘조차 없을 정도로 교회는 영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도 정신 버쩍 차리지 않으면 이렇게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얼마 전 모 신학대 교수님을 통해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 대학교를 올해 졸업하는 한 여학생이 당한 끔직한 일로 말미암아 저에게 상담을 요청해왔습니다. 어느 목사의 비서로 취직했다가 교묘한 방법으로 유인 당해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다는 겁니다. 딸로부터 사정을 들은 어머니가 찾아가자 그 목사는 500만원을 내놓으며 적당히 무마하려고 했답니다. 그 목사는 이름을 말하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알 수 있는 부흥사요 소위 한국교계의 거물 중 한사람입니다. 한편으론 이렇게 은밀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론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용감하게 한국교회의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건이 드러난다고 해도 과연 한국교회가 이 일을 정의롭게 처리할 수 있을 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히려 당한 사람에게 탓을 돌리려는 것이 오늘 한국교계 지도층의 대체적인 분위기입니다. 많은 교계지도자들이 교회의 참된 영성과 도덕성 회복을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다양한 정치행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이런 한국교회를 향해 회개와 경성의 메시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뼈를 깎는 아픔가운데 회개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 역시 예루살렘 성전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죄악의 세력이 한국교회를 완전히 장악하여 그 내용은 완전히 망가진 채 화려한 건물만 비참하게 남게 될 것입니다. 광대 파니 같은 사람이 교계지도자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언덕교회는 부족한대로 한국교회의 미래를 진정으로 염려하는 마음으로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해 앞장서는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내년인 2007년은 평양대부흥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교계는 『1907 again』이란 슬로건을 걸고 내년에 다양한 모임을 가지려고 준비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벤트성 행사로 평양대부흥을 인위적으로 재현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언덕교회는 그 대열에 함께 할 수 있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2. 환난 즉 심판이 임할 날이 있습니다(17-19)

성전예배를 황폐케 하는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서는 것을 보면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다 바로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십니다. 환난 즉 유대의 범죄와 성전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곧 밀어닥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붕 위에서 놀던 사람은 집 안에 들어가 소유물을 챙기려고 하지 말고 바로 도망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들에서 일하던 사람은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아서지도 말고 곧바로 도망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임신한 여자와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신속하게 도망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환난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겨울이 되면 많은 비로 말미암아 길이 질퍽질퍽해지고 냇물이 불어 신속하게 도피하기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긴박하게 일어날 뿐 아니라 매우 처참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뒤로부터 지금 까지 없었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는 로마군대의 예루살렘 포위와 점령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유대백성들은 굶어 죽든지 아니면 로마군대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환난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역사의 끝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유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최후심판에 대한 예고편입니다. 심판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학자들과 성도들 중에도 심판을 이렇게 저렇게 설명해서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려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것은 경고용이지 정말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국엔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내놓습니다. 소위 만인구원론이라는 신학적 입장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 중 일부가 완전히 멸절하거나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당하는 것을 참아 보실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매우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엔 하나님의 성품에 중요한 오해가 담겨 있습니다. 이들에겐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의 분노와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노할 때 곧잘 이성을 잃지요. 증오와 미움에 압도당합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의 경험에 익숙해지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역시 심판하실 때 그럴 것이라고 유추하는 데 있습니다. 하여 하나님을 심판하는 분으로 규정하면 마치 하나님을 분노와 증오의 화신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심적 부담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전체를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길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확연히 드러납니다. 심판의 와중에도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완벽한 조화는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극한 고통을 겪으시고 마지막 숨을 쉬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자신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버림받음으로 인간에게 살 길이 열렸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성품상 인간의 죄를 죄 아닌 것처럼 취급할 수가 없으십니다. 동시에 인간을 차마 심판하실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로 대신 하나님이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하심으로 인간에게 생명의 길을 활짝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렇게까지 인간을 사랑하셨는데도 여전히 그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공의로운 심판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두 팔을 벌리시고 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늦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벧후 3:8-9] (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9)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마고 약속하신 지 어언 2000여 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치 그 긴 기간을 이틀처럼 기다리신 셈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아직도 안 오셨다며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관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롬 2:3-4). 한편으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다른 한편으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에 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심판이 두려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서는 안됩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 좋아서 믿어야 합니다(빌 1:21-23). 하지만 심판을 믿을 때 나태해지기 쉬운 우리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 것인지 아니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것인지를 진정으로 깨닫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심판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이들을 진실로 걱정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믿읍시다.

3. 주께서 택하신 백성은 살 것입니다(20-21)

예수님은 심판 가운데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이야기하십니다. 주께서 뽑으신 선택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줄여 주십니다. 실제로 주후 4세기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공격을 늦춤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도피해 살 수 있었습니다. 이는 마지막 날 심판 받을 사람과 구원받을 사람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주께서 사람들 중 일부를 뽑으셔 선택했다는 점을 주님이 불공평하다거나 인간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논리로 비약시켜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내가 지금 구원받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을 우리와 똑같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에 갇혀 있는 분으로 착각하는데서 생기는 오해입니다. C.S. 루이스는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현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완벽한 설명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선택과 우리의 자유로운 결단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 가를 그래도 어느 정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의 끝에 도달하면 예수님 자신이 명확하게 밝히신 것처럼 인류는 영생을 누릴 의인과 영벌을 겪게 될 불의한 사람들로 구분된다는 점입니다(마 25:31-46). 이 진리는 한편으론 우리에게 선택을 요청하는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현재의 결단이 나의 영원한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죄악 된 세상에서 진지하게 결단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말할 수 없는 위로를 가져다줍니다. 남은 자의 길을 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종착역이 있음을 알 때 위로 받고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도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히 12:2-3). 스데반도 돌로 맞아 죽기 직전에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는 기꺼이 순교의 길을 용감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행 7:54-60).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입니까?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롬 8:18).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은 당위입니다. 우리 모두 희망의 포로가 되어서 힘차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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