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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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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와 매미가 하루종일 재미있게 놀다가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하고 헤어지려고 했습니다. 이때 하루살이는 “매미야 내일이 뭐니?”하고 물었습니다. 매미는 캄캄한 밤이 지나면 오늘 같은 밝은 날이 오는 것이라고 설명해도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매미와 개구리가 같이 놀다가 개구리가 “매미야 내년에 다시 만나자” 하자 매미는 “내년이 뭐니?”하고 물었습니다. 개구리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통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루살이가 아닙니다. 인생은 꿈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꿈꾸는 인생에는 반드시 시련이 있습니다. 다는 사실입니다. 꿈이 클수록 시련도 큽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이 오기 전에는 밤이 있고 깊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시련은 복의 과정입니다.

나치 독일의 죽음의 소용소에서 살아남은 코리텐 붐 (Corrie ten Boom)은 이런 말을 수기에 썼습니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 어두워졌다고 해서 당신은 기차표를 찢어 버리거나 기차에서 뛰어 내리지는 않겠지요. 조용히 앉아 기관사를 믿고 있는 것이 최선책일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터널 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두워지고 답답해집니다. 그러나 터널은 임시적이며 결국은 통과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인내하며 기다리면 터널은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고난도 없기를 바라는데 이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적당한 궁핍, 고난 후에는 놀라운 일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양봉업자가 꿀을 치는데 겨울이면 중단될까 염려를 했습니다. 이 벌통을 남쪽 열대지방으로 가져가면 겨울이 없으니 꿀 생산을 배나 잘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꿀벌을 열대지방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첫 해에는 그 벌들이 부지런히 꿀을 날라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수확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에 벌은 그렇게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벌들은 전혀 일을 하지 않고 벌통을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양봉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겨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없으니 벌들이 꿀을 저장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벌들은 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기가도 꽃들이 있고 저기가도 꽃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없다보니 일년내내 꽃이 있었습니다. 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꽃만 많다고 양봉을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겨울이라는 계절 때문에 꿀을 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루살이가 아닙니다. 로봇도 아닙니다. 매우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고난도 많고, 넘어야 할 산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피곤한 때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영혼이 고갈 상태에 빠져 핍절해 질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시련의 골짜기에 들었을 때 낙심하고 좌절하며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다 나은! 더 좋은 생명의 길로, 축복의 길로 나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시련이 있기에 인도하는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좋은 곳을 준비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분이 아닙니다. 결코 죽이지 않습니다.
목자가 양을 이끌고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을 찾아 일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양떼를 험한 골짜기로 인도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가능하면 험한 골짜기를 피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곳을 통과하지 않으면 푸른 초장에 도달할 수 없을 경우 위험을 무릅쓰고 라도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을 향하여 떠나 갈 때 불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들어갔더라면 불과 일주일이면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그 길을 택하지 않으시고 홍해 길로 인도하시고 시나이 광야를 거쳐 가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13장 17절 이하에 보면 블레셋 땅을 통과하다가 전쟁을 하게 되고 전쟁으로 인하여 낙심이 되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갈까 봐 하나님께서 불과불 전쟁을 피해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셨다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30년간 종노릇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전쟁은 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적을 만나면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실제로 광야에서 조그마한 어려움을 겪을 때 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유를 미리 아셨기 때문에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깊은 생각이 있어서 광야길로 인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목자는 뜻이 있어서 골짜기로 인도해도 양떼들에게는 그 음침한 골짜기가 상당히 길고 험하게 느껴지고, 영영 벗어나지 못할 골짜기처럼 생각되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목자를 원망하기도 할 것입니다. 다른 좋은 길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이렇게 험한 골짜기로 인도하여 우리를 괴롭히는가? 불평도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입니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혜택이 없으면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간에는 국경문제로 오랫동안 분쟁을 해오다가 서로의 우호를 상징하는 유명한 예수의 동상이 두 나라의 국경에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동상은 칠레를 등진 채 아르헨티나를 향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칠레의 한 정치인이 대중 앞에서 예수의 동상이 칠레를 등지고 있으니 이게 무슨 꼴이냐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군중들도 격분하여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 신문 기자가 격분한 군중을 향하여 ‘여러분! 격분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의 동상이 아르헨티나를 향하고 있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우리 국민보다 더 많이 용서받아야 할 만큼 선량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군중들은 위로를 받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조금이라도 남보다 내가 더 유리하고 많은 것을 더 누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핍환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기만 하면 더 이상의 결핍증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인생입니다. 만사 만족입니다.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우리는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귀한 그릇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 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앙을 주시려고 하지 않으시고 평안과 소망을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목마를 때 바위를 터쳐서 물을 공급하시고, 만나를 내려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고, 고기가 먹고 싶을 때는 메추라기를 보내어 먹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내 산에서 저들의 삶의 지표가 되는 율법을 주시면서 계약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속하게 이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려 하였지만, 그들은 가나안의 족속들을 두려워하며 불평하며 들어가기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였기에 저들은 거친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 죽었습니다. 가나안의 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 . .
이 40년은 공연히 불순종하다가 보낸 허송세월, 고난의 세월이었습니다.

목자되신 하나님은 묵묵히 그 불평하는 양떼들을 이끌어 그 골짜기를 통과하여 마침내 푸른 초장,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그 푸른 초장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양떼들은 왜 목자가 그들을 그렇게 험한 골짜기로 인도하였는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목자가 양들에게 적당한 고생길로 인도하는 것은 양들이 목자를 믿고 사랑하고 있는지,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지, 시험하는 것이요, 양들을 훈련입니다.
양은 가장 약한 동물이면서 가장 사랑받는 동물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가만히 보면 살아가는 방법은 몇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싸워 이김으로 사는 약육강식의 원리입니다. 사자나 늑대나 범은 약한 것을 잡아먹고 삽니다. 우리 인간 사회도 이런 동물적인 원리가 다분히 남아 있습니다. 또 하나의 원리는 소나 말, 나귀처럼 열심히 일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동물들은 인간에게 유익을 주지만 피곤하고 힘겹게 삽니다. 그러나 세 번째 방법은 양과 같은 것입니다. 양은 자기를 방어할 무기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살기가 힘들어 목자가 길러 주어야 합니다. 양은 사자처럼 사나운 발톱이 없습니다. 독사처럼 독을 갖지도 않았습니다. 말처럼 뒷발질도 못합니다. 노루처럼 날쌔게 달릴 수도 없습니다. 어리석어서 왔던 길도 못 찾는 우매한 동물입니다. 스스로 살 길을 찾지 못합니다. 길을 잃으면 골짜기에서 헤매다가 죽습니다. 오직 양은 목자를 따르고 그 보호를 받아야 삽니다. 결코 양은 숨어 살지 못하고 남을 해치며 살지 못합니다. 양은 사자처럼 살지도 않고 소처럼 일하며 살지도 못합니다.양은 인간에게 참으로 유익한 동물입니다. 주인의 보호를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도 양 같습니다. 스스로 살 수 없습니다. 목자가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양은 주인에게 참 유익한 짐승입니다. 젖과 고기를 사람에게 제공해 줍니다. 양털은 의복을 짜는 모직이 됩니다. 뼈는 못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고기는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이같이 양은 인간을 위해 유익한 존재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크게 사용된 신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주인되신 하나님께 유익한 조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양은 기르시는 목자에게 맡기고 살아야 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으로서 목자이신 주님께 온전히 맡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가슴 아픈 것은 오늘의 시대는 불신 시대입니다. 어렸을 때는 학교 선생님은 믿었습니다. 제일 존경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 이런 사람들이 사회에서 존경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불신하는 풍조가 사회 전반에 가득합니다. 누가 선생님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판사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의 풍조가 문제입니다.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 보십시요. 당신은 정말 행복하십니까?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이상한 불신풍조에 젖어 있습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우리가 음침한 골짜기로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 길은 다만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9)고 하였습니다.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양의 무기는 믿음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를 스스로 지키기 위한 무기가 한 가지씩 있습니다. 뿔로 받든지, 이빨로 물어뜯든지, 발로 달리든지, 날개로 날든지, 어떤 벌레는 그 모양이 어찌나 나뭇가지와 같은지, 변장술로 자기를 지킵니다. 그러나 양은 전혀 자기 방어 무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나의 목자는 선하시기에 그는 나를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신다는 믿음, 이것이 양된 성도의 무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가 스스로를 지키는 무기를 갖습니다. 공부가 무기요, 돈이 무기요, 권세가 무기요, 기술이 무기요,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무기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1-5)

그 믿음은 그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믿음이 없으면 주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믿음을 잃으면 주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의심만 생깁니다. 결국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다른 목자의 음성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10:4-5)

그러나 믿음이 없는 양은 목자의 음성을 모릅니다. 선한 목자인지 삯군 목자인지 구별을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의 모습입니다. 그 때는 분별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53:6) 죄가 무엇입니까? 결국, 죄란 목자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길을 자기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까? 목자를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목자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목자의 인도를 받아 푸른초장 맑은 시내에서 먹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 .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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